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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재희
게시물ID : panic_905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adia
추천 : 13
조회수 : 119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6/09/10 22: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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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 좀 들어보세요. 분명히 그 년이 무슨 짓을 한거라구요!!"

 재희는 억울했다. 무척이나 격양된 표정과 씩씩거리는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하는 이 선생을 향해 울부 짖었다. 선생은 그런 재희를 다독이려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고, 재희는 그게 무척이나 못마땅했는지 재빨리 그 손을 내쳤다. 갈 곳을 잃은 손은 허공에서 주춤하더니 이내 선생의 넥타이 주변을 맴돌았다. 

 "선생님하고 여기 앉아서 다시 차분히 얘기 해 보자."
 "뭘 다시 얘기해요? 충분히 설명했잖아요! 왜 제 말을 믿지 않으시는거에요?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그런건 아니야. 그냥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잖니."

 재희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선생은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재희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는 선생을 향해 근처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다른 여선생이 슬쩍 말을 건넸다.

 "이 선생, 대체 무슨일이래?"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학업 스트레스가 엄청난가봐요. 애가 요즘 이상하네요."






 어제의 일이었다. 재희는 언제나처럼 핸드폰 게임을 하다 전날 밤 늦게 잠이 들었고, 뭘 어떻게 하더라도 지각할 수 밖에 없는 시간에 일어났다. 신경질적으로 알람 시계를 던지고는 침대 위에 널브러진 교복을 챙겨 입었다. 허리춤까지 끌어올린 치마를 잠그면서 재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질감을 느꼈다. 

"아우, 엄마! 내가 교복 좀 다려놓으라 했잖아, 쫌!"

 무언가 어색했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모친을 향해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쨍알대면서도 손놀림은 바쁘게 학교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엄마는 집에서 하는 일도 없으면서 나 좀 일찍 안 깨우고 뭐 했대? 머리도 못 말겠네!"

 학교에서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롤을 찾던 중 재희는 문득 이 방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핑크색 화려한 이불과 좋아하는 아이돌 얼굴이 프린팅 된 쿠션, 인형뽑기로 하나 둘 모은 아기자기한 인형들은 온데간데 없이, 촌스러운 고동색 프레임에 다 낡아빠진 이불 쪼가리가 있었다. 한 쪽 벽면 가득히 붙여놓았던 아이돌의 포스터는 삭막하게까지 느껴지는 회색빛 벽지가 대신하고 있었다. 

"뭐야...? 여기 어디야? 엄마...?"

 갑작스런 불안감이 엄습했다. 재희는 좀처럼 진정하지 않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러다 책상 위에 놓인 핑크색 파우치를 발견했다. 재희가 늘상 지니고 다니는 보물과 같은 소중한 물건이었다. 재희는 다행히 이건 챙겼나보네, 하고 안심했다가 닫힌 방문 너머로 들리는 남성의 가래 끓는 기침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귀에 거슬릴 정도로 크게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린 나무문 사이로 재희는 두려움을 안고 밖을 훑어보았다. 거실은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너저분한 쓰레기와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훅 하고 올라오는 악취에 재희는 코를 막고는 거실로 쭈뼛쭈뼛 향했다. 산같이 쌓인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담배연기가 그득히 올라왔다. 6~70대 정도로 보이는 한 남성이 앉아있었는데, 얼굴이 괴랄하고 이마와 미간에 잡힌 주름이 기괴스러울만큼 끔찍했다. 

"뭐야? 아직 학교 안 갔냐?"

 가래 섞인 걸걸한 목소리에 그녀는 흠칫 놀라서 하마터면 주저 앉을뻔했다. 처음보는 남성이 마치 재희를 잘 알고 있는 양 말을 걸었고 재희는 무어라 답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저..."
"저년이 대답도 안하네? 너도 내가 우습냐?"
"네? 그게 무슨..."

 다 늘어진 메리아스를 입은 남자가 갑작스레 표독스런 눈빛으로 재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소름이 돋은 재희는 자꾸만 엄습하는 불안감에 현관을 향해 한발짝 씩 걸어갔다. 남자는 어쭈?하고 재희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더니 눈 깜짝할 새에 재희에게 달겨들어 그녀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이런 X년이...!"

