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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가 러시아 땅이 될 뻔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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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5
조회수 : 9857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8/08/16 11: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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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1815년 하와이가 러시아 영토가 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1799년까지 시베리아를 모두 정복한 러시아는 그 여세를 몰아 베링 해협을 건너, 북미 대륙에까지 식민지를 넓히려 했습니다. 그래서 1810년까지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까지 점령한 러시아는 그 여세를 몰아, 태평양의 하와이까지 진출하여 군사 요새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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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이 모두 차지했던 영토를 나타낸 지도. 최전성기에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3대륙에 걸쳐 국토가 이어졌던 거대한 나라였습니다.)

 

러시아가 어떻게 머나먼 하와이에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알려면, 먼저 러시아라는 국가의 성립과 팽창 과정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원래 러시아는 지금처럼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큰 나라가 아니라, 우랄산맥 서쪽의 키예프와 노보고르드 같은 작은 도시 국가들의 집합체였습니다. 그러다가 1236년부터 러시아는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칸이 이끄는 몽골군에 정복당하고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약 250년 동안 계속된 몽골의 러시아 지배는 1480년 러시아 모스크바 공국의 군주인 이반 3세(Ivan III: 1440~1505년)가 더 이상 몽골인들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끝났습니다. 그리고 1552년과 1556년에는 몽골인들의 왕국인 카간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이 러시아에게 정복당함으로써 러시아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주인인 몽골인들을 거꾸로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1582년 서부 시베리아의 시비르 칸국이 러시아인 탐험가 예르마크(Yermak: ?~1585년)가 지휘하는 코사크 용병들에게 멸망함으로써, 러시아인들은 이제 광대한 시베리아로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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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르 칸국을 정복하여 시베리아 정복의 교두보를 건설했던 예르마크.)

 

그 후로도 러시아인들의 동방 진출은 계속 이어져서 1640년대에는 중부 시베리아의 퉁구스족이, 1680년대에는 바이칼 호수의 부랴트족이, 1690년대에는 동부 시베리아의 야쿠트(사하)족이 모두 러시아인들에게 정복당하고 그들의 고향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18세기 초인 1724년, 러시아인들은 아시아와 북미 대륙을 바다로 갈라놓는 베링 해협까지 탐험했으며 1741년에는 러시아인 선장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 상륙했습니다. 알래스카의 원주민인 틀링깃족들이 종종 러시아인들을 습격하기도 했으나, 러시아의 군사력에 의해 모두 진압되었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알래스카 남부에 시트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러시아령 알래스카 식민지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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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고용되었던 코사크족 용병. 코사크족은 러시아의 변경으로 이주한 러시아 농민들과 몽골-투르크계 유목민들의 혼혈로 탄생한 집단인데, 러시아 군대에 복무하는 대가로 폭넓은 자치권을 누렸습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은 코사크족 용병들이 거의 도맡아했습니다.)

 

러시아인들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드넓은 시베리아를 정복해 나갔던 이유는 바로 여우와 수달과 담비 같은 동물들의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까짓 수달이나 담비 가죽이 뭐 그리 대단할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겨울이 길어 추운 날이 많았던 러시아에서 담비나 여우 가죽으로 만든 모피는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고급 상품으로 여겨졌습니다. 한 예로 1581년 시비르 칸국을 정복한 러시아 군대는 수많은 모피들을 노획하여 러시아 황제인 이반 4세에게 담비와 여우의 모피들 수만 장을 바쳤습니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잔뜩 받은 이반 4세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시비르 칸국을 정복한 러시아군 사령관인 예르마크가 예전에 저질렀던 강도죄를 모두 사면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정복해가면서 얻은 모피들은 러시아의 국가 경제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623년 시베리아의 러시아인 관리가 남긴 보고서에 의하면 검은 여우 모피 두 장의 가격은 110루블인데, 그 돈으로는 말 10마리와 암소 20마리 및 100에이커의 땅을 살 수 있었습니다. 1650년대에 이르면 러시아는 국가 수익의 최대 30% 가량을 모피 무역으로 충당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시베리아 정복에 나섰던 러시아인들은 모피를 가리켜, “털이 달린 황금”이라고 불렀습니다.


