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롱하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듯 시야가 천천히 흔들린다.
피어오르는 연기는 아침의 강가처럼 뿌옇게, 가득 차 있다.
그 연기 속에서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적 내가 보인다.
그제서야 주마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에겐 ‘가족’이 없다는 것을.
그저 가정만이 있을 뿐.
겉보기에 잘 돌아가는 것 같지만
이미 속은 썩어 문들어진 우리들을.
그래도 저땐 행복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교복을 입은 나는 빨간 딱지로 가득한 방에서 울고 있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적어도 저 눈물을 닦아줄 누군가.
누군가가 있었다면.
다시 모습은 바뀌어 공장이 보였다.
첫 출근 때였다.
이때만 해도 조금은 두근거렸을 것이다.
앞으로 돈을 번다는 것.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는 것.
다음은 안 봐도 뻔하지만
역시
손가락이 잘려있었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고
보상금? 그런 것도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포차에서 한잔 걸치고 흔들리는 뒷모습이 보였다.
애써 눈을 돌리려고 했지만
과거에게서 눈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 했다.
그 처절한 뒷모습을 볼 수 밖엔 없었다.
아무도 없는 나의 쓸쓸한 모습을 볼 수 밖엔 없었다.
다시 또 바뀐다.
이번엔 그녀가 보였다.
이런 나에게 사랑한다고 해 줬던 그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사랑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나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웃지 않는다.
그 아름다움은 단지 가면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저 돈이었다.
없는 돈 있는 돈 전부 가져갔다.
없는 마음 있는 마음 전부 가져갔다.
나마저도 가져간 것일까.
확실한 것은 ‘너’는 가져갔다.
그리고 나의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테이프와 망치를 사는 모습.
번개탄을 사는 모습.
돌연 연기가 흔들리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젠 숨도 잘 쉴 수 없다.
그저 남은 것은 죽음 뿐인가.
죽음.
나의 죽음을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자살, 이겠지.
하지만 나는 결코 자살한 것이 아니다.
나는 타살이다.
명백히 타살이다.
부모가
상사가
친구가
그녀가
날 죽인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들도 결국은 피해자이다.
나와 같은 피해자.
부모님은 나를, 가정을, 행복을 잃었다.
상사와 친구는 일자리를, 급여를, 가정을 잃었다.
그녀는 자신을 잃었다.
그들도 나도 모두 그저 피해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날 죽인 것일까.
바지 주머니 속의 동전이 짤랑거렸다.
아까 사고 남은 돈인 것일까.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모든 것은 그것 때문이다.
돈.
보잘것 없는 종이 쪼가리가
나를 죽인 것이다.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죽게 될 것이다.
나처럼.
세상이 흐릿해졌다.
이제 곧 있으면 난 죽는 것이다.
돈에게 죽는 것이다.
띠링.
핸드폰이 갑자기 켜졌다.
마지막으로 온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약 때문인가 서서히 굳는 느낌이었다.
가족일까, 상사일까, 친구일까.
아니면 그녀일까.
메시지 함을 누르기 무서웠다.
눈을 감고 탁 눌렀다.
“1000만원 대출 가능.
즉시 신청.”
하.
하하.
웃음만 나온다.
핸드폰을 조수석에 세차게 던진다.
산산히 부서졌다.
그 모습은 누구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물질로 이뤄진 그것은.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