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다시 한 번 말해봐요."
"어쨌건 이걸 해체해야 합니다."
"아니, 오케이 오케이 할 땐 언제고 인제 와서 이걸 뜯어내겠다고 그래?"
"심정은 이해하지만, 어쨌건 그렇습니다."
태양은 볕을 내리고, 시청은 고집불통 공무원을 내려주어 나 같은 서민에게서 땀을 죽죽 짜내고 있었다. 숨만 쉬어도 땀이 후두두 떨어지는 것이 물 부족 국가인 대한민국에선 참으로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무원과 삼십 분 넘게 실갱이를 벌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이걸 고치는 걸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공무원의 일은 내 일감을 없애려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런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나. 미치겠네." 내가 말했다. "이거 한 번 읽어 봐요. 뭐라고 써있나."
은빛 라벨엔 '잉여풍력재처리설비'라는 글자가 선명히 적혀있었다. 그런데 공무원은 다시 공문인지 뭔지 종이 쪼가리를 다시 폈다.
"예. 착오 없이 찾아온 거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손사래 쳐 말렸다. 들을 필요도 없다. 공문을 어찌나 읊어 싸는지 이젠 외울 지경이 돼서 다 안다.
"아이고, 있어 봐요. 내가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설명해드릴게. 내가. 응?"
말할 준비를 하는데 공무원은 한숨을 푹푹 쉬고, 그 뒤에 있는 새파란 애새끼는 뭐가 그리 웃긴지 처 웃고 자빠졌다. 화가 난다. 특히 저 애새끼한테 화가 난다. 저런 놈들은 대학 나온 거 하나를 벼슬로 삼을 줄만 알지, 예의도 기술도 모르는 햇병아리다. 그런 주제에 스스로 엔지니아 엔지니아 그러고 고개 뻣뻣이 세울 줄만 안다. 하지만 괜찮다. 그래도 나는 인내심이 있고 경험으로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차근차근 설명할 것이다. 목을 가다듬었다.
"하나도 어려운 거 없어요. 응?" 내가 말했다. "지하철 환풍기가 환기한답시고 공기를 바깥으로 뿜어대잖습니까. 많이 봐서 알겄지만 바람이 워낙 세. 그거 사실 낭비되는 게 없다고는 말 못하잖요. 국가적으로 손실 아뇨. 손실. 그래서 이 나라의 괄세받는 과학자분들이 피땀을 흘려서 연구해낸 게 바로 이거요. 그 바람으로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뽑아내니까, 말 해봐야 입만 아프지. 이 재활용이라는 게. 거 나라에도 좋고. 자연에도 좋고. 세금 내는 서민들한테도 좋은 건데. 왜 뜯냐 이거야."
공무원은 요지부동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도 그 마음 이해합니다. 왜 이해 못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게 시민분들도 그렇고, 저, 뭐냐. 박사분들도 그렇고 이게 그 현재 얘기가 끝난 사이비 과학이니까 없어져야 한다고 하시는데 글쎄."
화가 불컥 솟았다.
"아니, 그러니까 몇 번을 말합니까 도대체!"
내 사자후에 공무원도 찔리는지 주춤거렸다. 계속 옳은 말을 하니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그 양심이 벌려둔 틈을 놓칠 내가 아니었다. 사슴이 호랑이에게 뒷발굽을 내지르듯 재빨리 찔렀다.
"옳은 일이 아닌데 그냥 시킨다고 뜯는다? 당신이 뭐 그 히틀러가 시킨다고 유대인 죽인 나치요? 시키면 무조건 대고 다 하는 그런 사람이요? 아니잖요!"
공무원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내 귀는 그리 좋지 않지만, 그가 나지막이 '씨발'이라고 하는 것까지 못들을 정도로 멀진 않았다. 그가 멱살째로 확 공중에 들려졌다. 그걸 본 젊은 애가 얄쌍한 손으로 말렸지만, 노동으로 다져진 팔뚝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 새끼가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뭐? 씨발?" 내가 말했다. "어른한테 할 소리야, 그게!"
"지금 뭐하는 겁니까!"
