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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영혼 도서관
게시물ID : panic_900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Wit-Dori
추천 : 27
조회수 : 2972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6/08/14 09: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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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도서관

『천장이 보이지 않는 첨탑과, 그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책들.
나선형의 도서관은, 마치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이무기처럼, 그 모습이 웅장하다.
용의 비늘처럼 보이는 형형색색의 책들은, 의식을 뚫고 들어와 이성을 우아하게 현혹시키는 듯하다.
 
각각의 비늘 즉, 책에는 사람들의 영혼이 깃들어져 있다.
 
책의 제목에는 하나같이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고, 그 안에는 그 사람의 전 인생이 담겨져 있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사람들, 현재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사람들의 이름을 담은 책들이 시간의 카테고리에 따라 층별로 보관되어져 있었다.

책은 주인의 수명과 업적에 따라, 그 두께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자는 4000 페이지 가량의 두께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10 페이지도 안되었다.』
 
 


 
이곳이 어느곳인지는 모르지만, 신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다.
 
다만 신의 선물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신께선 내 이름을 담은 책만을 이 무한한 도서관에서 없애버리신 것이다.
 
덕분에 난 이 능력을 가지고도, 내 영혼의 미래를 볼 수 없다.
 
그래도 뭐 상관없다.
애초에 난 내 인생의 마지막 따위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오늘도 지하철은 만석이다.
 
그나마 집 근처에 있는 역이 노선의 끝이었기 때문에, 난 항상 편하게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아침과 저녁의 지하철은 사람들의 인간성을 빨아먹는 뱀과 같다.
노인을 무시하고 노약자석에 앉는 청년이나, 자리가 났다고 저 멀리서 사람들을 밀며 달려오는 노인이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부럼움 섞인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자나.
그들은 모두 지하철로부터 인간성을 빼앗긴, 이기심이라는 껍질만 남은 인간이다.
 
난 그런 그들의 모습이 역겨워,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잤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이어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 귀를 간지럽혔다.
 

[ 이번 역은 강남, 강남역입니다. ]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간다.
그 빽빽한 인간의 숲이 흐르는 물이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자면, 경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한데, 그들중에 한명이 날 빤히 쳐다보더니, 내 눈치를 살피며 인파 속에 묻혀 사라져 간다.
 
(뭐...이젠 별 감흥도 없네...)
 
언제부턴가 지하철에서 '잠'만 자고 일어나면,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젠 익숙해져서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잠꼬대를 심하게 하나보네)
 
그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머리도 안 아프고 더 편하다.
 
 
 
 
 
내가 '영혼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그 능력을 갖게 된 이후로부터, 내게 생긴 한 가지 변화가 있다.
 
나의 꿈.
 
영혼 도서관은 일종의 자각몽 같은 것이다.
즉, 꿈 속 세계에서만 방문할 수 있는 장소란 뜻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부터 내 모든 다른 꿈들이 사라져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격일제로 꿈을 꾸는데 하루는 영혼 도서관 꿈을 꾸고, 다음날은 아무런 꿈도 꾸지 않으며, 이 2일의 주기가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모든 꿈을 잃는다는 것이 약간은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 능력을 위한 대가라고 보면 그렇게 큰 손실도 아니다.
이득이 훨씬 더 큰, 남는 거래니까.
 
 

 
 
"주 과장, 이것 좀 부탁해. 그리고 오늘 회식이 있긴한데, 힘들면 집에 가서 쉬어도 돼."
 
"예, 알겠습니다 김 부장님."
 
김 부장,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형설지공으로 공부해, 지금은 대기업의 부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는, 자수성가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성실한 성격에 사람들에게도 항상 천사 같은 그는, 정말이지 완벽한 사람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다.
그의 책은 약 700페이지 가량이고, 지금은 680페이지쯤의 인생을 살고 있다.
한 마디로, 그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은 참으로 불공평하시구나...)
 
그의 최후도 그의 인생과 어울리지 않게 참으로 잔인하다.
미친 살인마에게 납치돼 사지가 절단되어 죽는다니.
 
