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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선과 사선에 관한 두서없는 간략한 소개 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86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3
조회수 : 2140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4/11/02 23:33:25
200942115352998.jpg

선박의_역사(1).jpg


사선沙船의 경우 그 분류 방법에 있어 세키부네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특정한 크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큰 것은 30m 정도이며 중형 역시 왠만한 판옥선 보다 큰게 사실입니다, 반대로 작은 것은 아래의 호선과도 자웅을 겨룰 정도로 작습니다, 다만 대형 사선이 임진왜란에 참여했는가는 다른 이야기로 앞서 기록을 본다면 당시 참여한 명나라의 주력은 호선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아래에서 하기로 하고 아무튼 이 사선이라는 배는 사실 당대에 새로 개발되거나 군선으로서 시작된 배는 아닙니다,

이름이 계속 다르게 불리워 졌지만 당나라 시절 부터 상선과 조운선으로 사용되던 선박으로 이후에 첫번째 사진에서 볼수 있듯 청나라 말엽을 거쳐 지금까지도 정크선 등으로 계보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선으로서 개발되어진 판옥선 등과 비교하기에는 그 길이나 물자의 수송량을 제한다면 단층 구조나 부족한 화력등 크게 이점을 가질만한 부분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구태여 이점을 찾자면 백병전에서 좀 더 낫다거나, 지휘를 하기에 용이하다는 것 정도이겠지요.

명나라의_호선_명나라의_호선은_갑판이_단층_구조이며_선수의_옆부분이_오늘날_배의_옆모습과_같다..jpg


이에 반하여 팔라호선叭喇號船 혹은 호선號船 이라 하는 선박은 명나라 시절 철저하게 왜구의 동란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개발된 조선의 판옥선과 같은 부류의 병선입니다, 다만 고려 말엽부터 왜구의 동란 등에 대한 대응책으로 실시되어온 화약 무기의 발전이라는 흐름에 편승하며 근접전을 철저하게 회피하는 교리를 채택한 함선인 판옥선과 다르게 왜구의 기동성을 철저하게 담습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조선이나 명나라나 아니 그 이전에도 그랬지만 육전에서의 결전을 해답으로 삼고 있었고 사실 수군으로 뭘 해보겠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았고 또 불가능했던게 사실인터라 이러한 양 측의 교리의 분화는 이상할게 없고 어느 쪽이 낫네 모자르네 할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튼 이 호선이라는 배는 기존의 대복선이나 사선과 다르게 노를 주요한 엔진(....)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이에 따라 왜구의 그 것에 버금가는 경쾌한 기동성을 자랑하는 터라 명나라 수군의 주력이 되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연근해에서의 해전이 주류가 되었던 복잡한 해안선을 자랑하는 남해안 일대에 파병된 병선은 호선일수 밖에 없는데 가령 기록을 보더라도

선조 31년 

급사 도감(給事都監)이 아뢰기를, 

“통관(通官) 조안인(趙安仁)으로 하여금 급사를 뵙고, 보고하기를 ‘서로(西路)에서 사망한 군사의 숫자를 전일 하문(下問)하였는데, 소인이 확실히 알지 못하여 답하지 못했다. 지금 들으니 육군으로서 죽은 자는 2백여 명이고 부상한 자는 6백여 명이라고 한다.’ 하니, 급사가 ‘각 군대의 사망한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고 하자 ‘전일 보고한 패선(敗船) 23척 이외에는 듣지 못했다.’ 하고, 또 묻기를 ‘한 척의 배에 몇 사람을 실을 수 있는가?’ 하자 ‘각 선마다 30여 명을 실을 수 있다.’ 하니, 급사가 ‘큰 배 2척은 각각 1백여 명을 실었고 그 밖에는 30여 명이나 40여 명을 실었으니 이렇게 계산하면 약 8백∼9백 명에 이른다.’ 하였습니다. 

안인(安仁)이 ‘그 숫자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대개 당초 접전 할 때 육군이 만약 구원했다면 전공(戰功)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 도독이 매우 속상해 할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도 몹시 통분하게 여긴다. 도독은 지금까지 해상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힘껏 싸우고 있으니 만약 이때에 육군이 협공(夾攻)한다면 성사할 수 있다.’ 하니, 급사가 ‘도독은 좋은 사람이다. 내가 군문에게 힘써 권하여 장려(奬勵)하겠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중로(中路)에서 사망한 군사가 얼마나 되는가?’ 하기에 ‘전에 이미 보고하였으나 다만 상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급사가 말하기를 ‘사망한 자가 7천여 명이라고 한다. 동로(東路)에서 사망한 군사는 얼마나 되는가?’ 하자, ‘역시 확실히 알 수 없다.’ 하니, 급사가 ‘3로에서 사망한 숫자를 그대는 알아보아 기록해 가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렇습니다, 명나라 수군에서 30-40명 정도가 탑승하는 병선은 호선밖에 없지요, 또한 사선 역시 대형이라 보기 어려운게 대형 사선의 경우 중국 선박의 특징상 크기에 비례하여 돛이 늘어나는 만큼 바람을 잘 탄다면 속도에 잇점을 가질수 있습니다만 반대로 남해안과 같은 지형에서는 어려움을 겪기 마련입니다, 무엇보다 대형 사선이라고 보기에 기록의 그 것은 탑승 인원이 적은데다 다른 기록에 묘사되어 있는 바도 대형 사선과는 좀 다릅니다.

선조 32년 

이덕형이 아뢰기를, “18일에 이순신(李舜臣)이 진린에게 말하기를 ‘적의 구원병이 수일 내에 당도할 것이니 나는 먼저 가서 요격하겠다.’ 하니, 진린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순신은 듣지 않고 요격하기로 결정하고서 나팔을 불며 배를 몰아가자 진린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는데, 중국 배는 선체가 작은데다 뒤쪽에 있으므로 그저 성세(聲勢)만 보였을 뿐이고 등자룡(鄧子龍)과 진인 두 사람이 판옥선(板屋船)을 타고 가서 싸웠다고 합니다.”


따라서 소수의 중 소형 사선에 다수의 호선이 배비되었다는 추측이 좀 더 신뢰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개인 화력의 투사가 매우 중요하였던 해전을 생각한다면 탑승자에 대한 방비가 부족한 호선이 전력으로서 큰 가치를 가질수 없는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 참전한 숫자 등을 볼때 단적으로 해전의 전황에 있어 별 도움이 안되었다 볼수가 있습니다, 

비단 조선의 판옥선과 같은 백병전에 대한 회피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단지 왜구들의 그 것과 같은 경쾌한 기동성을 주 무기로 삼는 터라 여러모로 참 난감한 노릇일수 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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