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제 1장 제 2장 제 3장 제 4장 제 5장 제 6장 제 7장 P1
선셋 쉬머는 캐이댄스가 싸준 책을 등에 매고 샤이닝 아머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캔틀롯 고등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었던 적이 있긴 했지만(그게 진짜로 일어난 일인지는 둘째 치고)그건 트와일라잇이 선셋과 다른 친구들을 이어준 거지 실제로 자력으로 새 친구를 사귄 적은 없었으므로,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해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긴장감이 멎질 않았다.
어쨌든 샤이닝 아머와 그 친구들을 만나는 건 새로운 우정을 쌓아가는 데에 좋은 첫 경험이 될 것이다. 사실 선셋이 '실제로' 사귄 진정한 친구 중 첫 번째는 캐이댄스였지만, 그건 캐이댄스가 선셋과의 관계를 메꿔보려고 혼자서 엄청난 노력을 다 한 거였으므로, 선셋의 자력으로 사귄 친구라고 하기엔 거리가 좀 멀었다.
"명심하자 선셋.. 인간 관련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 것, 성질 죽이고 있을 것, 물건 부수지 말 것."
비행 연습은 대실패였지만, 최소한 날개를 얌전히 접고 있는 방법 정도는 배울 수 있었다. 아참. 또 한 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생각났군..
"..비행하지 말 것."
이렇게 다짐하고 선셋은 이퀘스트리아에서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 위해 샤이닝 아머의 집 현관문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 갑자기 집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단정히 갈기 손질을 하고 넥타이를 맨 연청색의 유니콘 한 필이 집 안에서 나왔다.
"트와일라잇, 여보. 빨리 좀 나와 줄래요? 이러다가 늦겠어!"
잠깐.. 트와일라잇?
그리운 친구의 이름이 들려와 선셋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보라색 갈기를 단 그 알리콘의 모습이 선셋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선셋은 문 안에서 친구의 모습이 보이길 간절히 바랬다.
"금방 가니까 기다려요. 샤이닝 아빠."
하지만 선셋의 기대와는 반대로 문 안에서 나타난 건 웬 회색 털가죽에 보라색 별 큐티마크를 단 중년 암말이었다.
트와일라잇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아이 참. 고작 1분 늦은 거 가지고 닦달은.. 딸애가 시간표에서 조금만 틀어져도 안절부절하는게 이해가 간다니까. 다 자기 때문에 나쁜 습관이 들어서- 어머!"
두 유니콘의 시선이 일제히 선셋에게로 쏠렸다. 선셋은 날개를 활짝 펴지려는 걸 꾹 참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
예비 공주는 실망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인사를 건넸다.
"선셋 공주님!"
원래 트와일라잇과는 털색이 다른 중년 트와일라잇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곧 남편도 아내를 따라 목례를 했다.
선셋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발굽을 한사코 저으며 멈추라는 몸짓을 해 보였다.
"아. 아니, 아니, 하지 마세요! 전.. 그 정도로 대단한 포니는 아니라.."
"겸손도 하셔라. 호호!"
회색 트와일라잇이 선셋을 아래위로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어유, 훤칠도 하시네? 우리 아들 말이 맞았네요. 셀레스티아 공주님을 축소시켜놓은 것 같다고 하더니 딱 그대로네!"
나이트 라이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아.. 부디 제 아내의 무례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제 이름은 나이트 라이트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포니는 제 아내, 트와일라잇 벨벳입니다."
트와일라잇 벨벳.. 트와일라잇 벨벳... 선셋은 저 암말의 이름을 되새기며 과거 자신의 친구였었던 보라색 알리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트와일라잇의 왕관에 큐티 마크에 각인된 육망성.. 샤이닝 아머의 큐티마크에 그려진 육망성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 암말의 이름과 생김새를 살펴보면...
아냐... 이건 그냥 우연일거다. 왜냐면..
트와일라잇 스파클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포니였으니까.
이제 이 생각은 그만하자. 선셋은 미소를 지으며 답례 인사를 건넸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샤이닝 아머 안에 있나요?"
"네. 안에서 친구들이랑 기다리고 있어요." 트와일라잇 벨벳이 대답했다.
선셋은 다시 바짝 긴장했다. 내가 너무 늦은 건가? 서운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아-고..고마워요! 그럼.. 음.. 들어갈게요."
선셋은 빠르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하고 질풍처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샤이닝 아머? 샤이닝? 늦어서 미안! 혹시 벌써 시작한 거야?"
벌써 시작했으면 어쩌지? 늦게 온 사람이 게임에 끼어들 수도 있나? 다른 포니들은 어쩌고? 새로 끼어든 사람.. 아니 포니에게 양보하는 것도 짜증날 텐데.
하지만 거실은 텅텅 비어있었다. 이상하다? 혹시 내가 샤이닝 아머가 친구들이랑 같이 나갔다는 걸 잘못 들었나? 선셋이 의문에 잠겨 있을 때 방 저편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나왔다.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장신에, 반쯤 빗어 내린 갈기, 휘둥그레진 두 눈. 모든 게 다 귀여웠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전보다 더 잘생겨졌다는 것 뿐... 하긴 뒷골목에서 맞고있을때랑 멀쩡하게 준비를 마친 지금이랑 비교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긴 했지만 말이다.
"서..선셋. 와...왔구나..."
샤이닝 아머의 말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너무 주저하고 있는 것 같아, 선셋은 약간 당혹스러웠다.
"어... 미안 샤이닝. 캐이댄스가 내게 약속 시간을 말해주긴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그걸 잘못 들은 것 같네. 좀 많이 늦었지?"
샤이닝 아머는 방에 걸린 벽시계를 보고 다시 선셋을 바라보았다.
"아니. 오히려 일찍 오긴 했는데 그게... 하아..."
그러고서 샤이닝은 옆에 있던 빈 음료수 캔과 과자 봉지가 가득한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며 말했다.
"다른 얘들이 너보다 더 일찍 와서 음료수랑 과자만 작살나게 축내고 있지 뭐야? 친구라는 새끼들이 참. 도와주지는 못 할망정..."
안도감이 찾아와 선셋의 몸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확 풀렸다. 절로 미소가 지어질 지경이었다.
"다음번엔 성에 있는 내 방에서 하는 게 어때? 경비병들에게 정시가 아니면 다른 포니들이 못 들어오도록 부탁해놓을 수 있는데. 물론 음식이 떨어질 일도 없고."
잠깐.. 이거 내가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뻐기는 것처럼 들리려나? 어쩌지? 잘난 척 하는 건 다들 싫어할 텐데..
"우리 집 지하실보다는 훨씬 낫겠네."
샤이닝 아머는 긴장이 약간 풀린 듯, 희미하게 웃으면서 쓰레기봉투를 들고 선셋의 옆을 지나갔다.
"아. 그래도 네 몫의 건초 과자랑 칩들은 좀 남겨놨어. 냉장고에 음료수도 몇 캔 남아있고."