하지만, 그에게 그 잔인한 운명을 말해줄 순 없다.
 
영혼 도서관에 존재하는 유일한 '규칙'이 '결코 미래를 바꾸어선 안됀다'이기 때문이다.
 
 
 
"부장님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어, 그래 그럼 다음주에 봐~"
 
회사라는 공동체에서 직책이 더 높은 사람보다 빠르게 퇴근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의 이 견고한 인맥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난 인간관계가 좋다. 모두 다 영혼 도서관 덕분이다.
대화를 할 때마다 내가 이끌어 나가고, 나의 유머에 모든 직원들의 웃음이 끊기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시계를 바라봤다.
 
7시 30분.
 
이어서 옆에 있는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에 비친 또 다른 나의 모습은 산 송장이 따로 없었다.
피부는 사막처럼 건조하고,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쳐져 있으며, 눈에선 미세한 붉은 빛이 감돈다.
 
(하...또 이러네...)
 
신의 선물에 대한 또 다른 대가가 있었다.
 
몸의 피로.
 
분명 정신은 맑지만, 몸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 이질적인 느낌을 아는가?
이 능력을 갖고 난 뒤로 난 항상 그런 느낌이다.
 
몸과 정신 사이의 괴리감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피곤한 것이다.
 
 
허나, 영혼 도서관을 통해 예지의 신이 되는 그 황홀함은 이 피곤함을 뛰어넘는다.

(그래도 내일부터 주말이니까 그게 그나마 다행이네)

난 옷도 벗지 않은 채, 하얀 침대에 몸을 날렸다.

이윽고 포근함, 익숙함, 피로감이 섞인 오묘한 감각이 전신을 자극했다.
그 편안한 느낌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이 저절로 감겨오며, 익숙한 심연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 심연은 오래가지 못 했다.
 
 
 
갑자기 밝아져 오는 하얀 빛에 난 눈을 떴다.
 
10시 30분.
 
"하아..."
 
힌숨이 절로 나왔다. 눈을 감았다 뜨니까 바로 아침이라니.
박탈감이 느껴졌다.
 
다시 자려고 했지만, 정신이 너무 맑아 포기했다.
 
몸은 여전히 무겁다.
 
난  바로 화장실로 가 샤워기를 틀었다.
따뜻한 물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 몸을 타고 흘러갔다.
마치 양수에 다시 들어온 듯한 그 느낌에, 방금 전까지의 스트레스가 풀리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은 카페나 가볼까?)
 
샤워를 끝마치고 머리를 털면서 문득 떠오른 그 생각에, 난 오늘의 계획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오늘은 아무런 계획도 없네)

 

헤어 드라이기의 은은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따뜻하게 감싸안았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니, 색채로운 가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와~외출하기 딱 좋은 날씨네."

머리 손질을 끝마친 뒤, 난 옷장에 가 오늘의 완벽한 패션을 머릿속에 구상하기 시작했다. 

 
 
 
 
가을 낮의 선선한 바람이 몸을 스쳐 지나간다.

 
"아~역시 가을이 최고라니까~"
 
난 적당한 가게를 찾아 카페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런 나의 눈에 한 간판이 들어왔다.
 
"북&커피..? 책이라도 읽는 곳인가?"
 
난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그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알바생의 힘찬 목소리가 카페 내에 울려 퍼졌다.
 
손님은 나까지 포함해 총 6명이었다.

난 바로 카운터에 가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을 했다.
 
"아이스 카푸치노 하나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어서, 난 자리에 앉아 주위의 테이블을 둘러봤다. 
남자 4명이 각각의 테이블에 앉아, 어딘가를 멍하게 응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난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내 옆 테이블에서 어떤 여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난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허억...맙소사...)
 