뒤에서 소리가 들려와 바라보니 사장님이 계셨다. 순간 찬물에 빠진 것 같았다.
"사장님."
내가 손을 놓자 공무원은 선 채로 허우적대다 얼른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사장님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공무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죄송합니다."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이 친구가 일에 자부심과 열정이 넘쳐서 그런 거니까, 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괜찮습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사장님 앞에서 공무원은 점잔빼고 앉았다. 공무원 꼬락서니가 같잖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사장님이 내게 무척 자애롭고 친절한 목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자,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만 퇴근하세요."
그 말에 얼어붙었다. 말씨가 친절해서가 아니라, 사장의 눈을 봤기 때문이다. 그건 옛날, 우리를 붙잡아놓고도 상사에게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월맹군의 눈빛이었다.
나는 그만 얼떨떨해져서 모기 날갯짓만 한 소리로 '예에' 소리를 내곤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 꼴이 얼마나 궁상맞은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눈초리를 내게서 떼지 못하였다. 예외는 없었다. 아이도, 젊은이도, 내 또래도 마찬가지였다.
소주가 암만 쓰다 하여도 나같이 애달픈 서민 삶에 비하면 달달하기 그지없는 것이라. 사회의 부조리가 사람 속을 병들게 할 때 소주는 참된 인간의 속을 낫게 한다. 동네 구멍가게에 술을 사러 갔더니 평상에 앉아 김치 종지 앞에 두고 종이컵을 기울이던 최 사장이 부채를 흔들며 나를 반겼다.
"대낮부터 인상이 왜 그래?"
"자네가 할 말인가?"
마침 평상에 그늘이 지고 해서 옆에 앉았다. 최 사장은 종이컵과 소주병을 더 들고 와 내게 한 잔 따라주었다.
"아니, 글쎄. 그 설비 알지? 그 지하철에 다는 거. 오늘 내가 그거 점검하는 데 말야. 아니 뭔 공무원 놈들이 와서 그걸 뜯겠다고 지랄하더라고? 그래서 그거 말리느라 땀 좀 뺐지."
아까 얘기를 하다 보니 다시 울분이 치밀었지만, 소주 한 잔에 다시 누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해 질 때까지 일하는 최 사장이 웬일로 낮부터 약주를 걸치는지 궁금했다.
"근데 자네 현장은 어쩌고 여길 왔어?"
최 사장은 담배를 빼 물었다. 나도 한 대 받아 같이 불을 붙였다. 나와 최 사장이 같은 근로자이자 친구인 것처럼, 최 사장의 나쁜 소식과 담배는 단짝이었다. 말하기 전에 담뱃불부터 붙이는 걸 보니 오늘 일은 공친 모양이다.
"오늘 공쳤어."
"왜?"
"열사병 걸린다고 다 퇴근하래." 최 사장이 말했다. "언젠 지들이 사람 챙겼다고 열사병 얘기여. 가뜩이나 불경긴데 돈이나 더 벌게 해줄 일이지."
그 말이 심금을 울리는 데가 있어 고개가 절로 주억였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때 산소를 만난 불똥처럼, 내 뇌리도 친구의 푸념을 마주하자 번뜩였다. 돈 한 푼 아쉬운 가난한 일꾼을 돌려보낸 사람의 생각은 뻔히 보인다. 요사이 언론에서 불경기 얘기에, 범죄 얘기에, 열사병 얘기에, 하청업체 직원들 부리는 막돼먹은 기업인들 얘기 같은 게 나오는 탓이다. 그래서 시공일 좀 늦추더라도 일꾼들 걱정해주고 챙기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게다.
그런 생각 탓인가. 나도 모르게 주절거렸다.
"근데 말이야.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하지."
"왜?"
"착취의 선봉에 서는 새끼라도 도덕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잖아."
최 사장은 손가락을 딱 퉁기며 한마디 거든다.
"그렇지. 그렇지. 난봉꾼이 처녀보다도 순결해보이고 싶어하는 것처럼 말야."
"그런데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이 다 불쌍하지 않나?"
"왜?"