그렇게 샤이닝이 부엌으로 봉투를 가지고 들어가자 선셋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샤이닝 아머의 엉덩이 쪽으로 꽃혔-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말라고! 착하게 살기로 했잖아! 착한 포니는 다른 포니의 은밀한 부분을 훔쳐보면 안 돼는 거라고!
지금 날개를 억누르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선셋은 샤이닝의 엉덩이에서 시선을 거두고 샤이닝 아머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움직임은 뻣뻣했고 계속 힐끔힐끔 선셋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잠깐. 샤이닝. 설마 내가 불편해?"
선셋은 일부로 정색을 하고 물었다.
"으..." 샤이닝 아머는 냉장고에서 음료수 6개들이 1팩을 꺼내며 대답을 흐렸다.
불편하단 이야기로군.. 선셋은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 날개를 가만히 닫고 있는 법을 익힌 탓에 이제는 소파에서 튕겨 나올 걱정 없이 가뿐히 앉을 수 있었다.
"미안.."
선셋은 사과하고는 겁에 바짝 질려 있는 수말을 바라보았다.
"근데. 나도 약간 불안하다?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넌 공주님이잖아.. 불안할 게 뭐 있어? 그리고..음...멋있기도 하고..."
샤이닝 아머는 탁상 위에 음료수들을 놓으며 주섬주섬 말했다.
어떻게 이런 말로 위안거리를 삼으라는 건지.. 정말 차원을 막론하고 고추 달고 나오는 생명체들은 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하지만 공주의 진정한 삶이 어쩐지 굳이 지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선셋은 샤이닝 아머에게 미소를 한 번 지어준 뒤 아무것도 안 걸린 벽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겁에 아예 안 질린다는 말은 아니잖아."
샤이닝 아머는 한층 더 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선셋을 쳐다보았다.
"왜? 넌-"
"공주라고?"
선셋은 샤이닝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냐. 물론 난 나를 존경한답시고 우러러보는 포니들에게 내 의지완 상관없이 둘러싸일 운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전능한 존재는 아니잖아? 그리고.. 여태껏 살아오면서 단 둘이 만나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든 포니는 네가 처음이었어. 알아? 물론 캐이댄스와도 그러긴 하지만 걘 좀 뭐랄까..."
"무섭긴 하지? 네 연애생활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게.."
친구의 뒷담화였지만 너무 적절한 묘사인지라 선셋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그래. 물론 걔 의도는 좋다는 건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너무 열심히 해 줘서 솔직히 부담스럽다고?"
샤이닝 아머는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선셋이 않은 소파 옆 자리에 앉았다.
"나한테도 그랬거든. 오늘 와서 데이트에 지장 없도록 하라면서 나를 막 굴리더라."
선셋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걔가 너한테도 그랬어? 아니.. 안 봐도 눈에 선하네. 걔가 힘들게 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솔직히.."
샤이닝은 우물우물 말을 시작했다.
"그래도.. 꽤 괜찮더라. 물론 걔가 날 좀 힘들게 한 적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리도 지난 며칠을 내게 있어서 엄청 괜찮은 날이었어. 학교의 다른 유명한 포니들도 나를 좀 다르게 보는 것 같고, 벅도 너한테 한번 혼쭐이 난 이후로는 어... 선셋? 괜찮아?"
그 이름을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선셋의 표정은 구겨지고 있었다. 샤이닝 아머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느껴지자 선셋은 다시 한 번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
저렇게 귀여운 수말의 얼굴에 수심을 가득 채우는 건 죄악이겠지... 선셋이 만나왔던 모든 다른 남자들은 그저 선셋에게 공감하는 척 했을 뿐이었지만, 샤이닝 아머는 달랐다.
"우리끼리 잡담하느라 네 친구들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한 것 같군. 자. 이제 내려가실까요? 백마 기사님?"
격식을 갖춘 선셋의 그윽한 목소리에 샤이닝 아머의 볼은 붉게 물들었다. 선셋은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부끄러워 할수록 귀엽다니까.
"서...성..성기산데... 기사가 아니라..."
아까부터 알음알음 떠오르는 트와일라잇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선셋은 아까 샤이닝 아머가 나왔던 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샤이닝 아머도 음료수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캐이댄스의 계획? 엿이나 먹으라지.'
선셋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려가서 샤이닝의 친구들을 만나고, 게임 재밌게 하고.. 그리고 전에 같이 집으로 걸어갔을 때처럼 샤이닝이 재밌고 또 좋은 포니라는 걸 확인하면 단숨에 데리고 나가서 근사한 데에서 저녁이나 먹어야지. 오늘 계획은 이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선셋 쉬머 왔다. 다들 인사해." 샤이닝 아머가 선셋 앞에 나서서 친구들에게 선셋 쉬머를 소개했다.
의외였다. 평균적인 덕후 외모를 지닌 포니는 이 중에는 한 필 밖에 없었다. 소위 '안여멸'이라고 불리는 체형에 물방울무늬 나비넥타이를 한 어스 포니 한 필. 그 외에는 평균적인 외모의 페가수스와 유니콘 각각 한 필씩. 외모만 따지면 샤이닝만큼 귀엽지는 않고 그냥저냥 둘 다 평범하게 생겼다. 그 중 유니콘은 인간 세상에서 '무스탕'이라고 불리는 말 품종과 비슷한 털가죽 얼룩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선셋이 들어오자 방 안의 수말들의 표정엔 오만가지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여-여-여-여- 여자 포니이다!" 어스 포니가 부들부들 떨리는 발굽으로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더듬거렸다.
"꿈이야 생시야?!" 페가수스가 못 믿겠다는 듯 눈을 비비며 말했다.
골이 아파오는듯 얼룩 유니콘이 앞발굽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야 이 새끼들아. 샤이닝 아머가 캐이댄스 공주님에게 4일 동안 점심시간마다 끌려간 걸 뻔히 봐놓고는 이걸 또 신기해하고 자빠졌냐? 샤이닝이랑 공주님이랑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게 전 우주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된 지가 언젠데 왜 또 이 지랄이냐고."
나중에 캐이댄스에게 왜 따로 샤이닝 아머만 불러냈냐고 물어봐야겠군.. 이렇게 생각하며 선셋은 샤이닝의 친구 앞으로 나왔다.
"아직 공주는 아니니까 신경 쓸 것 없어. 마음 편하게 평소 하던 대로 해도 좋아."
소개는 끝났다. 선셋은 샤이닝의 친구 세 필의 이름을 뇌 속의 필수 기억 목록에 저장해놓았다.
롤플레잉의 오망성이 탁자 위에 올라왔다. 상당히 고급 수준의 복잡한 마법이 부여된 물건이라 선셋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 정도의 기교라면 상당히 고가일 텐데.. 샤이닝 아머의 부모님은 아들에게 취미용으로 이런걸 사 줄 정도로 금전적 여유가 넘치는 걸까? 아니라면...
선셋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얼룩 유니콘, 가퍼가 운을 땠다.
