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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툴루 신화(Cthulhu Mythos) : 개념과 역사
Written by 미펜 (http://mystery.pe.kr)
산업 혁명이 가져온 눈부신 발전과 후유증이 공존하는 공간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물질적 과학주의가 또 하나의 종교로 받아들여지는 곳이다. 과학 발전이 무한하다는 전망과 함께 H. G. 웰즈는 과학적 로맨스와 화성의 생물체를 선보이고, 극장의 스크린에서 외계인의 침공이 벌어진다.
이 시점을 배경으로 러브크래프트라는 또 하나의 독특한 작가가 외계의 존재를 묘사한 일군의 소설들을 펄프 잡지에 발표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대의 시점, 지구에 군림하던 일단의 외계 존재들이 영겁의 세월을 거치며 금서와 꿈, 소수 인간의 숭배 의식 속에 묘연하고 섬뜩한 자취를 남기며 또 한번의 부활을 기다린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위 "우주적 공포(cosmic horror)"는 설명할 수 없고(indescribable), 형언조차 할 수 없는(unutterable) 정체불명(unknown, nameless)이라는 작가 자신의 단언적 수식어를 앞세운다.
그러나 표현할 수 없는 공포에 대해 러브크래프트는 치밀하고 집요한 묘사로 그려내는 이율배반적인 모험을 감행한다. 그는 초자연적인 공포에 과학과 이성이라는 묘사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공포 문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실험한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러브크래프트가 남긴 일련의 소설들은 실제와 가상, 현실과 꿈, 금서와 지형학(가상 공간), 신적 존재와 유물론이라는 극단의 긴장감 사이에 배치된다. 러브크래프트는 <위어드 테일즈 Weird Tales>의 대표 작가로서 한정된 독자와 동료 작가 사이에 "러브크래프트 써클"이라는 문학 계보를 형성하지만, 1937년 작가로서는 무명에 가까운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러브크래프트의 죽음 직후, 러브크래프트 문학 써클의 일원이자 러브크래프트를 문학적 스승으로 여겼던 오거스트 덜레스(August Derleth), 그는 스승의 죽음과 함께 그 이름과 작품이 영원히 망각될 위기를 목도한다. 러브크래프트와 영욕을 함께했던 <위어드 테일즈>는 잡지의 정체성과 존립 기반을 제공했던 대표 작가를 다시 살려내기엔 펄프 잡지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기운과 재정적 압박에 봉착해 있다. 러브크래프트 생전, 작가 자신보다도 더욱 신화 체계에 매료되고 몰두했던 오거스트 덜레스는 직접 아컴 출판사를 차리고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전문으로 출판한다. 그는 '사후 공동 집필'이라는 형태로(러브크래프트에 영감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쓴) 소설까지 발표하며, 러브크래프트 문학을 체계화해야 한다는 필요와 사명감을 느낀다. 그가 시도한 체계화는 불완전하면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러브크래프트는 덜레스의 "크툴루 신화" 체계 속에서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며, 미국 문학사상 가장 독특한 유산의 하나로 자리잡는다.
러브크래프트가 쓴 일련의 소설(주로 우주적 공포를 주제로 한)에 명명된 크툴루 신화는 그레이트 올드원(Great Old Ones)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신적 존재(Elder Gods)들이 체계의 중심을 형성한다. 신화 속에 '아자토스 Azathoth'가 최상의 자리에 위치하며, '요그-소토스 Yog-Sothoth'가 그와 비슷한 위상으로, 둘 다 지상과 드림랜드의 공간에 등장한다. 냉혹하고 무감각한 외계 신들의 대변자이자 메신저, '날라호테프 Nyarlathotep'도 두 개의 공간을 넘나들며 독특하고 변화무쌍한 모습을 선보인다. 요그-소토스의 아내이자 천명의 자식을 거느린 '서브-니거레스 Shub-Niggurarth', 클라크 애쉬턴 스미스(Clark Ashton Smith)의 창조물에서 스카웃 된 '차트호거 Tsathoggua', 그 밖에도 '노덴스 Nodens'라는 절대 심연의 제왕이 아자토스와 반대 세력으로 신화의 체계 속에 편입된다.
신들을 배치한 덜레스의 체계화 작업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중에서 크툴루 신화와 관련해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다음의 문장에서 그 정신과 주제를 차용한다.