1598년에서 1613년 동안, 러시아는 제위 계승을 놓고 대혼란에 빠졌는데, 이때 시베리아에서 얻은 모피로 인한 수익 때문에 끝내 정부가 파산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모피는 러시아와 외국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선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1595년 러시아는 신성로마제국(독일)에 다람쥐 모피 33만 장과 담비 모피 6만 장을 보냈고, 1635년 터키에 1만 루블의 모피를 휴전 협상에 쓸 선물로 보냈습니다.


이 정도면 담비나 여우 가죽으로 만든 모피가 얼마나 고가의 상품이었는지, 왜 러시아인들이 모피를 얻기 위해 혹독한 추위가 지배하는 드넓은 시베리아를 파죽지세로 휩쓸고 다녔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러시아인들이 먼 알래스카와 북미 대륙에까지 갔던 이유도 바로 모피를 얻기 위해 동물들을 너무 많이 잡아 죽이는 바람에 모피가 차츰 바닥나자, 새로운 모피들을 얻으려는 산지를 찾아서였습니다.


한편 알래스카가 아시아가 아닌 북미 대륙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러시아인들은 새로운 땅인 북미로 진출하려는 야심에 부풀었습니다. 1799년 러시아의 무역 상인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Nikolay Petrovich Rezanov: 1764~1807년)는 북미 대륙에 러시아의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한 사업체인 러시아-미국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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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미국 회사를 만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의 초상화)

 

그리고 같은 해, 니콜라이는 러시아 황제 파벨 1세로부터 앞으로 20년 동안 러시아-미국 회사가 북미 대륙에 진출하는 모든 거점에서 운영과 사업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승인을 담은 면허장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러시아-미국 회사는 러시아 정부를 대신하여 알래스카를 포함한 북미 대륙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는 모든 자격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레자노프와 그의 심복인 알렉산드르 안드레이비치 바라노프(Alexander Andreyevich Baranov: 1746~1819년) 등 러시아-미국 회사의 고위급 간부들은 알래스카를 식민지로 삼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북미 대륙의 더 남쪽까지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우선, 모피 상인들이 탐내던 모피를 더 많이 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또한 알래스카 식민지에 차츰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냥이나 고기잡이만으로는 식량을 충분히 공급하기가 어려워서,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지닌 따뜻한 남쪽의 땅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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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안드레이비치 바라노프의 초상화)

 

그리하여 레자노프는 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한 끝에 1806년 4월,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레자노프는 캘리포니아를 다스리는 스페인 장관인 조세 다리오 알게우엘로를 만나서, 캘리포니아에서 알래스카의 러시아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면, 그 대가로 모피를 주겠다는 물물교환 무역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조세 장관은 난색을 표했습니다. 당시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에서는 외부로 식량을 유출하는 일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난관에 부딪친 레자노프는 어찌해야 할 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고민을 하다가, 조세 장관이 개최한 성대한 연회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연회장에서 레자노프는 한 아름다운 소녀와 만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콘켑시온 알게우엘로(Maria Concepcion Arguello: 1791~1857년)였는데, 조세 장관의 외동딸로 당시 캘리포니아 제일의 미녀로 칭송받던 여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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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도 종교도 나이도 초월한 사랑에 빠진 소녀, 마리아 콘켑시온 알게우엘로.)

 

그 다음은 마치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5세의 소녀였던 마리아는 42세의 중년 남성인 레자노프와 만나자 사랑에 빠졌고, 이윽고 그와의 결혼까지 결심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다.