포니테일 머리에 갈색이 섞인 눈동자, 그리고 면사포만큼이나 새하얀 그 피부.
비너스가 질투를 넘어 증오를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 천사의 용안에 압도되어 하얀 원피스는 제 색을 잃어갔지만, 그녀의 얼굴은 더 밝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모든 남자들의 시선에 고정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책에 집중해 시선을 못 느끼는 건지, 아니면 남자들의 부담스런 시선을 받는 것이 익숙한 건지,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책을 읽고 있었다.
 


순간,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망설이듯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침내 그녀 앞에 선, 그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번...호 좀 주실 수 있나요..?"
 
"싫어요."
 
잔인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구애자의 자존심을 깨부셨다.
 
이윽고 그는 얼굴이 새빨개져 그대로 카페를 뛰쳐나갔다.

(남자가 그럴 때는 센스 있게 행동해야지...)
 
여자에 대한 접근법도 모르는, 그가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난 다시 그녀를 바라보고, 얕은 생각에 잠기었다.
그녀의 도도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고,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은 우아하다 못 해 고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 테이블에 앉아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도 다른 것들은 신경쓰지 않고 그녀의 얼굴만을 쳐다봤다.
 
(정말 미의 여신 그 자체네...)
 
순간, 그녀의 얼굴에 현혹되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뻔했다.
 
난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을 바라봤다.
 
아담한 사이즈에, 제목만 있는 주황색의 책.
 
다행히 평소에 독서를 좋아하던 나에겐, 이 책이 무엇인지 알아 맞히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안녕하세요, '뤼크레스 넴로드'씨. 전 '이지도르 카첸버그'라 합니다. 읽고 계신 '뇌'는 재밌으신가요?"
 
그녀가 눈만 올려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책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SF를 좋아하시면, 아서 클라크의 소설들도 추천 드립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나 '도시와 별'은 읽고 계신 책과는 색다른 느낌을 주거든요."   



"그렇긴 하죠."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 만큼이나 달콤한 목소리다.

"아, 그럼 그 두 작품도 읽어보신 건가요?"
 
"아뇨, 라마와의 랑데부는 아직 못 읽어봤어요."

"아, 그렇군요. 그럼 꼭 한 번 읽어보세요. SF매니아라면 놓칠 수 없는 책이거든요."
 
"네, 고마워요."
 
그녀의 그 한 마디를 끝으로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난 이 어색한 적막을 깨기 위해, 머리를 빠르게 굴려댔다.

"저..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뭐..? 지금 상황에서 이름을 묻는다고? 젠장, 내가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틀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름을 묻는 멍청이가 어디있단 말인가?
 
"이현이요"
 
(음..? 이름을 알려줬다고?)
 
내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결국 난 그녀에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아...예, 그럼 기회가 되면 또 보죠."
 
난 주문한 카푸치노도 잊은 채, 그렇게 카페를 나왔다.
 
 
 
욕실에서 나와 머리를 털며 시계를 바라봤다.
 
10시 30분.
 
내가 오늘 일어난 시간과 일치한다.
다만 지금이 밤의 10시 30분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현이라...괜찮은 이름이네."
 
비록 오늘 처음 본 그녀였지만, 그 얼굴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두 볼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럼 오늘은 그녀의 책을 읽도록 할까?"
 
설레는 기대감에, 난 서둘러 옷을 입고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하얀 침대가 어김없이 날 맞이한다.
난 바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이 점차 희미해지며 눈 앞에 익숙한 공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천장이 보이지 않는 첨탑과, 그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들.』

 책들이 저마다의 색으로 다채로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보였으며, 도서관 특유의 그 오래된 나무 냄새가 코를 자극해왔다.
 
 

"좋았어! 그럼 현재의 '이현'을 찾아볼까?"
 
난 위를 향해 점프했다.
이곳에서 난 날아다닐 수 있다.
내가 첨탑의 높은 곳에 있는 책들을, 그 어떤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혁재..이혁찬...이..현!!!"
 
찾았다, 그녀의 영혼을.
그녀의 우아함에 걸맞게 책도 순수한 흰색을 띠었으며, 그 두께 또한 남달랐다. 
 
"와~1200 페이지나 되네!"
 
