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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환, 난(蘭)
휘어진 칼이다
허공에 던져진
눈썹 몇 금이다
비늘이 푸른
단선율의 여운이다
무반주의 시간에 대있는
서늘한 피리소리다
김혜순, 여름 나무
식지 않는 욕망처럼
여름 태양은 지지 않는다
다만 어두운 문 뒤에서
잠시 쉴 뿐 서산을 넘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못다 끓은 치정처럼
몸속에서 종기가 곪는다
날마다 몸이 무거워진다
밥을 먹을 수도 돌아누울 수도 없을 만큼
고름 공기로 몸이 꽉 찬다
한시도 태양은 지지 않고
한시도 보고 싶음은 지워지지 않고
한시도 끓는 땅은 내 발을 놓지 않고
그리고 다시 참을 수 없는 분노처럼
내 온몸으로
붉은 혹들이 주렁주렁 열린다
신경림, 길음시장
여기는 서울이 아니다
팔도 각 고장에서 못살고 쫓겨온
뜨내기들이 모여들어 좌판을 벌인 장거리
예삿날인데도 건어물전 앞에서는 한낮에
윷이냐 샅이냐 윷놀이판이 벌어지고
경로당 마당에서는 삼채굿 가락의
좌도 농악이 흥을 돋운다
생선장수 아낙네들은 덩달아 두레삼도 삼고
늙은 씨름꾼은 꽃나부춤에 신명을 푸는데
텔레비전에서 연속극이라도 시작되면
일 나간 아낙들이 돌아올 시간이라면서
미지기로 놀던 상쇠도 중쇠도 빠지고
싸구려 소리가 높아지면서
길음시장은 비로소 서울이 된다
정일근, 신문지 밥상
더러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가 있는데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꼭 밥상 펴라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신문지가 무슨 밥상이냐며 궁시렁 궁시렁 하는데요
신문질 신문지로 깔면 신문지 깔고 밥 먹고요
신문질 밥상으로 펴면 밥상 차려 밥 먹는다고요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어머니 또 한 말씀 가르쳐 주시는데요
해방 후 소학교 2학년이 최종학력이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말씀 철학
정철훈, 저물녘 논두렁
하루도 이틀도 심심한 비가 내리네
장성 갈재를 넘어서면
갈맷빛 부동산 아래
고물거리는 사람들
순한 얼굴에 웬 슬픔은 일렁여
지난밤에 모두 안녕하신가
깊은 속내는 가슴에 묻은 채
꽁초를 빨고 소주를 들이켜고
실없이 코를 벌름이는가
오늘 넋두리 같은 가랑비는
울어도 울어도 가난했던 농촌을 적셔
온통 고향 생각뿐
용케 빗줄기가 굵구나
저물녘 논두렁을 지나면
무엇이 세상을 견디는지
지금은 돌아간 사람처럼
풀잎 하나에도 머뭇머뭇
하루도 이틀도 심심한 비가 내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