"좋아. 오늘은 시나리오 2개를 돌릴 거야. 하나는 오늘 처음 온 선셋 쉬머를 위한 일종의 짤막한 튜토리얼. 또 하나는 내가 평소에 짜오던 진정한 모험의 정수가 담긴 시나리오 후속편. 저.. 선셋. 캐릭터 시트는 작성해 왔지?"
자신을 향한 질문에 선셋은 등자 가방에서 본마가 직접 짜온 캐릭터 시트를 마력으로 꺼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자 여기. 근데 진짜 중간과정 패스하고 레벨 막 올려도 되는-"
"상관없어!"
선셋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퍼는 대답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선셋은 약간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설마 캐이댄스가 얘들한테 미리 압박을 넣은 건 아니겠지..
가퍼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할 것은 고전적인 공주 구출 시나리오야. 선셋 너만 탑에 갇힌 채로 시작하고, 나머지는 구출대 역할을 맡게 되는데, 이건 게임 입문자를 위한 연습용 시나리오거든. 부담가지지 말고 해도 돼. 어... 설명서에 따르면.. 오망성과 동봉된 마법 부여가 된 보석으로 캐릭터 시트를 스캔해야 플레이 가능하다니까 다들 스캔 시작해."
지하실에 모인 모든 포니는 설명서에 따라 캐릭터 시트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가지각색의 광선이 각기 스캔한 보석을 빠져나와 오망성에 연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이 선셋의 예민한 마력 감각을 자극했다. 오망성 자체에서 나온 마법이 아닌, 선셋의 머리 위.. 콕 집어 말하자면 1~2층 정도 높이 위에서 느껴지는 마법이었다.
"잠깐만. 너희들, 이것 말고 또 다른 주문-"
번쩍!
"걸었....나 참."
선셋은 검은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방에 갇혀있었다. 다들 선셋의 질문을 제대로 들었을 것 같진 않았다.
방에 있는 가구라고는 침대와 거울밖에는 없었다. 또한 방에는 초고층에서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전망대도 나 있었다. 활공을 하거나 혹은 그냥 뛰어내려도 안 다칠 텐데 어느 얼빠진 알리콘이 얌전히 이 방에 갇혀있는단 말인가. 무슨 장애물이라도 있는 건가?
"흔해빠지고 유치해빠진 공주 구출 이야기구만.. 정작 그 공주가 이런 성 따위는 눈 감고도 빠져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대놓고 무시하자는 건가.."
이렇게 투덜거리며 선셋은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선셋이 선셋을 따라 눈을 깜빡거렸다.
이상했다. 캐이댄스의 소개대로라면 지금 거울 속에 비치는 선셋의 모습은 원래 선셋의 모습과 달라야 정상이었다. 선셋은 셀레스티아의 외모를 본따 캐릭터의 외모를 만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선 버스트 공주'는 키는 180cm에 뿔까지 합치면 약 2미터. 잘 발달된 몸, 강력한 물리적 힘에 마법적 힘까지 겸비하며, 불타는 듯한 햇빛과도 같은 반짝이는 갈기를 달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거울 앞에 비친 모습은 선셋의 구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지금 선셋이 보고 있는 것은.. 그냥 선셋 쉬머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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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이댄스는 트와일라잇이 신기했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이렇게 수학에 관심이 있을 수 있는지... 그것뿐만 아니라 트와일라잇은 아예 복잡한 계산 과정을 일종의 놀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귀염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삼각법 책을 장난감처럼 들고 다니는 망아지가 또래 망아지들과 원만한 포니관계를 유지하는 건 좀 힘들어보였다.
갑자기 캐이댄스의 가방에서 알람이 울렸다. 즐거운 수학 계산 놀이 시간이 끝났다는 걸 의미했다.
"아! 이제 시작했네."
캐이댄스는 가방에서 발굽 정도 크기의 노란색 보석을 꺼내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트와일라잇. 오빠가 하는 게임에 못 끼어서 많이 섭섭했지? 지금 오빠랑 선셋 공주님이 뭐하고 있나 슬쩍 한번 봐 보자. 어때?"
"뭘 본다고요?" 트와일라잇은 책에 묻었던 얼굴을 들고 궁금한 표정을 하며 물었다.
"이름하야 선샤인 작전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말하며 캐이댄스는 바닥에 놓아둔 보석을 발굽으로 한번 건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막의 영상이 방 안에 전개되기 시작했고, 트와일라잇은 서서히 다가와 그 영상을 홀린 듯 쳐다보기 시작했다.
"세상에... 7등급 영상마법에다가 음성 기능까지 있어!"
트와일라잇의 감탄에 캐이댄스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잘 아는구나. 내가 아는 유니콘에게 부탁을 좀 해 놨거든? 롤플레잉용 오망성의 게임 세션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슬쩍 엿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말야. 샤이닝 아머는 뭘 하고 있는지 볼까?"
공주가 이름을 호명하자 사막에서 헤매고 있는 샤이닝 아머 쪽으로 영상이 잡혔다.
"잠깐만요.. 오빠 캐릭터 장비는 저게 아닐 텐데.. 분명 황금 기마갑옷에 의지 굴림 +2 보너스가 되어있는 장비일 텐데요? 그리고 다른 오빠들은 어디 있어요?"
트와일라잇은 귀엽게 얼굴을 찡그리며 질문을 던졌다. 캐이댄스는 여우같은 미소를 지으며 트와일라잇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유니콘에게 오망성을 내 의도에 맞게 살짝 조작해 달라고 부탁도 해 뒀지. 이제 네 오빠의 활약상을 천천히 감상해 볼까? 선셋 쉬머 공주님을 어떻게 구출하는지 말이야."
그 말이 나오자마자 영상은 호박색의 알리콘, 선셋 쉬머를 비추기 시작했다. 선셋은 캐이댄스가 미리 작업해놓은 시나리오가 적힌 쪽지를 읽고 있었다. 다 읽고 나서 선셋은 마력으로 종이를 구겨버린 후 활활 태워버렸다.
"얌전히 구출당하기만 기다리고 있으라니.. 맘에 안 들어서 진짜..!"
트와일라잇은 멍한 눈으로 선셋 쉬머를 살피고 있었다.
"우와.. 선셋 공주님이 저렇게 생기셨구나.."
"어라? 둘이 서로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었어?" 캐이댄스는 트와일라잇을 내려 보며 물었다.
"아뇨, 그냥 오빠 마중 나가다 멀리서 뒷모습만 봤는데요? 날도 어두웠구.."
하긴, 이게 더 말이 되는 건가? 트와일라잇이 선셋을 만나고 싶어 안달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영상 안의 선셋은 앞발굽을 흔들어 연기를 날리고 있었다. 지금 선셋을 만나고 싶어 몸이 달아있는 망아지가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다 끝나면 선셋 공주님 보러 가자. 알았지? 넌 샤이닝 아머의 여동생이니까 선셋도 분명 널 맘에 들어 할 거야."
또 한 번 샤이닝 아머 이야기가 나오자 화면은 샤이닝 아머에게로 전환되었다.