 악, 악! 하고 짧은 비명을 지르는 재희를 향해 무자비한 주먹이 날라들었다. 재희는 엄청난 충격과 공포에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다가 저항해보려 했으나 곧바로 날아오는 두터운 손에 뺨을 맞았다. 재희는 본능적으로 몸을 옹송그려 바닥에 엎드린 채 살려달라고 울부짖었고, 남자는 화풀이하듯 발길질로 재희의 등을 몇차례 걷어차더니 앉아있던 자리로 되돌아가 TV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재희는 덜덜 떨리는 몸을 스스로 끌어안고 서툰 손으로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익숙했다. 아, 여기 어딘지 알고 있어. 학교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야. 근데 내가 왜 여기에서 잔 거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어제 밤에 무슨 일이 있었지? 기억이 잘 안나...

 재희는 혼란스러웠다. 다정하게 웃어주던 부모님 얼굴이 떠 올라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찾았으나 이내 방 안에 핸드폰과 파우치를 두고 온 것을 떠올렸다. 녹이 슨 철문을 멀찍이 바라보던 재희는 차마 다시 들어갈 용기가 없었는지 고개를 떨구었다. 

"괜찮아... 부모님하고 같이..경찰하고 같이 와서 찾아오면 돼."

 혼자 중얼거리던 재희는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흘끗거렸다. 한껏 헝크러진 머리와 선명한 손자국들이 그들의 눈에 오르내렸다. 재희는 혼돈과 충격 때문에 주변의 시선에 신경을 쓸 여를이 없었다. 걸어가는 동안 재희의 머릿 속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에 대해 여러 생각들이 오가고 있었다. 






"엄마아-!! 엄마! 나야, 재희!"

쾅쾅, 힘껏 두들겨봐도 반대편은 고요하기만 했다. 재희는 십여분을 손이 새빨개지도록 문을 두드리다가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어제 먹은 음료수가 잘못 된걸까? 누군가 나를 납치한걸까? 내가 외박을 해서 엄마가 없는 척 하는걸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그 아저씬 대체 왜 나를 때린거야?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재희의 우렁찬 울음소리 사이로 끼익, 하고 옆집 문이 열렸다. 처음보는 아주머니가 나오더니 학생,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우리 아이가 겨우 잠들었으니 좀 조용히 해줘, 라고 요청했다. 재희는 민망한 기분이 들어 울음을 참으려 했고 아주머니는 정신병자를 보듯이 동정과 불안함이 섞인 눈으로 재희를 지켜보다가 들어갔다.

재희는 코를 훌쩍이며 올라오는 울음을 달래고 꾹 참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학교로 향했다.





학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충격이었다. 수업이 시작한 학교는 적막 속에 선생님들의 목소리만 들렸고, 들키지 않게 조심스레 반을 기웃거리던 재희는 교실 안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맨 뒷켠에 앉아 친한 친구들과 핸드폰 게임을 하며 시시덕 거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자기자신이었다. 중학교 시절 남자친구에게 선물 받았던 분홍색 머리띠와 교복 위에 걸친 제일 좋아하는 나이키 점퍼는 내것이 분명했다. 까르르 웃는 모습도, 목소리도, 눈빛도 모두 재희 자신이었다.

이럴리가 없어, 쟤는 누구야...? 대체 뭐지...?! 이게 무슨 상황이야? 저건 나잖아...! 

엄청난 충격에 사고회로가 정지한 채로 가만히 서 있던 재희의 뒷통수에 싸르르한 고통이 날아들었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악! 하고 움츠린 자세를 취했고, 둥그렇게 말린 종이를 들고 있던 이 선생은 지나치게 방어적인 재희의 행동에 당황스런 모습을 하다가 장난스레 씨익 웃음 지었다.

"요녀석! 연기가 아주 여우주연감이네! 너 가방 없으면 모를 줄 알았냐? 지각해서 이제왔지? 
 얼래? 꼴은 또 왜이래? 너... 누구한테 맞았니?"