"세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일이 있다면, 인간이 자신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인지 모른다. 끝없는 암흑의 바다 한복판, 우리는 그 중에서도 무지라는 평온한 외딴섬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멀리 항해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학이라는 전문 영역도 지금까지 온갖 왜곡과 남용을 일삼아 왔지만 아직까지 인류에게 오싹한 위험을 알린 적이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제 각각이었던 지식이 통합될 것이고, 그때라면 끔찍한 전망과 함께 소름끼치는 현실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아마 우리는 그 현실에 미쳐버리거나, 진실을 외면한 채 또 다른 암흑 속에서 평화와 안정을 구할지 모른다.
신지론자들은 인류의 발전이 불완전한 사건의 일부이며, 경이롭고 숭고한 우주의 순환에서 극히 작은 부분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나아가 그들은 피가 거꾸로 설만큼 기이한 생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암시해 왔다. 그런 진실을 은폐해온 것은 우리의 맹목적인 낙관주의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도 금지된 영겁이 있음을 깨닫지는 못했다. 내가 생각하고 꿈을 꿀 때마다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 가는 그 영겁의 존재...... 섬뜩한 진실을 어렴풋이 감지할 때처럼, 나는 일상적인 우연 속에서 그 영겁의 존재를 깨달았다. 낡은 신문 기사와 어느 죽은 교수가 남겨놓은 노트가 그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깨달음에 도달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이와 관련한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을 생각이다. 그 교수 역시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은폐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노트를 미처 없애기 전에 그에게 돌연한 죽음이 찾아왔던 것이다." <크툴루의 부름> 도입부 중에서
1960년대 반문화(counterculture)의 조류를 타고 러브크래프트는 당대 수많은 판타지 소설에 속속 등장함으로써 시대 정신(Zeitgeist)으로까지 언급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러브크래프트의 '신'을 찾아 영감을 얻고 창조력을 실험하는 동안 그 외계의 신들이 실존한다고 믿었으며, 린 카터(Lin Carter)와 브라이언 럼리(Brian Lumley) 등 일군의 작가들은 크툴루 신화를 더욱 구체화시킨다. 크툴루 신화는 신적 존재와 우주적 공포를 기조로 금서와 가상 공간이라는 글쓰기 전략,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깨뜨리는 포스트 모더니즘, 컬트(cult), 이성과 혼돈의 극단과 맞물리며 증폭된다. 이제 크툴루 신화는 일련의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붙여진 명칭뿐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확장된 결과물과 영향력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자리잡는다.
아마추어에서 재능있는 창조자까지 크툴루 신화에 열광하며 상상력의 근원과 표현의 수단으로 삼는 과정에서 크툴루 신화는 다양한 변주를 낳는다. 변주는 때론 화려하고, 때론 엉뚱하며 때론 도발적이다.
마술계와 오컬티스트 일각에서 받아들인 크툴루 신화는 러브크래프트가 무신론자이며 유물론자라는 모순까지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한 반향을 몰고온다. 그들에게 러브크래프트는 성전이며, 크툴루는 의식이 된다. 그들은 요술이나 속임수가 아니라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텍스트를 철저히 읽음으로써 '별이 제자리에 놓일 때"를 기다리며 크툴루의 부활을 의심치 않는다. 데이곤 밀교, 러브크래프트 집회, 스태리 위즈덤, 트레피저헤드론 등등 <인스머스의 그림자>와 <누가 블레이크를 죽였는가> 등의 러브크래프트 소설속 허구를 딴 마술 종파들이 엄숙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금기의 지식을 쫓다 파멸하는 러브크래프트의 21세기적 주인공이 되기를 자처한다. 물론 러브크래프트의 독자들 상당수는 오컬트와 마법 세계에서 러브크래프트를 수용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우려와 냉담한 시선을 보낸다.
크툴루 신화는 대체 역사(Alternative History: 만약에 --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를 가정하는 역사의 한 장르)의 흐름에도 관여한다. <미래의 기억 Chariots of the Gods>이라는 책에서 나즈카 문양이 우주인의 비행장으로 사용됐다고 주장한 에리히 폰 대니켄(Erich Von Daniken),
<시리우스 미스테리 The Sirius Mystery>에서 서아프리카의 도곤(Dogon)족과 외계인의 접촉을 주장한 로버트 템플(Robert Temple), <신의 지문 Fingerprints of the Gods> 등의 일련의 저서에서 초고대 문명과 생명의 기원을 주창한 그라함 핸콕(Graham Hancock) 등을 일례로 들며, 그들의 주장과 관련 러브크래프트와 크툴루 신화가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주장들은 추론에 가깝지만 의외로 진지하고 설득력의 여운을 남긴다.