사실 페이지가 문제는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읽고 싶은 책을 읽을 때, 페이지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
다만,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이다.
잠을 자는 10시간 동안 1200 페이지의 책을 읽으려면, 1시간동안 120 페이지, 1분에 2 페이지를 읽어야 한다.

그 시간의 추격을 고려하며, 난 빠르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인생은 모범생의 표본 그 자체였다.
 
중산층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여러 교육을 받고 명문대를 졸업.
이후 천재적인 두뇌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국내 교수를 준비하고 있는 29살의 그녀.

우아한 미모 속에 숨어있는, 그 지적인 면은 완벽한 내 스타일이었다.
 
난 그녀가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찾아, 책 속의 문장들을 탐험했다.
 
 
[ 사는 동안 친구가 없었으며, 아버지와 함께 도서관을 다니곤 했다. ]
 

이유를 찾았다. 그녀에겐 책이 곧 친구였다.
 
즉, 친구가 없는 공허함을 책으로 메꾸려 했던 것이다.
그녀가 책을 읽는 모습을 다시 상상하니, 이번엔 약간의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 슬픈 감정을 떨치며, 난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얼마나 읽었을까.
순간, 나의 두 눈동자가 어느 한 문장에서 멈춰섰다.

그것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그녀의 영혼의 마지막...
 
 
[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괴한에게 강간을 당하고 살해된다. ]
 

"뭐..뭐라고? 안돼..."
 
이럴 수가 없다. 시간 상으로 보면 날 만난 바로 다음날이다.
내일 그녀가 죽는다. 그것도 아주 수치스럽고, 비참한 방식으로.
 
난 떨리는 손으로 책을 덮었다.
흔들리는 동공 때문에, 책이 여러개의 잔상과 겹쳐져 보였다.
이어서 머리가 심하게 아파오더니, 시야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허억..허억.."
 
난 본능적으로 시계를 바라봤다.
 
8시 15분.
 
난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뭐..뭐야??!!!"
 
내 방의 책장은 난잡하게 어지럽혀져 있었으며, 분명히 침대 위에 있어야 할 이불은 방문 앞에 너부러져 있었다.
 
잠깐 동안 도둑의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꿈의 내용이 떠올랐다.

난 바로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사방으로 튀어대는 물방울들의 집합만큼이나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어왔다.
 
 
 
 
 
거리의 간판들을 수색하는 나의 두 눈에 '북&커피'의 이니셜이 들어왔다.
난 바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책의 내용을 보면 분명 오늘도 올 거야)
 
힘차게 연 문 뒤로,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 색의 찬란한 생머리는, 뒷모습만으로도 남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난 그녀의 테이블에 가 자리에 앉았다.
 
"저..안녕하세요. 어제 인사했던 사람입니다."
 
그녀가 이번엔 얼굴 전체를 들어 날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엔 알 수 없는 미소 같은 것이 담겨져 있었다.
 
"아~네, 안 그래도 지금 '라마와의 랑데부' 읽고 있는데...재밌네요. 노턴 사령관 님."
 
뒤에 이어지는 눈웃음에 심장이 멎는 듯했다.

외모, 지력, 센스 그 어느 것도 꿇리지 않는 그녀는 순수한 아름다움 그 자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비너스가 내게 미소를 짓고 있다.
 
"아, 그렇군요. 역시 취향저격 책이 맞았네요."
 
"과학적 묘사가 아주 좋더군요. 그래서 재밌고요. 아 그런데, 제가 지금 중앙 도서관에 가려고 하는데,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가실래요?" 
 
도서관이라는 그 단어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지만, 난 이성적 사고를 최대한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 나의 머릿속에 결론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 절대로 혼자 보내면 안됀다. ]


더이상 생각할 것도, 선택할 다른 여지도 없었다.

난 승낙의 의미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게 카페를 나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하아..어떡하지...)
 
내 표정은 밝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머리는 그녀를 지키기 위한 모든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생각하느라 과부화가 걸릴 지경이었다.
 