"어.. 저기.. 야! 아무도 없어? 가퍼! 8비트! 포인덱스터! 니들 어디있는거야!"
샤이닝 아머의 외침은 쓸쓸히 황무지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갑자기 모래바람이 불어와 샤이닝 아머는 눈을 가렸다. 모래바람이 끝나자 아까는 못 봤던 포니 하나가 샤이닝의 눈앞에 떡 하고 서 있었다. 늙은 유니콘 NPC였다. 청색의 로브와 모자를 쓴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고전 마법사 복장이었다.
"유저명 : 샤이닝 아머."
NPC는 마공(馬工)으로 합성한 목소리로 샤이닝 아머에게 말을 걸었다.
"오망성에 에러가 발생해서 주문이 정상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자분의 혹시 있을 심각한 정신 충격을 방지하기 위해 부디 뒤의 비상구로 나가주시길 바랍니다. 오망성은 10분 뒤 리셋 됩니다. 그 제한시간동안 남아있을 경우 심각한 정신 손상을 유발할 수도 있사오니 주의 바랍니다."
트와일라잇이 바짝 겁을 먹은 표정을 짓자, 캐이댄스는 트와일라잇의 옆에 기대 트와일라잇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 마. 언니가 일부로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NPC가 저런 대사를 하도록 해 달라고 그 유니콘에게 부탁했으니까. 오빠는 안전할 테니까 겁먹지 마."
놀란 눈을 하며 트와일라잇은 캐이댄스를 쳐다보았다. "왜 이런 일을 했어요?"
"두고 봐. 알게 될 테니까." 캐이댄스는 미소를 지으며 영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영상에선 샤이닝 아머가 갑자기 생긴 흰색 문을 잠시 돌아보더니 다시 유니콘 NPC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 탈출한 건가?"
"지금 남아있는 유저는 샤이닝 아머, 선셋 쉬머입니다. 다른 유저는 모두 자동으로 시나리오에서 퇴장했습니다."
샤이닝 아머는 얼굴을 찌푸렸다. "뭐? 선셋이 아직도 여기 있다고? 걔한텐 문 안 만들어줬어?"
얼굴을 찌푸리며 캐이댄스는 운을 땠다. "당연히 안 만들어놨지. 네가 위기에 빠진 공주님을 구해줘야 될 것 아냐?"
"유저명 선셋 쉬머는 이 시나리오의 최종 장소에 위치해 있습니다. 긴급 탈출 비상구는 시나리오의 시작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샤이닝 아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잠깐.. 그럼 제한시간동안 못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평생 동안 의식을 못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NPC가 대답했다.
"사실 아무 일도 없는데.." 외부 세계에서 보고 있던 캐이댄스의 변이었다.
샤이닝 아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그럼 뭐해? 당장 도와주러 가지 않고!"
"전 그저 긴급 탈출을 알리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전체적인 시나리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한은 저한텐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설명드릴 게 있습니다. 캐릭터 시트 리더기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오작동을 일으켰습니다. 유저분이 캐릭터 시트에 적어놓은 대로 캐릭터가 형성되는 대신, 유저분의 현실 모습대로 캐릭터가 창조되었으며, 캐릭터의 주문 능력이나 장비 또한 비활성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적대 NPC들은 여전히 생성되어 제 기능을 하고 있는 중이므로, 지금 당장 탈출하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평생 동안 의식불명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9분 남았습니다."
샤이닝 아머는 멍하게 비상구를 쳐다보았다. 당혹감이 샤이닝 아머의 표정에 일었다.
앞발짱을 끼며 캐이댄스는 무섭게 얼굴을 찌푸렸다. "도망가기만 해 봐."
"도망 안 갈 거예요."
트와일라잇은 확신에 가득한 어조로 말했고, 캐이댄스는 적잖이 놀랐다.
공주는 미소를 지으며 망아지를 내려 보았다. 트와일라잇의 표정은 담담했다. 자기가 말한 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오빠를 믿니 트와일라잇?"
"네. 세달 전 이야기에요. 오빠가 저한테 새 인형을 사주려고 저와 같이 인형가게에 갔는데, 학교에서 오빠를 괴롭히는 못된 수말이 오더니 그 인형을 빼앗아간 거 있죠?"
트와일라잇의 목소리에는 점점 슬픈 기색이 어렸다.
"오빠는 맞으면서도 계속 돌려달라고 했어요. 여러 번 걷어차이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났죠. 결국 인형을 다시 찾긴 했지만.."
캐이댄스는 알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오빠가 맞는 모습을 보다니.. 얼마나 상처가 심했을까? 트와일라잇의 목소리에는 공허감마저도 느껴질 정도였고 캐이댄스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캐이댄스는 트와일라잇을 꼭 안아주었고, 트와일라잇은 방 저편에 있는 인형 하나를 가리켰다. 회색 털가죽과 단추 눈을 가진 특별할 것은 별로 없는 봉제 인형이었다.
"이름은 헛똑똑이라고 하는데요, 오빠가 3번째로 쓰러졌을 때 그 수말들이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하지만 오빠는 그 녀석들이 제 발로 건네주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았죠. 그러니 전 믿어요. 오빠도 선셋 공주님을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걸."
캐이댄스는 포옹을 풀고 화면을 쳐다보았다. 이미 샤이닝 아머는 선셋이 감금된 탑. '고통의 탑'으로 통하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5분. 비상구로 도망칠 시간은 없다. 선셋의 날개에 기댄다고 해도 가망은 없을 것이다. 오직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시나리오에 계획된 각본대로 기사가 공주를 구출하고 입맞춤을 나누는 것 뿐..(최소한 샤이닝 아머는 이렇게 믿고 있었다.)
귀중한 10초를 탑을 바라보며 망설이는 걸로 허비하다가, 샤이닝 아머는 결국 마음을 다잡고, 거대한 문을 염동력으로 살짝 열고 몰래 그 안으로 들어갔다.
탑 안의 방 중심부엔 샤이닝 아머 덩치의 10배가 넘는 검은 용이 똬리를 틀고 누워있었다. 샤이닝 아머는 10초간 입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용?!"
트와일라잇이 깜짝 놀라 소리 지르자 캐이댄스는 어께를 으쓱거렸다.
"탑에 붙잡힌 공주를 지키는 데엔 용만한 게 없거든. 아...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런가?"
다행히 용은 잠에 빠져있었다. 캐이댄스가 모든 걸 자비 없이 배치한 것은 아니었다.
샤이닝 아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 한 발짝 한 발짝을 소리가 안 나도록 조심스럽게 내딛었다. 비록 딱딱한 발굽이 돌바닥에 닫을 때 나는 소리는 감추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말이다. 소리를 감지한 듯, 용의 두 귀가 쫑긋거렸다.
샤이닝 아머는 나선형의 계단을 바라보았다. 선셋의 방은 최상층, 탑의 샹들리에를 마주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살금살금 걸어가기엔 너무 먼 곳이었고 시간도 촉박했다.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샤이닝 아머는 용과 문, 용과 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좆같네! 진짜.."