이 사실을 알고 조세는 크게 놀랐습니다. 당시 스페인인들이 그렇듯이 조세 장관과 마리아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레자노프는 러시아인이었기에, 러시아 정교회를 믿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원칙적으로 가톨릭 신자끼리만 결혼하도록 허용하는데, 다른 종파인 러시아 정교회 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세는 마리아에게 교회법상 레자노프와의 혼인은 허락할 수 없다고 타일렀으나, 사랑에 빠진 마리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레자노프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결국 조세는 딸의 뜻에 굴복했고, 6주일 후에 레자노프는 마리아와 일단 약혼식을 올렸습니다. 딸을 아끼던 조세는 사위가 된 레자노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빵과 말린 고기 등 식량이 가득 실린 수송선을 알래스카로 보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약혼식이 이루어졌지만, 레자노프는 캘리포니아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앞으로 북미 대륙에서의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지원을 더 많이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야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는 북미 대륙에 정착할 대규모의 러시아 이민자들을 보내달라는 제안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레자노프는 마리아에게 2년만 참고 있으면 꼭 돌아와서 정식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알래스카를 거쳐 캄차카 반도에 상륙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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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자노프의 무덤을 촬영한 사진)

 

그러나 불행히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던 도중인 1807년 3월 8일, 레자노프는 시베리아 중부 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죽었습니다. 대륙과 대양을 넘나들며 정신없이 벌인 사업들의 뒤처리를 하느라 무척 피로해진 레자노프는 그만 과로사를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의 무덤에는 마리아를 그리워하며 남긴 유언인 “나는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다오. 하지만 나는 결코 당신을 잊을 수 없소.”라는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한편 캘리포니아에서 하염없이 레자노프를 기다리고 있던 마리아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무척 상심하여 몬테레이에 수녀원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평생 동안 수녀가 되어 결혼하지 않고 살다가 1857년에 죽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은 남자였지만, 마리아는 레자노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레자노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1812년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에는 러시아-미국 회사의 고문인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쿠스코프가 러시아군이 주둔할 기지인 로스 요새(Fort Ross)를 건설했습니다. 로스 요새는 러시아(Russia)의 이름을 줄여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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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에 세워진 로스 요새의 전경을 그린 스케치화)

 

로스 요새는 주변 지역에서 농사를 지어 얻은 식량을 북쪽의 알래스카에 설치된 러시아 식민지에 공급하면서,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와의 무역을 수행할 거점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로스 요새가 담당하는 전체 면적은 대략 29㎞ 정도였으며, 주위의 강가와 계곡에서 수달을 잡아 모피를 얻는 무역 사업이 주된 수익원이었습니다. 로스 요새에서 생산하는 모피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중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춥고 황량한 알래스카에 비하면 로스 요새가 들어선 캘리포니아의 기후는 비교적 따뜻해서 농사짓기에 적합했으며, 로스 요새의 주변 토양은 상당히 비옥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로스 요새에서는 농사가 잘 되어, 알래스카로 식량을 빠짐없이 실어 날랐고 정착한 러시아인들도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로스 요새가 건설되고 러시아인들이 정착하자, 알류트족 같은 북태평양의 원주민들은 물론 핀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에스토니아인, 그리고 많은 외국인들이 몰려와 자리를 잡고 살았습니다.


로스 요새는 1812년에서부터 1841년까지 약 29년 동안 운영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다섯 명의 행정관들이 차례를 이어가며 재임했습니다.

 

이반 A. 쿠스코프(재임 기간 1812~1821년)

칼 J. 폰 스크미드트(재임 기간 1821~1824년)

파벨 I. 셸리코프(재임 기간 1824~1830년)

페테르 S. 코스트로미티노프(재임 기간 1830~1838년)

알렉산드르 G. 로트체프(재임 기간 1838~1841년)

 

캘리포니아는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에게서 독립하면서 멕시코 영토가 되었으나, 로스 요새는 여전히 러시아의 소유였습니다. 1848년에야 비로소 캘리포니아는 미국에 편입되었습니다. 캘리포니아가 ‘미국’ 땅이 되기 7년이나 앞서 러시아는 이미 캘리포니아에 영토를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스 요새는 1833년과 1837년에 말라리아와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 퍼져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고, 해달과 수달 같이 모피를 제공해주던 동물들도 너무 많이 잡아서 모피 무역도 중단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재정 악화를 견디다 못한 러시아-미국 회사는 결국 1841년, 로스 요새를 멕시코인 존 셔터에게 3만 달러에 팔고, 그때까지 요새에 남아있던 회사 직원들을 모두 알래스카로 철수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레자노프가 야심차게 추진해 오던 캘리포니아 식민지는 36년 만에 끝났습니다.