이런 심란한 상황에서, 그녀가 내게 말을 해오기 시작했다.

 
"책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어요."
 

대화를 위한 생각과, 독립된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서 난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책 좋아하는 사람치고 성품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 찾기는 힘들죠."

 
내가 한 말이 이상하진 않은지 아니,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 기억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죠. 아 참,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못 물어봤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내...내 이름..? 잠깐만 이것 먼저 생각해보고)


"주연이라고 합니다. 남자 이름 치고는 너무 여성스럽죠? 하하~"

(그녀에게 그 운명을 말해야 되려나...)
 

"아니에요~그런데 우리 공통점이 하나 더 있네요? 이름이 두 글자인 거."


(역시 무리...잠깐만 방금 뭐라고 했지? 나랑 그녀의 공통점..? 뭐가 있지..뭐가있지..아 그래! 이름!)


"하하 그러게요. 이름 두 글자인 사람들이 책을 좋아하나?"
 

(그래 이따가 직접 말하고, 그녀를 지키는 편이 더 낫겠어)

 
난 다른 사고를 멈추고, 그녀와의 상호작용에 집중했다.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이어서 은은한 향수 내음이 코를 자극해왔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더 선명히 들려왔다.
 
"저기 보이네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중앙 도서관이 보였다.
난 재차 마음을 다잡으며, 그녀의 옆을 지켜주듯 걸어갔다.
 
 
 
 
 
그녀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 책도 재밌어요. 이거 한 번 읽어보세요."
 
작고 고운 그녀의 손엔 '타나토노트'가 쥐어져 있었다.
 
(영계 탐사단의 모험을 담은 책이라...)
 
'죽음'이라는 속성과 그녀의 '운명'이 묘하게 일치했다.
 
"저승 탐험 소설이라..재밌겠네요!"
 
난 일단 지금의 이 순간 순간들을 즐기고, 마지막에 운명을 고백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2인용의 작은 책상에서, 서로의 책을 펼쳤다.

그녀의 손엔 '유년기의 끝'이 쥐어져 있었고, 내 손엔 '타나토노트'가 담겨져 있었다. 
 
사실상 독서는 불가능했다.
1페이지를 읽고 5분간 그녀의 옆모습을 쳐다보는 반복된 행동에 의해, 이미 책의 내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책의 세계에 푹 빠졌는지, 나의 이 부담스런 시선을 느끼지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상한 버릇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무엇인가에 집중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움직이는 버릇.
물론 그녀의 영혼의 책에서 본 내용이다.
허나 그것을 실제로 보는 것은, 꽤나 다른 상쾌한 느낌을 준다.
 
그녀는 책을 읽느라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마저 내겐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귀에 걸쳐 머리를 넘긴 그 모습.
 
그 검은 머리에 감춰져 있던, 진주 같은 그녀의 볼.
 
본래의 흰색과 상기된 붉은색이 섞여있는 그것은, 내 눈을 순수하게 현혹시키고 있었다.

 
 
 
 
"주연씨? 주연씨, 왜 대답이 없어요?"
 
"아..네? 뭐라고 했어요 방금?"
 
"네, 날이 많이 어두워졌는데..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난 창밖을 바라봤다.
이미 날은 저물어, 도시의 빛이 하늘의 그것을 대신하고 있었다.
 
(젠장..졸았었나? 도대체 얼마나 잔거야...)
 
"이현씨, 혹시 제가 졸고 있었나요?"
 
나의 질문에 그녀가 대답했다.
 
"아뇨~ 아까부터 계속 책만 읽었잖아요. 벌써 2권까지 읽으셨는데."
 
(뭐..뭐라고? 난 3페이지만 기억이 나는데?)
 
난 일단 복잡한 생각은 보류하고,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 예 그런데 아까 뭐라...고 하셨죠?"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아 그렇군요. 그럼 안전하게 집까지 바래다 줄게요."
 
"제가 애도 아닌데 무슨~"
 
"아니에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제가 바래다 줄게요. 제가 걱정되서 그래요."
 