이렇게 중얼거리고 샤이닝 아머는 계단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5발짝. 용이 마침내 깨어났다.
8발짝. 용이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10발짝. 용이 숨을 들이쉬었다.
12발짝. 샤이닝 아머는 막 계단에 도달했고, 검은 용은 샤이닝 아머에게 강산성 숨결을 내뿜었다.
13발짝. 샤이닝 아머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지나왔던 돌계단은 용의 강산성 숨결을 맞아 녹아내리고 있었다.
샤이닝 아머는 비명을 질렀다.
용은 큰 소리로 포효했다.
"뭐야? 밖에 무슨 일이야?" 선셋이 방 안에서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샤이닝 아머는 스스로 박차를 가한 것처럼 아까 달리던 속도의 두 배로 계단을 올라갔고, 용의 강산성 숨결은 아슬아슬하게 샤이닝 아머의 뒤꽁무니를 계속 스치고 지나갔다. 3번째로 발사한 강산성 숨결은 샤이닝 아머가 숨지 않았다면 샤이닝의 얼굴을 거의 녹일 뻔 했고, 네 번째 숨결은 샤이닝 아머의 바로 앞에 떨어져서, 그 구멍을 넘기 위해 샤이닝 아머는 목숨을 건 점프를 해야 했다.
"저기 언니.. 대리석은 강산에 저렇게 빠르게 부식 안 되는데.." 보고 있던 트와일라잇이 과학적 사견을 덧붙였다.
캐이댄스는 잠시 '내가 알았나?'라는 표정을 짓고 난 뒤 다시 샤이닝 아머를 쫒기 위해 날갯짓을 하고 있는 용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다행히 샤이닝 아머는 제때 선셋의 방 앞에 도착했다. 샤이닝은 문을 두드리며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선셋! 선세에엣! 문 열어! 빨리!!"
문 반대편에서 선셋은 외부마 확인용 칸막이를 열고 약간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롤플레잉 애호가 치곤 무지 기초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데 방금? 잠긴 감옥 문을 여는 방법을 찾는 건 보통 모험가가 해야 할 일 아냐?"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검은 용은 샤이닝 아머 바로 뒤로 날아올랐다. 이렇게 거리가 가까워서야 날아오는 산성 숨결을 피하기도 어렵겠지.
캐이댄스는 한숨을 쉬며 검은 용이 숨을 들이쉬는 걸 보고 있었다.
"아휴.. 그래도 애썼으니 노력상 정도는 줘야 하나..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네. 많아..."
시도는 실패에 그치게 됐지만, 그래도 샤이닝 아머가 보기보다 대단한 포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고, 캐이댄스도 속으로 샤이닝 아머를 약간 인정한 차였다.
검은 용은 샤이닝 아머를 향해 강산성 숨결을 내뿜었다.
샤이닝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꼭 감았다.
숨결은 적중했다.... 갑자기 샤이닝 앞을 막아선 분홍색 보호막한테..?!
캐이댄스는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저거?"
"보호막 주문이다!" 트와일라잇이 외쳤다.
"이상하다? 몇 년 전에 산에서 사고가 일어났을 때 빼곤 오빠는 저만한 보호막은 친 적 없는데!"
몇 초 동안 샤이닝은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자신이 친 보호막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호막은 곧 사라졌지만, 이윽고 샤이닝의 등 뒤에서 돌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지끈!'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선셋 쉬머가 방 밖으로 나왔다. 거대한 철문을 아예 벽채로 마법으로 뜯어버린 것이다.
"밖에 대체 무슨 일인지 제발 설명좀 해 줄 포니?"
"선셋! 키스하자!" 샤이닝은 황급히 알리콘을 돌아보며 외쳤다.
"뭐?!" 선셋은 홍조를 띄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키스를 해야 이 시나리오가 끝나! 빨리!"
선셋은 동그란 눈을 하며 되물었다. "프렌치 키스를 해야 하는 거야? 아님-"
"프렌치가 대체 뭔데?!"
그 순간 검은 용이 거대한 앞발로 샤이닝 아머를 공격했다. 적중하지는 않았지만 검은 용은 샤이닝 아머의 꼬리를 낚아챘고 그 때문에 샤이닝 아머는 아래로 끌려가게 되었다.
샤이닝 아머가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는 걸 보며 선셋은 지긋이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망할.. 그래. 이 공주님이 알아서 탈출하고 만다."
이렇게 투덜대면서 선셋은 거대한 샹들리에를 쳐다보았다.
선셋은 훌쩍 뛰어 샹들리에를 잡고 아래로 힘껏 잡아당겼다. 최하층에서 샹들리에를 고정하던 사슬이 큰 소리를 내며 주루루룩 풀렸고, 선셋의 체중과 본체의 무거운 무게까지 합쳐, 철제 샹들리에는 빠른 속도로 용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거나 먹엇!"
철제 샹들리에를 용 머리 위에 처박으며 선셋이 외쳤다. 용의 머리가 샹들리에의 중앙 부분을 뚫고 나왔고, 남은 부산물은 마치 목걸이처럼 용의 목을 감싸게 되었다. 그리고 선셋은 마력으로 용의 손아귀에서 샤이닝 아머를 강탈한 뒤 한 쪽 발굽으로 자기 몸통 옆에 끼우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걘 내놔! 내 거니까!"
선셋은 날개를 펴 활공을 하며 남은 한 쪽 발굽으로 한참 위로 끌려 올라가고 있는 샹들리에의 반대쪽 사슬을 잡았다. 용은 샹들리에에 목을 끼운 채로 정신을 잃고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고, 선셋과 샤이닝 아머는 용의 체중을 운동 에너지 삼아 사슬을 잡고 위로 솟구쳐 올라가게 되었다.
"선셋, 우리 당장-"
"잠깐만 기다려봐."
선셋은 샤이닝의 말을 끊으며 샤이닝을 위로 힘껏 던진 뒤 등을 땅으로 향한 채로 세찬 날갯짓을 시작했다.
"금방 받아줄게!"
샤이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새찬 바람은 샤이닝 아머를 공중으로 띄웠고, 그 반동으로 선셋은 사슬을 붙잡고 아래로 급강하했다.
"우둑!" 마치 교수형을 당한 사형수처럼, 용의 목은 샹들리에에 끼인 채로 그대로 부러지고 말았다. 목뼈 부러지는 소리에 캐이댄스는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선셋은 땅바닥에 사분히 내려왔다. 우선 데롱데롱 매달려 있는 용의 시체를 땅바닥으로 내린 뒤, 뿔에 마력을 집중해 방의 중앙에 원형으로 마법진을 그렸다.
"시체 소각 겸, 로맨틱한 조명 세팅 됐고.."
이렇게 중얼거리며 선셋은 두 뒷다리로 서며 샤이닝을 받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남자친구 세팅 완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샤이닝 아머는 선셋이 두 앞다리에 떨어졌다. 선셋은 약간 비틀거렸지만, 그 충격으로 샤이닝 아머를 놓치지는 않았다.
