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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그는 사관학교 수석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동료들이나 교관으로부터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주변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이 있다는 호평을 받았다.
소위로 임관하던 해, 바이에른 지역의 귀족가문인 '니나 폰 레르헨펠트'와 약혼하고, 1933년에 결혼하였다.
1933년 나치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슈타우펜베르크는 나치스의 국가주의적 양상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패전국이었던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군비확장 등의 정책을 취한 나치스 정권에 대한 기대와 독일군 장교들의 전반적 정서를 반영한 성향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한때 히틀러를 '독일민족을 구할 진정한 지도자'로 존경하면서 나치스에 관심을 보였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곧 히틀러와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1933년, 나치스 정권은 가톨릭을 부정하였고 인종주의를 내세운 데다 히틀러의 나치스 정당이 극단적인 일당 독재로 흘러가면서 그는 종교적 도덕성과 정의감에 맞부딪치면서 갈등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나치스 정당의 이념적 모순점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3]
1936년, 그는 엘리트 장교들이 들어가는 베를린의 육군대학에 입학하여 1938년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위로 진급, 육군 참모본부에 보직을 받았다.
한편 히틀러가 권력의 정상에서 광적인 호전성을 드러낼 무렵부터 군부내에서는 '반나치주의' 세력이 결집하였고, 히틀러 제거를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하였다. 그 첫 계획의 첫모임 주동세력은 독일군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던 루트비히 베크 상급대장과 독일군 서부군 사령관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 등이었다. 민간인으로서 정치인 출신인 크라이자우어 크라이스 등이 가담했다. 그러나, 그 당시 히틀러는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았으므로 이들 독일 핵심 군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대화 수준에서 끝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히틀러 암살계획의 첫 시도는 1941년도에 싹을 틔웠다.
'반나치 세력'은 히틀러의 암살과 함께 '발키리 작전'계획을 발동하여 예비군 군대를 동원할 예정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있는 육군 본부 예비군 참모직은 히틀러에게 직접 브리핑을 할 수 있어 암살 결행을 할 수 있는 절호의 보직이었다. 그는 불구가 된 장애인으로 신체 수색을 받지 않고도 히틀러에게 접근 할 수가 있었다. 거기에 종전에 있었던 여러번의 히틀러 암살 시도가 실패했던 점 때문에 슈타우펜베르크는 이번에 틀림없이 직접 히틀러를 처치하기로 마음을 먹어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동프로이센 지역의 라슈텐부르크(오늘날 폴란드 지역)에 위치한 '볼프샨체(독일어: Wolfschanze, 늑대소굴)'라 불리는 지하벙커의 최고 지휘소에서 열리던 전시 최고회의에 참석하는 기회를 얻은 슈타우펜베르크는 서류 가방으로 위장한 시한 폭탄을 사용하여 히틀러를 암살하기로 하였다. 히틀러는 전시중 내내 주로 '볼프샨체'에 있으면서 수도인 베를린에서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를 처단할 수 있는곳은 '볼프샨체'였던 것이다. 그는 7월 11일과 7월 15일 암살 계획을 실행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거사 실행을 연기했다. 히틀러 암살 실행은 7월 20일에 감행되었다. 그는 볼프샨체로 가서 히틀러를 암살하고 바로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예비군을 동원하여 나치스 정권을 타도하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 날 그는 계획대로 볼프샨체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서 시간을 보낸 뒤 가지고 간 서류 가방 위장 시한폭탄(정확히 말하면 플라스틱 폭탄이다)을 작동시키고 회의실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리고 안전한 거리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폭탄은 정확히 12시 40분경에 회의실에서 폭발하였다. 그러나 슈타우펜베르크가 회의실 책상 아래 놓아둔 가방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한 히틀러의 전속부관 '하인츠 브란트' 육군대령이 그 가방을 발로 더 옆으로 밀어 놓아버려 폭탄이 두꺼운 목제 테이블 다리 뒤에서 터졌다. 정확한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슈타우펜베르크는 그 사실을 몰랐고, 폭발을 보고 히틀러가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굵은 테이블 다리는 몇 미터 앞에 있는 히틀러를 보호해주었고, 히틀러는 고막이 터지고 좌반신에 화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회의실이 대파되었고, 한 명의 속기사를 포함하여 4명이 죽고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한편, 슈타우펜베르크는 들것에 히틀러의 외투로 덮인 사람이 운반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는 '히틀러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그의 부관과 함께 즉시 비행장으로 달려가서 HE-111(하인켈 111 폭격기)를 타고 수도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가 오후 4시 30분에 베를린으로 도착해서 본부로 달려가 보니 쿠데타 거사는커녕 발키리 계획도 전혀 발동되지 않았다. 이미 폭발 결과에 대한 정보가 일부 흘러 들어가서 히틀러의 죽음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여러 '반나치세력' 가담자들이 불안해하여 작전이 실행되지 않은 것이다.
슈타우펜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이 혼란을 극복하고 '발키리 작전'을 발령해서 상황을 수습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반나치세력'은 예비군 사령관이던 프리드리히 프롬을 회유하지만, 프롬은 기회주의자였다. '반나치세력'은 프롬을 가두고 군령을 위조해 예비군으로 베를린을 장악하였다.
'히틀러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이 이미 '반나치세력' 주모자들 사이에 떠돌아서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거나 배신을 할 준비를 하며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또한 이미 '히틀러가 죽지 않았다'는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 전 독일에 퍼진 상태였기 때문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루트비히 베크 상급대장, 비츨레벤 원수, 올브리히트 소장 등 몇몇의 가담자들은 겨우 몇 시간 동안 수도 베를린을 통제했을 뿐이다.
밤 9시경에 쿠데타는 이미 실패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트레슈코프 소장을 비롯한 몇 명의 동조자들은 이때부터 자살로 끝을 맺었다.
두 시간 뒤 11시에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바꾸어 그를 체포하러온 오토 에른스트 레머 소령의 예비군 부대로부터 도주를 시도하다 오른쪽 팔을 맞아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어서 '반나치세력'에 묵시적으로 동조하였던 프리드리히 프롬은 다시 예비군을 장악하였고, 프롬은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반나치세력' 가담자들을 체포한 후 바로 사형선고를 내려 즉결처분한다. 프롬은 훗날 자신에게 추궁이 올까 두려워 '반나치세력'을 배신하고 즉결처분을 내렸는데, 이는 뒷날 1945년 3월에 들통이 나 프롬 역시 3월 15일 총살을 당하게 된다.
자정이 넘은 1944년 7월 21일 오전 12시 30분에 슈타우펜베르크는 즉결처분을 언도받고, 다른 세 명의 주모자와 함께 총살형에 처해졌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로 조명한 가운데 집행된 총살 현장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쳤다.
“ | 위대한 독일이여 영원하라! (Es lebe unser heiliges Deutschland!)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