그녀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책을 원래 자리에 갖다 놓고, 그렇게 도서관을 나왔다.

 
 
 
 
그녀의 옆을 걸으면서,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난 분명 아무런 기억이 없는데, 그동안 책을 읽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은 상식선에선 일어날 수가 없다. 
순간, 영혼 도서관의 규칙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 결코 운명을 바꾸어선 안됀다. ]
 

(혹시 운명을 바꾸려 해서...)

그러자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그리고 난 현실의 그 잔인함 앞에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미루어 볼 때, 난 그녀를 지켜줄 수가 없다.
분명히, 중요한 순간에 또 의식을 잃고 말 것이다.
운명을 바꾸지 못 하도록 막는, 그 빌어먹을 신 때문에...

처음으로 나의 이 능력에 대한 증오감이 느껴졌다.
애초에 이 능력만 없었더라면 내 몸도 더 건강할 것이고, 자유로운 연애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의 최후를 알면서,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순간 나의 이 절망 섞인 증오감을 어루만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어요. 그럼 나중에 봐요."
 
난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아이처럼 너무나 순수했다.
그 때묻지 않은 맑고 사랑스런 영혼이, 이제 곧 처참히 짓밟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 제가 뭘...잘못했나요..?"
 
당황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난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흐흐..절대 집 밖에 나가지 마세요..흐흐..오늘은 제발..안전한 곳에서..흐흐흑..."
 
갑자기 눈 앞이 흐려지더니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주..주연씨 왜 그러세요? 괜..괜찮아요?"
 
걱정에 찬 그녀의 목소리마저 희미해지더니, 이윽고 빛과 소리가 사라진 그 익숙한 심연이 펼쳐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아침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난 내 방, 내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내 옆엔 아무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내 눈 앞에 서있던 그녀의 잔상이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늘이 출근하는 날이라는 것도 잊은 채, 난 비틀거리면 거실로 걸어갔다.
이어서 습관적으로 TV를 켰다. TV에선 한창 아침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 이틀전 용인시 수지구의 한 아파트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피해자는 홀로 살던 여성으로, 강간을 당한 뒤 살해당한 것으로 보이며 현재... ]
 
난 그저 공허한 눈빛으로 화면만 바라봤다.
 
익숙한 거리, 익숙한 아파트, 익숙한 이름...
그녀는 죽었다. 그 운명의 날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볼에서 차가운 액체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 마침내 목까지 도달했을 때도, 내 목에선 그 어떤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난 한동안 멍하니 앉아서, 그렇게 소리 없는 눈물만을 흘려댔다.



 
 
오늘은 화요일이고, 그녀랑 도서관에 있을 때는 일요일이었다.
즉, 난 이틀동안 잠을 잔 것이다. 아마도 운명을 거스르려는 행동에 따른 결과인 것으로 보였다.
 
"빌어먹을 도서관..,차라리 처음부터 몰랐더라면..."
 
이젠 이 능력이 너무나 역겹게 느껴졌다.
더 이상 책을 읽지도 못 할 것 같았다.
 
난 애써 마음을 추스리며 출근 준비를 했다.
 
집을 나서며 핸드폰을 켜보니,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수도 없이 남겨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말도 없이 하루를 출근하지 않았으니.
그래도 부장님은 이해해 주실 거다. 마음이 넓으신 분이니까. 
 
 
 
1시간의 출근 과정을 거쳐 회사에 도착했다.
 
익숙한 로비를 거쳐, 익숙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익숙한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날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살기 어린 욕설이었다.
 
"너 이 XX야, 내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아주 만만하게 보이냐?! 이 XXXX야! 니 마음대로 쳐살거면 회사는 왜 다니냐?!
전부터 이상한 개소리만 지껄이고 이 정신병자 같은 XX가, 아오 진짜 개 빡치네!
니 낙하산 타고 왔지? 나 죽을 듯이 공부해서 여기 간신히 들어왔어. 너 같이 낙하산으로 들어온 XX 뒷바라지 하려고 입사한게 아니라고 이 XXX야!!"