변주가 아닌 곳에서 만나는 크툴루 신화도 변화무쌍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는 무신론자(러브크래프트)에서 유신론자(덜레스)로 전이되는 과정의 태생적(?) 한계에서 빚어진 신화 체계의 모호함과 혼란 때문만은 아니다. 이 문제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크툴루 신화에 열광하며 재생산해내는가 하는 의문과 더 깊은 관련을 맺는 것 같다. 크툴루 신화를 문학의 범주로 한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변주든 아니든, 뚜렷한 차이보다 쉼없는 독자의 열광이라는 공통점이 두드러진다. 러브크래프트는 현재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을 비롯해 전세계 10여개 국에서 읽히고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 철학자 들뢰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는 공저한 <천의 고원 A Thousand Plateaus>에서 러브크래프트를 하나의 장으로 끌어들여 찬사를 보낸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독특한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영미권에서는 평론가 마리콘다(Steve J Mariconda)와 전문 연구가 조쉬(S.T. Joshi)를 필두로 질적, 양적으로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를 양산한다.
로버트 E 하워드, 클라크 애쉬턴 스미스, 로버트 블록, 오거스트 덜레스 등의 소수 작가에서 출발한 러브크래프트 문학 써클은 린 카터(Lin Carter)와 헨리 쿠트너(Henry Kuttner), 콜린 윌슨(Colin Wilson), 브라이언 럼리를 거쳐 현재의 대표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들인 앤 라이스(Ann Rice), 스티븐 킹(Stephen King), 닐 게이먼(Neil Gaiman)까지 아우른다. 메탈리카(Metallica)는 크툴루를 노래하고, 스튜어트 고든(Stuart Gordon)은 <좀비오 Re-Animator>로 공포 영화의 거장으로 군림하며, <에일리언 Alien>을 탄생시킨 H.R. 기거와 시나리오 작가 댄 오배넌(Dan O'Bannon)도 크툴루 신화에서 영감을 받는다.*
(* 이 홈페이지에서 나오는 음악 중 첫번째와 두 번째 곡은 메탈리카의 '크툴루의 부름 Call of Ktulu', 인스머스의 그림자를 노래한 'Thing That Shoud not be'이다. 스튜어트 고든의 <좀비오>는 러브크래프트의 '허버트 웨스트-리애니메이터 Herber West-Reanimator'를 원작으로 했으며, 고든은 이후 브라이언 유즈나와 함께 좀비오 연작을 만든다)
샘 레이미 감독의 <이블 데드The Evil Dead>까지 포함할 정도로 기준을 완화한다면 크툴루 신화가 몰고온 문화 전반의 영향력은 가히 "러브크래프티안 컬처 Lovecraftian Culture"라고 할만하다. 무엇보다 크툴루 신화는 여전히 다양한 변주를 낳으며, 문화 전반에서 재생산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크툴루 신화를 가능한 중립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나, 미펜: 중립적이다.
러브크래프트 팬: 러브크래프트를 비하할 정도로 인색하다.
러브크래프트를 모르는 사람: 뭔지 모르지만, 꽤 과장하는 것 같다.
미펜의 와이프: 그러니까 그게 돈이 되냐고? (그녀는 예전과 달라졌다!)
크툴루 신화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크툴루 신화의 놀라운 재생산력이 진행형이라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툴루 신화에 대한 논쟁들도 뚜렷한 해결책보다는 진행형에 가깝기 때문이다. 러브크래프트를 알면 무조건 숭배하고, 모르면 무조건 무시한다는 분위기가 여전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러브크래프트를 아끼는 사람들도 '크툴루 신화'라는 말을 실제로 만든 오거스트 덜레스에 대해서는 애증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덜레스는 러브크래프트 문학의 수정주의자이자 대변자로서 크툴루 신화의 논쟁에 불씨를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1. 크툴루 신화 체계에서 아자토스와 요그-소토스가 가장 상위에 있는데, 왜 크툴루 신화인가? 아자토스 신화, 요그-소토스 신화가 더 적당하지 않을까?
2. 요즘 붕어빵에는 붕어가 실제로 들어있다는데, 크툴루 신화에는 진정한 의미의 신화가 있기는 한가?
3. 크툴루 신화는 오거스트 덜레스의 것인가, 러브크래프트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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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들은 광범위한 논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크툴루 신화에 대해 말할 때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또 하나, 우리나라에서 받아들이는 러브크래프트는 미국과 영국과 다르며, 프랑스와 일본과도 다를 수밖에 없다. 다음에는 크툴루 신화와 관련된 러브크래프트 본인의 시각과 그에 대한 오거스트 덜레스의 해독 혹은 오독 과정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