한편 상사 못지않게 바라노프도 새로운 땅을 찾는 탐험에 열성이어서 1808년 배를 타고 알래스카 남쪽을 항해하다가 하와이 제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하와이 섬의 군주인 카메하메하 1세(Kamehameha I)를 만났습니다. 당시 하와이 제도는 여러 개의 섬들을 각각 다스리고 있던 부족장들끼리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바로 카메하메하 1세였습니다. 훗날 카메하메하 1세는 다른 부족장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하와이 제도 전체를 통일하여 하와이 왕국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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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제도 전체를 최초로 통일한 카메하메하 1세의 초상화. 일본의 인기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기술인 ‘카메하메하’는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입니다.)

 

카메하메하 1세와 만난 바라노프는 그에게 러시아령 알래스카와 하와이 사이의 물물교환을 제안했습니다. 러시아령 알래스카는 하와이로 모피와 가죽을 수출하고, 그 대가로 하와이는 러시아령 알래스카로 돼지고기와 닭고기 및 바나나와 고구마 등의 식량들을 수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카메하메하 1세는 그 제안에 동의하였고, 이렇게 해서 러시아-미국 회사는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에 식민지를 설치한데 이어, 남쪽의 하와이와도 무역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미국 회사의 내부에서는 알래스카의 원주민인 틀링깃족을 군사력으로 제압하고 알래스카를 식민지로 삼은 것처럼, 하와이에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자는 여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미국 회사의 경영진들은 그런 여론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으며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인 1815년 1월 30일, 베링 해협에서 약 10만 루블 어치의 모피를 싣고 가던 러시아-미국 회사 소유의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하와이 제도 서쪽의 카우아이 섬의 해안에 좌초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선원들은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그들이 싣고 가던 물품들은 모두 카우아이 섬의 지배자인 카우무알리(Kaumualii)에게 압수당했습니다. 카우무알리는 자신이 카우아이 섬을 다스리고 있으므로, 카우아이 섬의 해안에 밀려 온 물건들은 전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나마 선원들은 러시아령 알래스카의 수도인 시트카로 떠나는 것을 허락받았기에, 서둘러 시트카로 돌아가 러시아-미국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귀중한 상품인 모피들이 카우아이 섬의 족장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접한 러시아-미국 회사에서는 사태의 해결 방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레자노프가 죽은 이후, 회사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던 바라노프는 평화적인 해결책을 주장했고, 다른 직원들도 그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러시아-미국 회사가 가진 군사력은 몇 군데 거점과 무역로를 지키는 것이 전부인 터라, 섣불리 먼 곳의 원주민들을 상대로 군사력을 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바라노프는 러시아-미국 회사의 직원이자 독일인 의사인 게오르그 안톤 스카페르(Georg Anton Schaffer: 1779~1836년)를 카우아이 섬으로 파견하여, 그곳의 지배자인 카우무알리와 만나서 그가 몰수한 러시아-미국 회사 소유의 모피들을 회수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1815년 10월, 하와이로 떠난 스카페르는 우선 곧바로 카우아이 섬으로 가지 않고, 먼저 하와이 섬으로 향하여 카메하메하 1세와 그의 왕비를 만나서 그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진 카메하메하 1세는 스카페르에게 그가 머물 건물과 병원을 지어주었고, 그는 하와이 섬에서 약 7개월 동안 머무르며 다른 주민들에게도 의료 봉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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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안톤 스카페르의 초상화. 그는 하와이 제도의 카우아이 섬에 러시아 요새를 건설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스카페르가 귀중한 상품인 모피를 서둘러 찾으러 가지 않고 왜 하와이 섬에서 시간을 보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 하와이 제도의 정황을 고려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을까요? 


당시 카메하메하 1세는 하와이 제도의 최강자였고, 카우무알리는 그에게 복종하는 신하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스카페르는 카우무알리보다 먼저 카메하메하 1세를 만나서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호의를 사서 도움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만약에 그가 카메하메하 1세를 제쳐두고 카우무알리를 먼저 만나게 되면, 행여 카메하메하 1세가 자신의 권위가 무시당했다고 여겨 러시아-미국 회사와 스카페르에게 뭔가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렸겠지요.