(음..? 뭔가 이상하다? 김 부장은 완전히 천사 같은 사람이 아닌가? 천사도 욕을 하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뇌의 사고가 멈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엔 감정이라는 속성만이 남게 되었다.
그것은 처음엔 당황감 이어서 공포, 그리고 마지막엔 증오감으로 서서히 변질되어 갔다.
 
결국엔 증오감과 그것에 얽힌 잡다한 감정들만이 내 몸을 통제하게 되었을 때, 아주 잠깐, 내가 의도하지 않은 어떤 생각들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 좋아하는 여자 하나 지키지 못 하는 내가 한심해... ]
[ 내 앞에 서있는 이 자가 미워... ]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내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이 자의 마지막 날이다.

그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구하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들지 않았다.
 
난 그대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의 의미없는 그 욕설은 문을 통과해서 들릴 정도로 우렁찼다.
 
복도를 지나자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그것은 여전히 17층에 머물러 있었다.
 
난 버튼을 눌러 문을 열고, 1층을 눌렀다.
불과 몇분전까지의 나와 똑같은 행동이었지만, 그 방향은 정반대였다.
 
심지어 감정의 방향까지도...
 
 
 
 
하루가 지났다.
누군가에게는 생에 잊지 못 할 최고의 날이었을, 어떤 사람에겐 수치스러운 최악의 날이었을, 그리고 그에겐 인생의 마지막이었을 그 하루.

난 어김없이 출근 준비를 했다.
 
어제와 똑같은 지하철을 타고, 똑같은 건물에 들어서, 똑같은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앞으로 보이는 그의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분주하게 통화를 해대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니, 그에게 문제가 생긴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일순간, 모든 직원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더니, 기분 나쁜 침묵이 그 뒤를 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생에 처음 느껴보는 대중들의 눈길이었지만,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그것은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던, 며칠전 그 여자의 시선이었다.
 
부러움 섞인 경멸의 시선.
 
그러나 난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빛에는 살기 또한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난 두려움에 뒷걸음치며,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현관 옆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인생이 너무나 처량하게 느껴졌다.
영혼 도서관이란 이 능력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이승을 떠나, 그녀의 옆으로 회귀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겐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런 내가 또 한심해서, 그녀가 보고 싶어서, 또다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지쳐, 더 이상 눈도 뜨기 힘든 상황이 되자, 심신의 피로가 날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거부할 수 없는 잠의 유혹에, 의식이 희미해지며, 난 천천히 꿈 속으로 떨어져만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모든 일의 원흉인 이 끔찍한 도서관에 도달했다.
 
마치 그동안의 일을 철저히 무시하듯, 도서관에는 그 어떤 작은 변화조차도 없었다.
그녀의 책도 김 부장의 책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난 그녀의 그 새하얀 책을 바라봤다.

순간, 책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스러워...꺼내줘...꺼내줘..."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영혼은 자신의 책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 책에 속박되어 있는, 그녀의 영혼을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편히 저세상으로 가게 해주고 싶었다.
 
난 그 하얀 책을 꺼내들었다.
내 손엔 어느샌가 어디서 온 지 모를, 작은 라이터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래, 아마도 이게 최선일거야..."

난 라이터의 불을 켰다.
흰색과, 그것에 대비되는 주황색의 빛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책을 향해 천천히 불을 옮기는 그 순간,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도서관 내에 울려 퍼졌다.

 
[ 안돼!!! ]
 
 
난 그 목소리에 놀라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왜냐하면...그 목소리는 다름아닌 내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그 수많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지만, 내 두뇌는 아무것도 산출해 낼 수 없었다.
 
난 그대로 책을 던지고 이 혼란의 장소를 벗어나려 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기가 두려웠다.
정말로 내게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이곳을 나갈 방법을 갈구하며 몸을 돌린 순간, 내 머리는 하얗게 멈춰버렸다.