"우리나라 사람 치곤 삼독심三毒心 없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야. 그렇지 않나?"
최 사장은 수염도 없는 턱을 긁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고 답답하다! 바로 바로 알아듣지를 못하니 답답하다!
하지만 나는 최 사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 사장이란 인간은 삼십 년 넘게 공사판 전전하면서 기술도 못배워서 지금까지 잡부로 지내는 주제에 똑똑한 척 할 기회가 보이면, 사탕 냄새 맡은 개미처럼 득달 같이 달려드는 인간. 그러니까, 양심도 교양도 지혜도 없는 삼무三無의 극에 달한 인간이었다. 나니까 이렇게 말동무해주고 그러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즉에 떠났을 것이다.
긴 말이 될 것 같으니 알콜로 목을 축이고, 혀를 매끈하게, 입술을 촉촉하게 해두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런 거지. 학력의 고하나, 빈부나, 남녀노소를 떠나서 사람은 더러운 본성이 있단 말야. 그렇지? 사람들은 모두 탐욕스럽고, 쉽게 성내고, 어리석단 말야. 가수를 예로 설명하면, 사람들은 가수처럼 명예와 부를 누리며 살고 싶어 하고, 때때로 가수에게 분노하고, 가수의 삶도 잘 몰라. 왜 그럴까? 왜 이런 인간 군상은 계속 생길까? 그건 사람이 삶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왜 그러느냐면, 이런 본성 깊은 곳에는 결국 생존 욕구가 있어. 이건 단순히 숨을 쉬고 먹고 자고 싸고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자기 안전에 대한 확실한 신뢰도 필요해. 그 신뢰는 단순히 자신에게 거는 최면 따위가 아니라,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에서 오거든. 이 외부의 것들이 뭐냐 하면 바로 돈과 명예. 그리고 자기 적에 대한 확실한 정보. 이 세 가지. 남보다 돈이 많아야 하고, 남보다 자기 편이 많아야 하고, 남보다 남을 더 잘 알아야 해. 결국 남보다 모든 면으로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그러기가 어디 쉽나? 어렵지. 하지만 방법이 있지. 자기 얼굴 위의 구둣발을 치울 수 없다면, 밟을 만한 얼굴을 찾는 게 제일이지. 다시 말해, 사람에게 있는 첫번째 악덕인 탐욕은 남을 짓밟는 거고, 분노는 자기가 남의 목줄을 못쥐어서 생기는 거고, 남을 짓밟기 위해선 남의 선함을 몰라야 해. 이 삼박자가 인간의 본성이기에 지금도 세계는 전쟁 중이고, 이 화평한 대한민국에서도 사람들이 서로를 헐뜯지. 그래서 내가 티비를 욕하는 거야. 티비는 항상 사람들이 욕할 꺼리를 던져주거든. 티비란 놈의 메시지는 총알처럼 강렬하고도 즉각적이어서,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티비를 보면 삼독심이 생기는 거지. 아니, 선량한 사람이라 더 생기는 거지. 티비에 나오는 건 항상 탐욕스럽고, 욕먹을 만한 짓을 하고, 우매한 녀석이 나오지. 사람은 비교하는 생물이라 자신과 그 얼간이들을 비교하고선 이렇게 생각하지. 나는 저놈보다 욕심이 없고, 저놈보다 남을 화나게 하지 않았으며, 저놈보다 똑똑하다! 그러니 결국 내 눈 앞에 없는 허깨비를 욕하느라 진짜 적 앞에선 입이 말라비틀어져 말을 못하지. 해결할 방법이 없느냐면 그것도 아니야. 아까 말했던 걸 뒤집으면 다 해결되지. 사람이 남을 짓밟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남의 목줄을 쥐려고도 않고, 남의 선함을 이해하고, 자기 삶을 찾으면 된다고. 그러면 분쟁은 절대 생기지 않아. 하지만 앞의 셋은 자기 근성으로 어떻게 된다고 손 쳐도, 자기 삶을 찾는 건 외부에서만 가능해서 절망적이지. 왜냐하면, 자신의 삶은 정말 모순적이게도 스스로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외부에서 자기를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에게서만 오는 거거든. 사람들이 진짜 불쌍한 이유는 그건 나와 자네처럼 우정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지. 한 마디로 줄이자면, 사람은 살아있는 동시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불쌍하다 이 말이야."