해가 바뀐 1816년 5월 8일, 하와이 주민들에 대한 의료 봉사를 모두 마친 스카페르는 카우아이 섬에 도착하여 마침내 카우무알리를 만났습니다. 스카페르와의 회담에서 카우무알리는 자신이 몰수한 러시아-미국 회사 소유의 모피들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말을 덧붙였는데, 자신의 부족과 카우아이 섬이 러시아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러시아 제국에 복종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스카페르와 만나기 6년 전인 1810년, 카우무알리는 카메하메하 1세에게 굴복하였고 복속된 상태였으며, 그는 이런 현실이 매우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힘을 빌려 카메하메하 1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권력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카우무알리의 뜻하지 않은 제안에 스카페르는 찬성했고, 자신이 러시아-미국 회사를 대신하여 카우무알리를 러시아 제국의 신하로 인정하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카우아이 섬에 러시아 군대의 요새를 짓고 러시아 군사들이 주둔한다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카우무알리가 돌려준 모피들을 배에 싣고 시트카로 돌아가 러시아-미국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일개 직원이 전체 회사를 대신해서 외부 집단과 멋대로 조약을 맺은 것은 엄밀히 말해 월권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미국 회사에서는 스카페르에게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전해준 조약의 내용대로 카우아이 섬에 주둔할 러시아 군대와 무기 및 장비들을 보내주었습니다. 


회사의 최고 경영진인 바라노프는 아마도 카우아이 섬의 지배자가 자발적으로 러시아 제국에 복속하겠다고 먼저 제안했으니 명분상 문제될 것이 없으며, 이번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에 이어 하와이에까지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기에 스카페르가 가져온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카우무알리와 스카페르의 회담이 있은 지 다음 해인 1817년, 스카페르는 약속대로 300명의 러시아 군사들과 그들이 사용할 군수 물자들을 가지고 카우아이 섬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카우아이 섬의 남동쪽인 와이메아(Waimea) 계곡과 강 근처에 세 개의 러시아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요새들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황후인 엘리자베스 및 러시아 군대의 원수인 바클레이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르 요새(Fort Alexander)와 엘리자베스 요새(Fort Elizabeth)와 바클레이 요새(Fort Barclay)라고 불리었습니다. 


이 요새들을 짓는데 카우아이 섬의 원주민 수백 명이 동원되었으며, 카우무알리 자신도 세 명의 부인들과 함께 목재와 흙을 나르며 건설에 참여했습니다. 그 밖에 스카페르가 데려온 러시아인과 알류트족(러시아에 복속된 알래스카의 원주민 부족들 중 하나)으로 구성된 러시아 군사들도 요새 건설을 도왔습니다. 


완공된 요새에는 대포와 머스킷 소총 등 각종 무기들이 설치되었으며, 포탄과 총탄 및 화약들이 보관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새에는 모두 러시아 제국의 국기가 올라갔고, 스카페르는 카우무알리에게 러시아 국기를 선물했습니다. 카우무알리는 그것을 받아서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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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제도 서북쪽, 카우아이 섬의 와이메아 계곡에 세워진 러시아 요새의 흔적)

 

이 무렵, 카우아이 섬의 동남쪽에 있는 오아후(Oahu) 섬에도 러시아인과 알류트족들로 이루어진 러시아 군대 100명이 상륙하였습니다. 그들은 섬에 주둔하며 전초 기지를 건설했고, 카우아이 섬에 주둔한 러시아 군대와 협조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이렇듯 하와이 제도에 서서히 러시아의 영향력이 짙어지고 있었으나, 카메하메하 1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습니다. 무장한 러시아인들과 함부로 무력충돌을 벌였다가 들이닥칠 위험을 우려해서 잠자코 있었던 것일까요?