이 도서관은 나의 꿈, 나만의 공간이다. 즉, 나이외의 그 어떤 사람의 출입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엔 두명의 사람이 서있다.
그들은 적대적인 눈빛을 하며 창을 내게 겨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말하고 있다.
 
[ @*%^&%^#^@&$(*#&{*@** ]
 
그들이 서서히 내게 다가온다.
그들이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시야가 흐릿해지며 머리가 아파온다.
 
"제발...제발 오지마..제발..."
 
갑자기 전방이 하얀 빛으로 밝아지더니, 그렇게 의식이 끊겨버렸다.
 
 
 
 
 
내 영혼이 다시 몸을 찾아왔을 때, 난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검은 방에 노란 불빛, 그리고 내 앞에 앉아있는 한 남자.
그의 손에는 서류 한뭉치가 쥐어져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자백해라. 이미 증거 다 나왔으니까 부인하면 할수록 너만 손해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자백이라니, 내가 뭘 잘못했나?)
 
"무...무슨 말씀이신지..?"
 
그가 격정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너 이XX 지금 사람 2명이나 죽여 놓고 어디서 시치미를 떼고 있어??!!!"
 
"예..?!"
 
"납치, 감금, 폭행, 강간, 2명 연쇄살인 및, 시체훼손...
이야~이거 최소 10년은 가겠네~ 회장 아들이란 놈이 아주 그냥 지 애비 명예를 제대로 말아먹었어."

(지금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아니, 애초에 여긴 어디지?)

"저..여기가 어딘..가요?"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어서 입을 열었다. 
 
"어디긴 어디야, 취조실이지."
 
"네...네??!!!"
 
"이 XX 진짜 정신에 문제가 있긴 하나보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정상이었는데..."

그가 자신의 손에 있던 서류를 내게 거칠게 던졌다.
난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 서류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뭐..뭐야, 이게 왜..."
 
그것은 김 부장과, 이현씨에 관한 서류였다. 난 정신을 가다듬으며, 그 서류들을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김 부장의 서류 내용은 그의 영혼의 책의 내용과 비슷했지만, 그녀의 서류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는 중산층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부모님이 없었다.
고아원에서 자라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작은 중소기업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갔던 그녀.

책을 좋아한다는 내용만 제외하면, 서류에 담겨진 그녀의 삶은, 내가 아는 그녀의 인생과는 완벽하게 달랐다.
 
"아...아니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건 사실이 아니야, 분명히 영혼 도서관에는..."
 
이윽고 마치 쐐기를 박듯, 그가 한 CCTV의 영상을 보여줬다. 그 영상엔 내 얼굴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영상의 참혹함에,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살인마'의 실루엣이 '나'의 모습과 겹쳐졌다는 사실에, 입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순간 머릿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한 나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이질적인 목소리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
 
[ 영혼의 작가는 결코 책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아. ]
[ 영혼 도서관의 사서는 단지 영혼의 책에 따라 움직일 뿐이야. ]
 

 
 
 
영혼의 도서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내 육신이 멈추어 사라지지 않는 한, 책은 계속해서 써질 것이고, 갈 곳 잃은 영혼들은 계속해서 그 안에 갇힐 것이다.

 
 
 
 
[ 4일 전 발생한 강간살인 사건과, 어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오늘 아침 검거되었습니다.
용의자는 시리우스 그룹 회장의 아들인 주연으로, 판정 결과, '다중인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전문가들은 그가 '영혼 도서관'이라 부르는 망상에 관련된, 3가지의 인격이 있음을 파악했고, 현재 그 인격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그의 처벌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번 사건을 통해 국내 최고 기업인, 시리우스 그룹이 입을 타격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어서 다음 소식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내 육신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난 잠을 잘 때마다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무의식의 시간동안, '내가 아닌 내'가 이 작은 몸둥아리의 주인이 된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관장하는, 그 도서관을 더 높게 쌓아올리기 위해.
 
 


 
-끝-
 
 
 
출처 그림 출처 http://photoholicat.tistory.com/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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