"선셋! 빨리-"
"쉿... 잠깐만 기다려봐.."
선셋은 고개를 돌려 한창 발동중인 마법진을 쳐다보았다. 목만 꺾였을 뿐, 흠 하나 없는 용의 시체는 곧 마법진에서 일어난 불기둥에 휩싸였다. 주문의 충격파가 선셋의 갈기를 공중으로 휘날리게 만들었고, 강렬한 불빛은 탑의 검은 대리석 방 안을 황금색 빛으로 가득 채웠다.
트와일라잇은 이 모든 광경을 입을 쩍 벌린 채로 보고 있었다.
"멋있어... 지금까지 본 것들 중에서 최고야..." 트와일라잇은 멍한 목소리로 감상평을 남겼다.
"방금 프렌치 키스가 뭔지 물었지? 지금 알려줄까?
선셋은 샤이닝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우읍!"
혀를...넣었어? 방금 그랬지? 캐이댄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경악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우뚝 솟은 두 날개가 캐이댄스의 심정을 대변했다.
몇 초 후 화면은 암전되고, 마침내 시나리오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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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니 샤이닝 아머의 지하실이었다. 여전히 선셋의 입술엔 샤이닝 아머의 입술의 감촉이 생생했다.
그 때, 검은 용이 샤이닝 아머를 습격했을 때, 눈앞의 친구가 위기에 빠지는 걸 보자 선셋의 몸속에는 분노와 함께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그걸 보자 선셋의 힘이 솟구쳤다. 뭐든 할 수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선셋은 단숨에 일을 처리해버렸다. 얻고 싶은 것도 쟁취했다.
샤이닝 아머와 함께라면 이런 일 쯤 여러 번 당해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셋 맞은편에 앉은 샤이닝 아머는 지금 선셋의 갈기 색보다 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선셋은 짓궂게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실제로 키스를 한 게 아니라 샤이닝의 맛이 입 안에 남아있지 않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선셋은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샤이닝 아머에게 키스하고 싶었지만, 주변에 친구들이 있었으므로 욕구를 간신히 참아내었다.
선셋과 샤이닝을 제외한 세 필의 친구들은 어째선지 전부 짜증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무슨 일이라도 당했어?"
샤이닝 아머는 맹한 표정으로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가퍼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아.. 너 빈 방에 앉아서 캐이댄스 공주님에게 '왜 선셋과 샤이닝 아머 둘만 이 시나리오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10분간 강의 들어본 적 있냐? 없으면 말을 하지 마 인마. 아참. 처음에 나온 그 경고 말인데, 그거 순 뻥이야."
"뭣?!" 샤이닝 아머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퍼뜩 외쳤다.
"그래. 그리고 10분 지나면 죽는다 뭐다 하는 말 있지? 그것도 캐이댄스가 다 가짜로 써둔 대사였어. 진짜로 위험하지도 않았다고 인마."
선셋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잠깐..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몇 초간 심호흡을 해 간신히 안정을 되찾은 샤이닝 아머는 선셋에게 그 시나리오 내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선셋의 머릿속에는 순차적으로 2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캐이댄스 네 이년...! 죽여 버리고 말겠어!' 이게 첫 번째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생각이 떠오르자 선셋의 울분은 금세 식어버렸다.
"그렇다면.. 샤이닝 넌 네 목숨이 위험한 걸 알면서도 그냥 도망가지 않고.. 용이 있는데도 탑 안으로 들어왔단 말이야? 날 구하려고?"
그것도 장비 다 갖춘 샤이닝 아머의 캐릭터가 아닌, 평범한 고등학생 샤이닝 아머 본연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게... 놔두고 가긴 좀 그렇더라고.. 그래서.." 샤이닝 아머는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감정이 선셋의 가슴을 억죄어왔다. 입 꼬리가 위로 한없이 올라왔다. 겨우 참아냈긴 했지만 말이다.
"나..잠시 물 좀 마시고 올게." 이렇게 말하며 선셋은 지하실 계단을 올라갔다.
"너흰 참 재미있었겠다? 우린 10분 동안 발굽으로 땅바닥만 긁고 있었는데." 8비트가 선셋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는 샤이닝의 뒤에 대고 이죽거렸다.
거실에 다다르자 선셋은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미쳐 날뛰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 씨발.. 이런 감정은 지금 당장은 필요 없는데..'
선셋의 생각이었다. 애초에 왜 '사랑'의 알리콘에게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스스로 떠벌려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단 말인가.
선셋은 막 유니콘에서 알리콘이라는 엄청난 종족 변화를 겪은 데다가, 셀레스티아와의 관계가 갑자기 너무 좋아져서 그 점에 관해서도 염려를 좀 해 봐야 했다. 그리고 누가 휩쓸려서 병원으로 실려가기 전에 새로 얻은 마력과 능력을 통제하는 법을 익혀야했고, 과거 캐이댄스에게 저질렀던 악행도 청산해야했다. 이렇게 걱정할 거리가 태산인데 샤이닝 아머에 대한 오묘한 감정이라는 짐까지 질 생각은 선셋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봄도 아닌데 시기에도 안 맞게 발정이 계속 나 있는 것 같은 선셋의 성적 욕구도 풀어줘야 했지만, 막상 샤이닝 아머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고 나니, 되레 너무 성급하게 들이대선 안 된다는 기분만 더 들 뿐이었다. 샤이닝 같은 좋은 포니는 그냥 쓰고 버리는 장난감보다 더 나은 취급을 받아야 될 권리가 있었던 것이다!
"선셋. 혹시 물 컵 찾아? 내가 찾아줄까?"
샤이닝 아머의 눈치 없는 참견에 선셋은 샤이닝을 세게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얼이 빠져 있는 샤이닝을 소파 위로 끌고 간 뒤 화끈한 키스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아까 한 다짐이 다 소용없게 되지 않는가.
'제발. 이 세상에도 하느님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나한테 천벌을 내려주길!' 선셋은 속으로 인간 세상의 성경이라는 책에서 본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빌고 또 빌었다. 아니, 그냥 필사적으로 샤이닝 말고 다른 생각을 했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타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서 말이다.
"선셋 공주니임!"
기억보단 조금 더 높지만,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위층에서 들렸다.
그리운 목소리였다.
"정말 대단했어요! 지금껏 본 것 중 최고로 멋졌어요! 책에서도 이런 신나는 내용은 읽어 본 적이 없었다구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선셋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계단 쪽을 보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보라색 털가죽의 유니콘.. 빠르게 계단을 내려온다. 모든 움직임, 모든 생김새가 공주의 눈에 파노라마처럼 들어온다.
그 유니콘은 계단을 다 내려왔다. 이제 유니콘은 선셋과 같은 땅 위에 서 있게 되었다.
