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땀…. 벌써 10년 째,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요일 아침…. 도대체 이 꿈은 뭐지? 프로이드에게서처럼 그냥 잠재된 욕구의 표출인가? 아니면…. 누군가 내게 무엇을 알리려는 것일까?’ 오늘도 “일(日)”은 침대를 다 적신 땀 냄새를 맡으며 곰팡이가 방 귀퉁이마다 검게 핀 반 지하 쪽방, 그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꿈을 꾸기 시작한 지 꼭 10년이 되었다. 이 꿈은 일(日)이 중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를 따라 나서기 시작한 시골교회에서 일(日)은 웅(雄)을 만났다.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 열광적으로 추종하던 웅(雄)은 일(日)의 성경교사였다. 그는 말세의 순교자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어두침침한 지하 기도실을 눈물과 땀으로 적시던 웅(雄)이 보여준 종말의 세계는 일(日)과 그의 친구들에게는 너무나 놀랍고 새로운 것이었다. 유럽연합의 비밀스러운 계획들과 바코드에 숨겨진 666의 표시, 모든 종교를 흡수하려는 음탕한 가톨릭교회의 음모, 매일 종말의 꿈을 꾸고 있는 어린 예언자들에 관한 이야기들, 천국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종말의 비밀을 말한다는 어떤 박사의 이야기,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근과 전쟁의 소식들, 이러한 종말의 징후들이 한데 어우러져 흡사,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세계의 역사를 슬퍼하며 애가(哀歌)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1999년의 종말로부터 7년간의 대 환란을 거꾸로 계산한 결과 이제 신도들이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휴거는 1992년 10월로 예견되고 있었다. 일(日)과 친구들은 중학시절의 거의 모든 시간들을 땀 냄새 나는 지하 기도실에서 보냈다. 일(日)은 북한으로 가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북한으로 가서 마지막 전도자가 되어야한다는 일념으로 기도했었다. 처절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의 끝으로 가는 전도자가 되리라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어린 일(日)에게 북한으로 가는 길은 바늘의 귀만큼이나 좁았다. 그저 지하기도실의 땀 냄새만 맡다가 1992년 10월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휴거를 기다리는 일(日)에게 그 해 시월은 너무나 길었다. 그리고 절망적이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의 유일한 신앙의 버팀목이었던 웅(雄)은 교회에서 쫓겨나듯 아랫녘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어느 토요일, 웅(雄)으로부터 한 장의 청첩장이 날아왔다. 돌아오는 봄에 결혼한다는…. 순교자가 되겠다던 눈물과 땀의 종말론자가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었다. 종말에 대한 기대는 완벽하게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밤부터 일(日)은 그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똑같은 꿈을 꾸었다. 아니, 매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거의 모든 주말을 같은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제는 교회도 다니지 않는다. 대학 초년생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믿음도 접었다. 아니,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 믿음이라는 이름의 날개는 그 절망적이었던 시월에 이미 꺾여 있었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왜 이 꿈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꿈은 어떤 슬픈 눈의 여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미 그녀는 온 몸이 찢길 대로 찢겨져있다. 상체와 하체가 완전히 비틀려 상체는 하늘을 향해 있고, 하체는 땅을 향해 엎어져있다. 그녀는 피범벅이 되어 죽음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사실 표정은 정확하지 않았다. 이미 너무나 상한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한 없이 일(日)을 향해 손을 뻗으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일(日)의 생명은 그의 몸 안에 없었다. 마치 유체이탈을 하듯 몇 미터 위에서 그녀와 껍데기뿐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주변은 마치 폭탄을 맞은 듯 황폐해있고, 생물체인지 기계인지도 알 수 없는 존재들이 그들 주위를 가득 둘러싸고 있다. 일(日)의 육체를 향해 손을 뻗던 그녀는 이윽고 눈을 들어 일(日)의 생명이 머물고 있는 하늘을 응시한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일(日)의 생명과 눈을 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조금씩 그녀의 눈에서 빛이 사라진다. 일(日)도 눈이 부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낀다.
찢겨진 몸과 분리된 생명은 아마도 중학시절 이후 분리되고 좌절된 자신의 삶과 이상일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인가? 아마도 그녀는 일(日)안에 살고 있는 다른 하나의 일(日)인지도 모른다. 일(日)이 걸어갈 수 있는 지금과 또 다른 하나의 운명…. 일(日)은 스스로 그렇게 결론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꿈이 계속 될수록 점점 더 그 결론은 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깊어져갔다. 확실히 이 꿈은 다른 꿈들과는 달랐다. 너무나 사실처럼 느껴졌고, 심지어는 그 장면의 색과 스치는 모래바람소리까지 생생했다. 기계인지 생물인지 모를 존재들의 역겨운 소리도 너무나 생생하게 들렸다. 그리고 왜인지 그녀는 일(日)의 가까이에 살고 있을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따금 그녀와 비슷한 체구의 여성을 만나면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녀를 만나 눈을 마주치면 분명히 그녀를 알아볼 수 있다는 확신에서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