최 사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뉴스에서 본 아나운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보니 언론 뭐시기 평가에서 꼴지를 한 언론사가 아나운서와 기상캐스터를 가슴 큰 여자로 바꿨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우린 건설적이고도 철학적인 이야기를 안주 삼아 오래도록 술을 마셨다.
저녁 여섯 시 정도 되었을 때 설렁설렁 들어가는 데, 나이가 먹으니 집에 가기도 전에 방광이 저렸다. 대충 살펴보니 사람도 없는 것 같아 아무데나 싸기로 했다.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린 벽엔 쓰레기가 전봇대를 베개 삼아 잔뜩 누워있어, 오줌 정도는 싸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전립선이 안 좋아 걱정인 것 같은데 오줌은 잘도 나온다. 그런데 쓰레기 더미를 보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훈장이었다. 누가 버렸는지,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쓰레기 봉투 위에서 깨끗하게 있는 것이 버린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양이 완전히 저물지도 않았는데 영롱한 빛을 내며 빛나는 것이 꼭 자신을 알아봐줄 이를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지춤을 정리하고 나자마자 냉큼 주웠다. 그리고 누가 볼세라 걸음을 빨리해-뛰기엔 나이가 좀 있으므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걸 잘 씻고 방향제도 뿌려 냄새를 없애고 정성스레 닦았다. 새 주인을 뵙고 눈을 빛내는 훈장이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간만에 양복을 꺼내어 달았다. 거울이 없어 아무 빛도 내지 않는 텔레비전 화면을 향해 서서 대강 봤는데, 내가 보기에 의장대나 장군보다도 훨씬 품격있고 멋졌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나도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참전용사니까 괜찮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일도 없을 것 같고 해서 어제의 그 차림으로 동네에 나갔다. 막상 나오니 집안에서 생각한 것과 달리 옴츠라든 어깨로 걷게 되었다. 누군가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때문이었다.
때마침 앞을 보니 군복을 입은 젊은이 둘이서 나를 향해 몹시 흥분해서는 달려오고 있었다. 털썩 주저앉을 뻔한 찰나.
"단결!"
군인들이 내게 힘차게 경례를 했다. 나는 약간 얼떨떨해져선 나 자신도 모르게 경례를 받아주었다. 상병은 이가 환히 드러나게 웃더니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항상 존경합니다!"
"어, 어. 그래요. 들어가요."
"사랑합니다. 단결!"
"다, 단결."
군인들이 멀어져가는 만큼, 가슴 깊은 곳에선 간헐천에서 뿜어져나오는 물과 같이 자신감이 솟구쳤다. 턱과 어깨가 높아지고, 등은 곧게, 걸음은 무겁게 되어선 그야말로 어엿한 참전용사가 되었다.
기분이 좋아져서 평소에 안 가던 번화가로 갔다. 지금은 사람도 적절히 많고 이걸 몰라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거리에 있는 모든 눈은 나를 보고 찬미하기 위해서 존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해야지."
"안녕하세요."
갑자기 웬 젊은 엄마가 나를 보더니 멈춰서선 자기 딸아이에게 친절히 설명한다.
"할아버지는 우리 나라를 위해서 용감하게 싸우신 분이셔. 자, 할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고맙습니다."
"고맙찝니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선 너무 그러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곤 걸음을 빨리했다.
일전에 나는 세상이 증오 속에서 서로의 몸을 데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그런 것은 나의 허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라!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늘은 깊고도 푸르고, 햇볕은 차갑게 굳어가는 나의 피부에 온기를 되돌려놓고, 거리는 젊음과 활기로 가득하고, 지금 이렇게 흐르는 땀은 인생을 증명하고 있잖은가!