"그거 왕립 유니콘 학교에서 배우신 것 맞죠? 아니면 셀레스티아 공주님께 직접 배우신 건가요? 공주님! 저도 그 주문 가르쳐주세요!"
-"이렇게 돼서 미안하군. 공주."
그게 거울 속 기억에서 선셋이 이퀘스트리아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선셋이 트와일라잇에게 남기고 간 말이었다.
-"이렇게 돼서 미안하군. 공주."
그게 거울 속 기억에서 선셋이 이퀘스트리아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선셋이 트와일라잇에게 남기고 간 말이었다.
그 트와일라잇이 지금 선셋 앞에 서 있었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그 암보라색의 갈기, 갈기에 일자로 나 있는 줄무늬, 연보라색의 몸통까지 선셋은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비록 나이는 기억보다 아주 어렸지만, 선셋은 확신했다. 저건 트와일라잇이다. 날개는 없지만 저건 분명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다!
샤이닝 아머에게 느꼈던 연애감정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선셋은 망아지를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고속으로 뛰었다. 말을 걸어 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트..트...트와이-"
"트와일라잇!"
샤이닝 아머가 선셋의 뒤로 걸어오며 외쳤다. 선셋은 숨을 가쁘게 쉬었다. 얼마나 세게 숨을 몰아쉬었는지 샤이닝 아머의 향기가 폐 안에 밸 지경이었다.
"오빠가 뭐라고 말했어? 공주님이랑 오빠랑 약속 다 끝나면 그 때 공주님 뵙자고 했지?"
트와일라잇이라고 불린 그 유니콘 망아지는 고개를 축 내리고 대답했다. "미안해 오빠.."
샤이닝 아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선셋을 쳐다보았다.
"아.. 미안.. 신경 너무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얘는 내 동생이야. 이름은 트와일라잇 스파클."
더는 감당할 수 없었다. 선셋은 어떻게든 여기에 맞는 적당한 가설을 세워보려고 했으나..
샤이닝 아머의 방패 모양 큐티 마크에 그려진 육망성.. 트와일라잇의 큐티 마크, 조화의 원소에 달린 육망성과 너무 닮은 점이 많았다.
그리고.. 전에 교장실에서 본 푸른 털가죽의 유니콘.
-'두고 봐. 난 전 이퀘스트리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유니콘이 되고 말 테니까!'
이름도 분명 트릭시 루라문이었다.
선셋은 생각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 거울에서 본 게 거짓이라는 걸 입증할만한 가설을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심장은 아까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숨소리도 심장 맥박수를 따라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우연이다! 이건 모두 우연일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트와일라잇 스파클을 꼭 빼닮은 망아지가 내 앞에 있을 리가 없다고!
아마도 거울 속의 가짜 세상에 들어가기 전 트와일라잇을 어디선가 봐서 내 환영으로 나타났겠지! 그리고 트와일라잇 스파클이 망아지일 리가 없잖아! 걔는 나랑 동갑이거나 못해도 한두 살 터울인데! 이건 우연이야! 우연이라고!
"저...선셋 공주님?"
트와일라잇은 조심스럽게 자기의 앞발을 뻗어 알리콘의 앞발을 만졌다.
그 순간 선셋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그마한 섬광이 그 망아지의 몸을 지나 선셋의 몸에 흐르는 그 전율을 말이다.
선셋의 가쁜 숨이 바로 멎어버렸다.
여전히 선셋의 몸속에 남아있는 마력, 그리고 친구들에게서 선셋이 빼앗아갔던 마력, 그리고 악마로 변했을 때 선셋이 온 몸으로 겪었던 마력...
바로 우정의 마법.. 아직 미약한 힘이었지만 선셋은 눈앞의 망아지에게서 우정의 마법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이 망아지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었다.
'트와일라잇... 진짜 너였구나...' 이 생각을 끝으로, 공주의 시야는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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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시작한 지 수백 년이 지나도 셀레스티아가 가장 꺼려하는 일 중의 하나는 권력을 가진 각종 정당의 포니들과 회담을 갖는 일이었다. 과분한 자리에 앉아 마치 모두 자기 능력만으로 이 자리에 앉은 양 거들먹거리는 무리들.. 물론 달리 생각해보면 다들 별로 나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몇 십 년이라는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역사에 족적도 별로 못 남기고 사라진 뒤 영영 얼굴도 못 볼 군상들이니까.
하지만 지금 셀레스티아 앞에 서 있는 이 포니는 무언가 달랐다. 스트롱 위더스. 왕실 경비병 장교 출신인 이 의원 포니는 셀레스티아로 하여금 200년 전에 자신이 실험적으로 도입한 민주 제도의 참된 의미가 이런 포니들로 인해 퇴색되는 것은 아닌가 염려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정치 공작이나 더러운 수엔 일가견이 있는 포니였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이퀘스트리아의 경제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라는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긴 했지만, 셀레스티아는 저 자가 한 짓이 결국 캔틀롯의 자기가 사는 구역과, 혹은 자기 수하들에게 부정적인 수단을 동반해 감세 혜택을 받게 한 것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연말 통계를 참고하면 그 자의 모든 공약들이 헛된 거짓이라는 걸 알 수 있으나, 그 자는 교묘했으므로 책임을 빠져나갈 구멍을 언제나 마련해두곤 했다.
"위더스 의원. 무슨 일로 이 오후에 오셨습니까?
왕좌에 앉아 공주는 의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의원들이랑 회담을 가질 때 셀레스티아는 될 수 있으면 공개석상에서 만나지 않았다. 이런 류의 만남은 드러나지 않을수록 나중에 문제가 덜 생기는 법이다.
물론 저런 포니들과 한 자리에 있는 건 아주 지루한 정신노동이 될 게 뻔하긴 했지만 말이다.
"공주님. 공주님과 다른 포니들도 아시다시피, 전 언제나 이퀘스트리아의 안녕만을 바라는 몸입니다."
네놈의 일신의 안녕만을 바라는 거겠지... 떠오르는 실소를 참으며 셀레스티아는 의원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공주님께 이퀘스트리아에 중대한 위험이 닥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셀레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의 장단에 놀아나는 건 달갑지 않았지만, 이러면 최소한 시간 낭비는 덜하겠지.
"무얼 말하고자 하시는 거지요?"
"당연히 이퀘스트리아 국토의 안보에 대한 이야기지요!"
위더스 의원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지난 몇 주간 제 주위의 포니들이 희한한 움직임을 감지했더군요.. 그래서 즉각 공주님에게 보고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공주의 인내심에 약간 부담이 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자는 언제까지 뜸을 들일 작정인지..
"그게 무엇이지요?"
"공주님의 제자, 선셋 쉬머 말입니다만..."
셀레스티아 공주는 몇 년 간의 경험을 통해 초마적인 자제력을 발휘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저 자의 입에서 선셋 쉬머의 이름이 나오자, 셀레스티아는 그간 쌓아온 인내심이 와그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대가 내.. 수제자의 이름을 꺼낸 건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겠지요?"