사뭇 진지한 표정의 이 선생은 재희의 얼굴과 팔, 다리 등 군데군데 붉게 부어오른 자국을 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재희는 익숙한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보자 긴장이 풀렸는지 다시금 방울방울 눈물을 흘렸다. 이 선생은 재희에게 무언가 사연이 있을거라 여겼는지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재희를 보건실로 데려갔다.

"어, 이 선생님! 메시지 날렸는데. 저 지금 출장 가야해요, 늦었는데... 애 많이 다쳤나요? 어머, 너 맞았니?"
"아, 괜찮아요, 선생님. 제가 상처 치료할게요. 먼저 가 보세요."
"고마워요, 저기 냉동실에 아이스팩 있거든요. 이 수건으로 싸서 얘 볼에 대 주세요. 그리고 소독약이랑 연고 여기 놓을게요.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 주세요! 미안해요!"

이 선생은 보건선생의 지시에 따라 수건에 싼 아이스 팩을 재희에게 건네 주었다. 재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부어오른 볼에 아이스팩을 갖다 대었다. 차갑지만 시원했다. 여기저기에 난 생채기를 이 선생이 소독해 주었고, 재희는 따끔거리는지 아야, 아야, 아프다구요. 하고 볼멘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니 대체?"

걱정스런 표정으로 재희를 바라보는 이 선생에게, 재희는 망설이듯 작게 저.. 그게 말이죠. 운을 띄우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쳤다는 말 외에는 달리 나올 말이 없을 거다. 제가.. 복제됐어요? 저..저랑 똑같은 사람이 있어요? 아침에 눈 떠보니 누군가의 집에서 깨어났고, 거기 있던 남자한테 얻어맞았어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는 재희의 목구멍에 여러 말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누가 이런거니..?"
"선생님. 저..."
"응, 윤지야."
"....네?"
"응?"
"윤..지요? 우리 반 박윤지?"
"어?"
"무슨 소리하시는 거에요, 선생님. 방금 저보고 윤지라고...?"
"...응? 그럼 윤지를 윤지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뭐, 하루 사이에 이름이라도 바꿨어?"

재희는 무척이나 당황한 눈으로 이 선생을 쳐다보았다. 이 쯤 되면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이 이상하게 바뀐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이 선생은 보건실 한 켠에 세워져 있던 전신 거울을 재희 앞에 가져다 놓았다. 

"!!"

그 거울 안에는 박윤지가 있었다. 키가 작고, 덮수룩한 머리에 음침한 구석이 있어서 아이들 모두의 놀림감이 되었던 그 박윤지가. 재희는 믿어지지가 않는지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머리를 잡아당겨보는 둥 극도로 당황해 했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 선생이 조심스레 말을 건냈다.

"윤지야. 무슨 일이 있었는 진 모르겠지만... 안그래도 너가 학교도 자주 빠지고 해서 선생님이 늘 걱정 많이 해.
집에 무슨 일 있는거니? 선생님이 부모님 한번 찾아뵈도 될까?"

이 선생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재희는 계속해서 거울을 붙들고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만졌다. 볼을 쭈욱 잡아 당겨 보기도 하고 가면을 벗으려는 듯 턱 밑을 박박 긁어댔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재희의 턱 언저리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이 선생은 하지말라며 재희의 팔을 잡아 세웠고, 재희는 실성한 듯한 눈빛으로 놓으라고 비명을 지르더니 이 선생을 힘껏 밀치고는 보건실을 뛰쳐 나갔다. 

"윤지야!"

황급히 보건실 밖으로 나간 이 선생의 눈에 저 멀리 달려가는 재희의 모습이 보였다.





석양이 지는 학교의 풍경. 재희는 여러명의 친구에게 둘러 싸여 신나게 웃고 있는 '재희' 자신을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재희가 아냐. 걔는 윤지란 말야. 너희는 날 알아보지도 못하는거니? 재희는 배신감과 분노에 휩싸여 무작정 그들에게 돌진했다. 그리고는 '재희'의 핑크색 머리띠를 휙 낚아 챘다. 

"악! 뭐야!"
"뭐야, 저거 박윤지잖아? 왜 저래? 미쳤나?"
"야! 돌려줘!"