그런데 그것도 잠시. 젊은이들은 휴대 전화를 들고 내게 들이대었다. 일순 세상이 멎고 고요에 홀로 던져진 것 같았다. 나는 완전 무식쟁이는 아니라 저게 뭔지 안다.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다 올리고 그러면 아마 정부도 알게 되겠지.
하지 말라고 소리지르고 말리고 싶었지만, 그러자니 눈이 너무 많아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훈장을 주머니에 넣고는 바퀴벌레가 약 피하듯 부리나케 살던 동네로 돌아왔다.
이런 궁상맞은 짓은 그만하고 집에 가자고 내 양심이 말하건만, 입은 이런 진귀한 경험을 말해주고 싶어 가렵다고 아우성이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다시 훈장을 패용했다.
문득 최 사장 반응이 궁금해 동네 슈퍼로 갔더니, 더 말할 것도 없이 오늘도 평상에 앉아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는데, 다른 점이라면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위험하다 싶어 돌아가려는데, 최 사장의 눈은 의외로 좋았다.
결국, 나는 최 사장과 배심원 앞에 섰다.
"아이고, 장가 가나?"
"오늘 공쳤지 뭔가."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최 사장은 훈장을 보더니 물었다.
"이게 무슨 훈장인가?"
나는 괜히 무안해져선 빽 소리를 질렀다.
"한국 사람이 돼가지고선 그것두 몰라!"
"원 성질은."
최 사장은 다시 담배를 빨았다. 그런데 옆에 있던 인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거 보국훈장 아냐?" 인부는 최 사장의 어깨를 툭 쳤다. "영웅을 친구로 뒀구만!"
그에 최 사장은 생각나는 게 있어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가 월남에 갔었지 아마."
"풍채를 보니 그럴만 하네."
인부가 내게 술을 따라주었다.
"자, 자. 한잔 받고, 얘기나 좀 해봐요. 내가 동기들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훈장 탄 사람 얘기는 못들어봐서."
얘기 같은 게 있을리 없었다. 나는 술잔을 내려두고 급한 일이 있는 양 굴었다.
"난 가볼게."
"오늘 일 없다며?"
"잠깐 들른 거야. 시간 없어."
"그으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있다 한 잔 하자고."
"그러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아마 눈치채지 못했겠지? 모르겠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 오니 잡념이 머리를 꽉꽉 채웠다. 최 사장과 인부가 눈치채지 않았나 조마조마 해지고, 괜히 아까 나를 찍던 인간들이 떠올랐다. 나무판을 땅땅 치는 망치 소리와 수군거림이 칼이 되어 다가온다. 좁혀온다. 공중으로 날 수도, 땅으로 꺼질 수도 없다. 외통수. 완벽한 외통수였다.
훈장을 보았다. 다 이 녀석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이것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에이, 젠장!"
벽을 향해 서선 훈장을 옷에서 거칠게 뜯어내 팔을 높이 들어 빠르게 휘둘렀다. 그러나 던지진 못했다.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건 환상이 아니었다. 그림자는 갑자기 날 확 떠다밀었다.
"어쿠!"
내 눈과 손은 녀석을 상대하는 것보다 떨어진 훈장에 신경을 쏟았다. 앞을 보니 훈장을 주우려는 그 손이 있어 꽉 잡았지만, 걷어차는 발에 나는 쓰레기 봉투 더미 위에 안착했고, 봉투가 터지는 것과 내용물의 감촉이 등에 그대로 느껴졌다.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불쾌함도 뭣도 없었다. 통증도 없었다.
내가 살아있나? 텅 빈 폐를 쥐어짰다.
비었다.
비었어.
껍데기다.
껍데기.
그때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자 눈 앞에 모든 것이 아지랑이가 되었다. 내 눈에 흐르는 것이 빗물인가, 눈물인가. 아니면 스쳐지나간 옛 영광의 잔재련가.
나는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싶어졌다.
아! 훈장이여! 내게 머문 훈장이여! 내게 허락되지 않은 훈장이여! 잘 가거라! 나는 너를 다신 찾지 않으련다! 너도 나를 찾지 말아라!
아! 그립지 않은 이름이여! 훈장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