셀레스티아는 위더스 의원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선셋 쉬머가 비교적 최근에 내 혈육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건 그대도 알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거짓말.. 하지만 이건 셀레스티아가 몇 세기 간 유용하게 써온 거짓말이었다.
"그러니 선셋 쉬머는 왕실의 직속 혈통이자 곧 이퀘스트리아를 수호하는 공주가 될 몸이라는 이야기지요. 제 새로이 입양한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셨지요? 부디 허튼 이야기가 아니길 빕니다. 그대의 신상을 온전히 보전하고 싶다면 말이지요."
의원석에서 한 차례 웅얼거림이 오갔다. 하긴, 그런 소문이 오갈 만도 할 것이다. 이퀘스트리아의 긴 역사 동안 셀레스티아는 혈통을 찾았다는 핑계로 몇몇 알리콘을 왕궁으로 데려오긴 하였으나, 선셋 쉬머만큼 셀레스티아와 가깝게 지낸 포니는 단 한 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셋이 공주님의 혈통이 아니라면 어쩌시겠습니까?"
셀레스티아의 동공이 약간 팽창되었다. 셀레스티아의 분노에 따라 태양의 마력이 뜨거운 열을 발산하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며 셀레스티아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내 작은 포니여?"
"부디 제 말을 경청해주십시오 공주님."
위더스 의원은 간청하는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최근 몇 주일 간 공주님의 수제자- 어흠! 죄송합니다.. 선셋 쉬머 양에 대해 왕궁에서 일하는 시종들이 다 이런 말을 하더군요. '평소답지 않다.' '이상하다.' 라고.. 왕실의 하녀 중 하나는 제게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선셋 쉬머 양이 평소와는 다르게 자기 수준 한참 이하의 주문을 연습하는 것도 모자라 주방장에게 생전 선셋 양은 보지도 못했을 음식을 주문한다고요. 또 요사이 선셋 양이 캐이댄스 공주님이랑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둘이 물과 기름 같은 사이란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잘 아는 사실 아닙니까? 이것만 봐도 선셋 쉬머양이 이상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흠.. 평범한 포니가 할 법한 일은 아니긴 하죠."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건가.. 저 수말을 지금 당장이라도 캔틀롯 정상에서 던져 원래 형태도 안 남을 정도의 곤죽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셀레스티아는 다시 한 번 인내심을 발휘했다.
"내 딸의 정신이 이상하다고 그렇게 길게 말을 꼬아서 할 요량이라면, 그대야말로 의사를 찾아가보는게 어떨까요 위더스 의원, 지금 한시가 급한 건 그 누구도 아닌 그대인 것 같습니다만?"
"제발 공주님. 제 충언을 들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공주님이 사랑하셨던 진짜 선셋 쉬머는 납치당한 채 고통스럽게 세상을 뜨게 될 지도 모릅니다!"
기묘하게 간곡한 어조와 의외의 간언에, 잠시 셀레스티아는 넋을 놓고 말았다. "뭐라구요?"
"생각해 보십시오 공주님! 공주님이 수제자를 아끼신다는 건 이퀘스트리아의 누구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약간 반항적인' 성격을 지닌 선셋 쉬머 양이 어느 순간 착하고 또 다정한 성격으로 갑자기 바뀌었어요! 사랑의 공주를 자기 친구로 끌어들이고 말이죠! 그리고 공주님은 선셋 쉬머 양을 친딸처럼 아끼셨습니다. 어머니나 베풀 법한 큰 사랑을 선셋에게 주시면서요. 하지만 기억해 보십시오.... 사랑을 먹는 괴물들이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하겠습니까?"
다시 의원석은 술렁거렸다. 겁에 질린 속삭임도 들려왔다. 의혹과 의문이 산불처럼 번져갔다.
셀레스티아는 인상을 찡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만!"
술렁거리던 의원석은 고요해졌다. 셀레스티아는 굳건한 표정을 지으며 위더스 의원을 내려 보았다.
"본 공주는 분명 변신충들의 수괴 크리살리스와 그 해충들을 싸그리 잡아 모아 화산 아래 가두어두었다. 생각해보라. 그 이후로 이퀘스트리아가 변신충들의 습격에 시달린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이런 저급한 의심은 조화 대신 불화를 일으킬 뿐이며 무고죄로 다스려야 마땅하나, 본 공주는 그대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 깊게 추궁하지는 않겠다. 알겠는가?"
본 공주는 분명 변신충들의 수괴 크리살리스와 그 해충들을 싸그리 잡아 모아 화산 아래 가두어두었다. 생각해보라. 그 이후로 이퀘스트리아가 변신충들의 습격에 시달린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셀레스티아 공주의 흉흉한 위세에 다들 말이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지금도 공주는 변신충들만 생각하면 이미 끝난 일이었어도 골치가 깨질 지경이었다. 헌데 저 아둔한 자가 구태여 그 기억을 끄집어내고 말다니.. 셀레스티아는 분노에 찬 콧김을 푸륵 뱉었다.
"회견은 끝이다."
셀레스티아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순간이동 마법을 써 그 자리를 벗어나버렸다.
공주는 이제 자신의 개마실에 와 있었다. 문득 공주의 눈에 선셋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랜드 갤로핑 갈라 때 어떤 기자가 찍은 선셋의 사진이었다. 비록 아주 잘 찍은 사진은 아니었지만, 선셋이 시큰둥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게 퍽 귀여웠으므로, 평생 지니고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최근 며칠간 선셋은 저런 표정을 잘 지어주지 않았다.
성격대로라면 저런 표정을 지을만한 상황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셀레스티아는 바보 같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저어 털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선셋은 분명 달라졌다. 셀레스티아가 늘상 봐오던 호기심 많고 괄괄한 포니가 아닌.. 더 나은 포니가 된 건 분명했다. 셀레스티아가 언제나 바라던 이상적인 딸의 모습이 현실로 구현화된 것 같았다.
그걸 자각하자 셀레스티아의 마음에 공포가 엄습했다. 예전의 적, 크리살리스가 돌아와 셀레스티아가 그 무엇보다 아끼는 수제자를 납치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가능성도 분명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 때 선셋을 거울에 데려갔을 때 눈부신 빛 때문에 선셋을 잠시 쳐다보지 못했고.. 갑자기 선셋은 알리콘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게 다 선셋을 셀레스티아의 눈앞에서 납치해가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거라면?
알리콘 선셋 쉬머는 진정 선셋인가? 아니면 포니가 아닌 또 다른 존재인가?
"설마 크리살리스.. 네년인가?"
공주는 선셋의 사진을 보며 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던졌다.
"지금껏 날 가지고 논 것인가?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선셋 쉬머를 납치해 그 불쌍한 아이에게서 사랑을 착취하면서 말이다."
셀레스티아는 심호흡을 했다. 심란한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공주는 그게 진실이 아니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만약 진실이었을 경우 또한 이퀘스트리아의 수호자는 철저히 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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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과 트와일라잇이 드디어 만났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다음 화. '황혼이 오면 노을은 지....나?'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