재희는 아침에 보았던 남자의 표독스런 눈빛 못지않게 무척 독살스런 눈빛으로 '재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 눈빛에 움찔하더니 이내 화가난 듯 재희의 손에 들려 있던 핑크색 머리띠를 빼앗으려 했다. 

"야! 박윤지! 너 지금 뭐하는거야? 빨리 내 머리띠 돌려줘!"
"누구보고 박윤지래?! 박윤지는 너잖아! 무슨 수작을 부린거야 대체? 내 몸을 어떻게 한거야?!!"

재희는 악다구를 쓰며 소리쳤고 '재희'와 주변 일행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쟤 정신이 나갔나보다. 너 미쳤냐? 박윤지!"
"..나는 박윤지가 아니라고! 난 정재희라고! 정재희! 니들 친구 정재희야! 쟤가 박윤지라니까!"
"세상에...."
"어머.."

소란이 일자 주변에 학생들이 둥그렇게 모여 이 광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재희는 비명에 가까운 악을 질러가며 내가 정재희야! 내가 정재희라고! 라는 말만 반복해서 외쳤다. 몇몇 학생들은 광기에 사로잡힌듯한 재희의 모습에 혐오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불똥이 튈까 두려웠던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재희'의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기가 막혀, 야, 그냥 가자! 라고 말하고선 '재희'를 구출해가듯이 재희에게서 멀어져갔다. 눈 앞에서 '재희'가 사라졌음에도 재희의 악은 멈추지를 않았다.

내가 정재희야! 내가 정재희라고!!!! 

재희는 '재희' 일행이 교문에 다다라서야 그녀를 돌아보았고, 마침 재희를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에 떠오른 미묘한 안도감과 승자의 미소를 캐치하고선 분노에 치를 떨었다. 역시..내가 맞았어! 저년이..박윤지 저 년이 이런 일을 꾸민거야..!!! 재희는 확신했다.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배신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눈시울이 벌개졌다.





다음날 학교는 온통 박윤지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다. 직접적으로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아이는 없었지만,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 때문인지 어느 누구도 선뜻 다가가는 사람이 없어 박윤지는 늘 혼자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후로 실성을 했다느니, 위험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아이라느니 여러 소문들이 어제의 사건과 함께 교내를 떠돌았다.

"재희야! 너 괜찮아? 어제 너희 집에 걔가 찾아왔다며?"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 여자아이의 말에 '재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지난 밤에 있었던 끔찍한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기대하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선뜻 저버리기도 힘들었다. '재희'는 응, 정말 지랄발광을 하더라고. 하면서 운을 띄웠다.





"엄마! 나야, 엄마 딸 정재희! 문 좀 열어줘,응? 걘 가짜야...!! 내가 진짜 엄마딸이라구!"

새끼손가락과 손날이 무감각해질정도로 수도 없이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조심스런 인기척만 들리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재희는 절망스런 표정으로 무너져갔다. 너무 목놓아 울어 이제는 목이 다 쉬어버렸다. 그래도 가족은 알아줄거라는 일말의 기대 속에 집을 재차 방문했지만 이미 그 곳은 절대 열리지 않는 철옹성이 되어 있었다. 

"엄마... 엄마는 나 알아봐야지. 걔는 박윤지라니까.. ? 내가 정재희라고!! 왜 몰라, 왜! 왜!!!"

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재희'는 두려운 듯 가족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릴때마다 몸을 떨었다. 재희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아파트 전체에 울렸고, 아빠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경찰에 전활하고 있었다.

"재희야, 어쩜... 이게 무슨 일이래니?"
"나도 모르겠어, 엄마. 안 그래도 평소에도 좀 이상한 애였는데.. 나 너무 무서워, 엄마."

