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의 상식과 논리는 있어야 한다. 아무리 이병도를 옹호하려 한다고 해도 한국 현대사의 정체성까지 훼손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특히 당시 어느 누구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뒤늦게나마 그의 발언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첫번째 창씨개명과 두번째 실증사학에 대한 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두번째 논점에 대한 논쟁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우선 첫번째 논점인 창씨개명과 친일행적의 연관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병도가 일제시대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따라서 그가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을 했던 다른 사람들보다 긍정적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이광수와 박정희 같은 인물은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에 적극 호응했는데 그 방식이 너무 심해 조선 백성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였다.
먼저 이광수는 조선총독부가 1940년 2월 창씨개명을 실시하자 가장 신속하게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성과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그는 '작명作名의 변辯'까지 발표했는데 이 글에는 "2600년 전 신무천황께옵서 어즉위御卽位하신 곳이 구원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향구산입니다"라거나 "나는 천황폐하의 적자입니다"라는 낯뜨거운 표현이 등장한다.
소학교 교사 생활을 하던 박정희도 다까기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을 했다. 일본 헌병과 군인이 차고 다니던 긴칼이 부러워 군인이 되기로 작정한 것으로 알려진 박정희는 그것도 모자라 일본 천황을 위해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이라는 혈서까지 썼다. 그 덕분에 박정희는 항일 독립군을 사냥하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창씨개명만으로 친일행적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진짜 친일파의 경우에는 도리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강제로 실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 인사에게 예외를 허용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제일 먼저 연행된 '친일파 1호'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장 조선비행기주식회사 대표)이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도 10여 개의 친일단체 간부로 활동했지만 정작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다. 그는 1940년 보상금을 받고 조선일보를 자진 폐간한 뒤에도 1944년 8월까지 친일잡지 조광을 통해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체결한 조약"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매년 창간기념일이 되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부각하며 방응모가 마치 항일투사라도 되는 양 역사를 날조해 왔다.
"이병도는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학자이다"라는 강단사학 지지자들의 항변을 낯부끄럽게 만드는 '결정적 증거'는 또 있다.
이병도가 자유당 정권 당시 특무대장을 지내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김창룡의 비명碑銘을 지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는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거니와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 출신으로 항일 독립군을 사냥했던 죄업 때문에 해방이 되자 한때 지하로 숨기도 했던 천하가 다 아는 친일파 중의 친일파였다.
그런 악명 높은 친일파를 위해 비명을 써준 객관적 사실은 짐짓 외면한 채 창씨개명 운운하며 친일행적과 이병도의 무관을 강조하려는 것은 장관급과 차관급에 해당하는 공적 기관의 수장이 이미 됐거나 되려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36세의 김창룡이 옛 부하들에게 암살 당한 1956년 당시 이병도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60세의 노학자였다.
이병도의 실증사학은 역사를 올바르게 보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을 하는 강단사학 지지자도 있다. 그러나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실증사학의 대부'로 불렸던 이병도가 김창룡을 위해 지은 비명에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다른 허위 내용이 가득 차 있었다.
실제로 김창룡 비명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 시절) 간첩 부역자 2만5천명을 검거 처단하는 임무를 달성했다"라거나 "(특무대장 시절)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했다"는 등의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 처리 과정에서 김창룡은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를 양산했으며 방첩활동 과정에서도 수많은 정치공작을 자행한 장본인이다.
이와 관련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2과에서 근무했던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는 2000년 1월 대전형무소 학살사건을 공론화시킨 재미동포 이도영 박사와의 면담 과정에서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은) 전부 김창룡이 한 짓"이라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창룡은 백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기도 했다. 암살범 안두희는 세상을 뜨기 전인 1992년 "조선호텔 앞 대륙상사로 위장된 특무대 사무실에서 김창룡을 만나 백범 암살을 지시 받았다"고 증언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바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한국 현대사의 짓궂은 인연은 반세기가 지난 뒤에도 반복되었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1858∼1939)와 장남인 김인 선생(1918∼1945)이 아들과 부친의 암살 배후로 지목된 김창룡과 같은 묘지인 대전 현충원에 묻히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안장된 애국지사 제2묘역과 김창룡이 묻혀 있는 장군묘역은 야산을 사이에 두고 불과 5백여 미터 떨어져 있을 뿐이다.
이병도가 지은 비명을 중심으로 김창룡과 관련된 한국 현대사의 정사와 비사를 살펴보면 십중팔구 오류와 왜곡으로 점철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증사학의 대부'가 지어준 '반공투사의 업적'은 '민족정기'는 물론이고 '실증사학'마저 배신했던 것이다.
이병도의 실증 사학을 긍정적으로 보자는 지지자들이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럽게 만드는 증거는 또 있다. [2신]에서 이미 소개한, 평소 그렇게도 실증주의를 강조했던 이병도가 정작 '가문의 수치'를 은폐하기 위해 원광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던 이완용의 관 뚜껑이라는 역사 유물을 가져다가 불태워버렸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공사公私도 구분하지 못한 채 저지른 이 가증스런 은폐행위는 일제가 역사왜곡을 위해 급조한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병도가 부역한 전력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강단사학 지지자들의 뒤틀린 멘탈리티와 그 맥이 닿아 있는 셈이다. '강한 부정'으로 일관하는 그 심리의 기저에는 역설적으로 억압된 의식의 편린이 깊이 박혀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