순조롭게 진행되던 하와이 제도의 러시아 식민지 사업은 1817년 6월, 전혀 뜻밖의 위기에 부딪쳤습니다. 러시아인들에게 협조적이었던 카우무알리가 돌연 태도를 바꿔 스카페르에게 “당신이 데리고 온 모든 러시아 군대와 함께 당장 카우아이 섬과 오아후 섬에서 떠나라.”며 요구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믿었던 동맹자의 돌변에 당혹한 스카페르는 자신이 러시아-미국 회사에 요청하여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득했으나, 카우무알리는 더 이상 스카페르와 러시아 군대에 식량을 주지 않을 테니 빨리 떠나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군사들이 주둔했던 요새와 그 안에 보관한 각종 무기와 화약들은 모두 남겨두고 가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카우무알리의 압박에 스카페르는 러시아군 장교들과 의논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낮선 땅에서 고립된 그들은 현지의 유력자로부터 협조를 받지 않으면, 제대로 활동할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카우무알리가 식량 공급을 끊는다면 그들은 꼼짝없이 섬에 갇혀 굶어죽고 말 운명이었습니다. 군대를 동원해 카우무알리와 카우아이 섬 주민들과 싸운다고 해도 그들의 수가 워낙 적어 승산도 별로 없었고, 게다가 그 틈을 타서 카메하메하 1세가 공격해 온다면 전멸당할 위험도 있었습니다. 


고심 끝에 스카페르는 카우무알리의 요구를 받아들여 카우아이 섬과 오아후 섬에서 모든 러시아 군대를 일제히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817년 6월 29일, 섬에서 떠난 러시아 군대는 그들이 힘들게 지었던 요새에 군수 물자들을 남겼습니다. 이것들은 고스란히 카우무알리가 차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군사들은 애써 남 좋은 일만 시켜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카우무알리는 처음부터 러시아에 진심으로 복종할 생각은 없었고, 그저 러시아인들을 적당히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러시아인들이 남기고 간 요새와 무기들을 힘 안 들이고 몽땅 손에 넣어 자신의 군사력을 더욱 키웠으니 말입니다.


알래스카의 시트카로 돌아간 스카페르는 러시아-미국 회사로부터 격렬한 추궁을 받았습니다. 그가 무모하게 일으킨 카우아이 섬의 사업에 러시아-미국 회사의 공금 23만 루블이 소모되었으니,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스카페르는 “내가 처음 카우무알리의 제안을 가져 왔을 때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고 따르다가, 나쁜 결과가 나오니까 이제 와서 나한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우느냐?”라며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를 만나 일의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러시아 제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카우아이 섬과 하와이 제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1817년 8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스카페르는 러시아 정부를 찾아가 자신이 가져온 보고서를 전달했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멀리 하와이 제도의 카우아이 섬에 러시아 군사들이 주둔했던 요새가 세워졌는데, 현재 그 요새는 토착민 부족장인 카우무알리가 차지했으며, 그로 인해 러시아 제국의 위신이 심각하게 손상 받았다, 하와이 제도는 여러 부족들이 난립한 상태라 수만 명 가량의 러시아 정규군이 공격한다면 쉽게 정복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서둘러 러시아와 유럽 각국의 신문들에 기사로 실렸고, 러시아 제국이 태평양 한복판에까지 식민지를 확장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면서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스카페르는 황제가 자신의 보고서에 대한 찬성과 반대 여부를 어서 말하기를 바랬지만, 그 날은 좀처럼 빨리 오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당시 나폴레옹 전쟁의 뒤처리를 하느라 영국과 오스트리아 등 다른 유럽 나라들과의 외교 관계 문제가 가장 급선무였고, 멀리 떨어진 하와이에까지 뜬금없이 식민지를 건설하자는 스카페르의 제안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스카페르의 보고서를 받은 지 7개월 후인 1818년 3월 8일, 알렉산드르 1세는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스카페르에게 있어서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카우아이 섬을 비롯하여 하와이 제도 전체에 러시아 제국의 정규군을 대규모로 투입하여 식민지로 삼자는 스카페르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우선 하와이 제도는 러시아 본국으로부터 너무나 거리가 멀며, 그곳까지 많은 군대와 물자를 보내려면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드는데, 굳이 그런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하와이 제도를 식민지로 삼아야할 필요성이 없다. 또한 하와이 제도는 높은 가격의 산물이 생산되는 곳이 아니라서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든다고 해도 운영하고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얻을 수 있는 수익보다 많아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들을 감안하여 하와이 제도는 러시아의 식민지로 만들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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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해 승리를 거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초상화. 그는 하와이 제도의 식민지 문제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구상이 무시당한 것에 대해 분노한 스카페르는 러시아-미국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는 브라질 공주인 마리아 레오폴디나(Maria Leopoldina: 1797~1826년)의 주치의로 일하다가 공주가 죽자, 브라질에 정착한 다른 독일인 이민자들을 도우며 살다가 1836년에 사망했습니다.