바들바들 떠는 딸이 안쓰러운지 엄마와 아빠는 '재희'의 손을 꼭 붙잡고 껴안았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마냥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는 저 애를 어서 빨리 누군가가 데려갔으면 했다. 관리실에서 5번째 인터폰이 울렸다. 아빠가 난처한 목소리로 사정을 호소하고 경찰을 불렀으니 곧 진정될 거라 얘기하니, 관리실에서는 꺼름칙해 하지만 수긍하는 듯 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재희는 제정신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도 울어서 부어오른 눈과 여기저기 붙어있는 반창고, 산발한 머리에 쇳소리로 '난 정재희라고..'를 쉴새없이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정상인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경찰관은 혀를 쯧 차더니 다른 경찰관에게 재희를 지켜보라 말하고 문을 두드렸다. 경찰입니다, 잠시 확인할 게 있어서요, 하는 말에 문은 너무도 쉽게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두려움과 분노에 찬 세 명의 눈빛이 재희를 일제히 노려보고 있었다. 재희는 '재희'와 엄마가 붙잡은 서로의 손을 목격했고, 이내 이성을 잃은 듯 악소리를 지르며 문 안으로 달려들었다. 

경찰관이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재희는 순식간에 집안으로 들어서서 엄마에게서 '재희'를 우악스럽게 떼어놓고는 울부짖었다. 우리 엄마야 하고 우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공포영화에 나올법한 광기어린 모습이었다. 그만큼 재희는 절박했다. 모습이 바뀌어버린 지금, 내 엄마와 아빠를 빼앗길 거란 생각에 너무나도 무서웠다.

재희는 차가운 복도 바닥에 경찰에게 제압된 채로 엎드려 있었고, 엄마와 아빠는 그 처참한 광경을 걱정스레 지켜보았다. 그 둘의 뒤에서 '재희'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 채 재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재희는 '재희'가 미소를 짓는걸 보았고, 의심은 확신이 되어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욕설과 함께 '재희'를 향해 울부짖었다. 그러자 엄마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재희의 근처로 다가와 말했다.

"학생... 집에 돌아가. 부모님이 걱정하셔. 학생은 내 딸 재희가 아니야."





술병을 든 남자와 함께 경찰서를 나오는 재희. 초점 없는 그녀의 눈에 남자의 독기에 찬 얼굴이 보인다. 반 강제로 구역질나는 쓰레기 장에 끌려온 재희는 아침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흠씬 뚜드려 맞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픔이 느껴지지도, 악소리가 나지도 않았다. 마치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마음속은 너무도 고요했다. 

성에 찬건지 더 이상은 주먹이 아픈건지 남자가 이내 집을 나갔고, 재희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아침에 눈을 떴던 방 안으로 향했다. 잿빛 벽지와 낡은 가구에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누더기같은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재희는 숨죽여 흐느꼈다. 오늘만해도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딩동"

갑작스런 소리에 재희는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아침에 두고갔던 핸드폰과 파우치가 있었다. 그것들을 보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지만 고개를 홰홰 돌려 핸드폰을 확인했다.

-박윤지님, 정기 검진날입니다.  ㅇㅇ 대학병원 신경정신과 XXX -

재희는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어느새 핸드폰까지 바꿔간거야, 치밀한 년. 그녀는 웃으며 낮게 읊조렸다. 그리고는 핑크색 파우치 안에 들어있던 약통을 비워내고 품 안에서 조심스레 꺼낸 분홍색 머리띠를 썼다. 재희는 손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거울 안엔 영락없는 재희가 있었다. 그래, 나, 정재희 맞잖아. 이게 나야.





"세상에... 그래서? 경찰이 끌고 간 다음엔?"
"그리고는 뭐, 난 모르지. 좀 소름끼쳐서 엄마아빠하고 거실에서 같이 잤어."
"대박이다.. 걔 그때 한창 막 너 따라하지 않았어? 조별숙제 하러 너희집 갔다가 니꺼 보고 너랑 같은 파우치도 사고 막 그랬잖아.
 지금 생각해보니 완전 소름돋아, 어으!"

오한이 드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친구들의 귀에 교무실로부터 달려오는 재희의 발걸음 소리가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처음 써보는 글이라 어색하네요. 이야기를 풀어쓴다는 건 참 어려운것 같아요.ㅠ
무언가 기대하던 방향과 달리 급박하게 마무리지었습니다 ㅠㅠ 으앙
반전을 주려 했는데 그냥 초장부터 너무 티나네용 ㅠㅠ힝힝
글 잘쓰시는 분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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