알렉산드르 1세가 스카페르의 제안을 거부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수에즈나 파나마 운하도 개통되지 않아서, 러시아 본토에서 하와이로 가려면 남미 대륙의 남쪽 끝을 돌거나 아니면 더 멀리 아프리카 남쪽 끝인 희망봉을 돌아서 가야 했는데, 그러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한 1만 ㎞ 이상의 거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군대, 그리고 그들이 필요한 식량과 무기와 각종 군수 물자들까지 함께 보내려면 많은 돈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하와이를 정복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정복하는데 들어간 비용을 채울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와이는 황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이 쏟아지는 보물 창고도 아니었고, 그런 점에서 알렉산드르 1세에게 하와이 정복의 제안은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하와이는 작은 섬이라서 많은 군대를 먹여 살릴 식량 생산성이 부족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하와이에 많은 군대를 보내면 보낼수록 그들에게 필요한 보급이 더욱 늘어나고, 하와이에 별도로 공급할 보급선에도 부담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면, 알렉산드르 1세의 결정은 러시아가 태평양 깊숙이 세력을 뻗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차버린 꼴이었습니다. 만약 알렉산드르 1세가 스카펠의 제안을 받아들여 하와이 제도에 수만 명 정도의 러시아 군대를 보냈다면, 하와이 제도는 꼼짝없이 러시아에 정복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당시 하와이 제도는 카메하메하와 경쟁하던 여러 부족장들이 난립해 있었고, 그 중에는 카메하메하를 견제하려던 카우무알리처럼 러시아 같은 외부의 도움을 빌리려던 자들도 있었을 테니, 러시아의 정복에 내응하는 세력들도 나타났겠지요. 아울러 하와이 제도에서 러시아 제국의 대규모 정규군과 싸워 이길 만큼의 전투력이나 많은 수를 갖춘 병력을 편성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게다가 1818년이면 특별히 러시아의 하와이 점령을 방해하려는 외부의 간섭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북미 대륙의 미국은 지금처럼 초강대국이 아니라 갓 독립한 신생국가인데다 북쪽의 캐나다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을 견제하느라, 멀리 떨어진 하와이에는 그다지 손을 뻗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영국도 중국과의 무역을 성사시키기 위해 한창 바빴던 터라 하와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와이 제도가 러시아에 정복당했다면, 주변의 남태평양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거점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는 오토 폰 코체부에에게 세계 일주 항해의 임무를 맡기고 그 와중에 이스터섬을 방문토록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하와이 제도에서 시작한 러시아의 남태평양 정복은 이스터섬과 그 인근 지역, 파푸아뉴기니까지도 가능하지 않았을지요?


그러나 이 모든 가능성은 알렉산드르 1세의 결정으로 인해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시베리아만 해도 충분히 거대한 영토인데, 구태여 1만 ㎞나 멀리 떨어진 바다의 작은 섬 몇 개를 차지하겠다고 많은 돈과 물자를 소모하며 전쟁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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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아이 섬에 표기된 러시아 요새 엘리자베스의 알림판. 오늘날 하와이를 방문하는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한 때나마 러시아가 하와이 제도에 손을 뻗쳤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흔적입니다.)
출처 <전장을 지배한 무기전 전세를 뒤바꾼 보급전>/ 도현신 지음/ 시대의창/ 292~312쪽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897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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