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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panic_907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강성훈
추천 : 24
조회수 : 1595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6/09/17 02:09:58
그날은 유독 안개가 심했다.
사람들은 혹시나 뜰지도 모를 배를 타기 위해 대합실을 서성이고 있었고
나 역시 커다란 짐 트렁크 위에 걸터 앉은채
초조한 얼굴로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만월도 8시30분 출항대기중 ]
오늘 배가 뜨지 않으면 또 하루를 기다려야 한다.
제발 안개가 걷혔으면. 그래서 배를 탔으면.
[ 만월도 8시30분 개찰중 ]
전광판의 메세지가 바뀌었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짐을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인파들 틈에 섞여 출항을 서둘렀다.
그때 보드랍고 가느다란 손이 내 손목을 덥썩 잡았다.
"저기요!"
뒤를 돌아보자 긴 생머리의 여자가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
잠긴 목에서 칼칼한 쇳소리가 났다.
여자는 목소리에 놀란듯이 쥐었던 내 손목을 놓고는 횡설수설 말했다.
"아, 저기, 제가 만월도 가려는데 탑승구가 어디죠?"
나는 턱짓으로 탑승구를 가리켰다.
여자는 탑승구 쪽에는 눈길조차 주지않고 내 얼굴을 보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했다.
이대로 그냥 지나갈 법도 한데 계속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뻘쭘함을 피하기 위해 한 마디 내뱉었다.
"그쪽도 만월도 가시나봐요?"
"네, 네.., 달이 참 크고 밝은 곳이죠."
질문과 약간 동떨어진 대답. 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계속 안절부절 못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다지 예감이 좋지 않아서 대화를 끊기로 했다.
"네, 좋은 여행 되세요."
나는 짐트렁크를 끌고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등뒤에서 여자의 아..하는 외마디 탄식이 들려왔다.
배에 탑승해서 적재칸에 트렁크를 실었다.
[ 나-35 ]
표에 찍힌 자리표를 확인하고 좌석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에요 여기!"
멀리 의자에서 아까의 그 여자가 나를 향해 외쳤다.
다른 일행을 부르는 건가 싶어서 내 뒤를 둘러보았지만
여자는 분명 나를 똑바로 보고 손짓했다.
"여기 앉으세요!"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무시하고 내 자리를 찾아갔다.
가 열, 나 열, 5, 10, 15, 20, 25, 30...
그녀의 자리는 [ 나-34 ] 내 자리 옆이었다.
"여기가 제 자리인 건 어떻게 아셨죠?"
"아, 아.. 그.. 표!! 맞아요, 아까 여쭤볼 때 표를 봤어요!"
여자가 힘겹게 웃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손에 구겨쥐고 있었던 표의 좌석을 보았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딱히 다른 수단이 없었다.
표를 봤다고 믿는 수밖에 없나.
내 찜찜한 표정을 눈치챘는지,
여자는 자기 가방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이야기 하면서 가요~"
"어, 김맛 연근깡이네요. 호불호 갈리는 과자인데."
"네네, 맞아요, 저도 좋아해요, 연근깡."
여자가 내민 우유홍차 역시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였다.
영감탱이 같다고 불리는 과자 입맛이기에
좀처럼 나와 비슷한 취향을 찾기 힘든 편이다.
여자는 연근깡을 뜯어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먹어도 될지 망설였지만 속는셈 치고 먹기로 했다.
손으로 집어든 연근깡을 입안에 넣었다.
그 바삭함, 그 고소한 김가루, 담담하면서도 기름진 연근깡의 향기가 내 입맛을 일깨웠다.
내 기분도 다소 누그러졌다.
나는 음료수 캔을 따며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만월도에는 왜 가시는 거죠?"
"아,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원래 갈때는 목적이 있었을 텐데.. 지금은 잊어버렸어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잠깐 어두웠던 여자의 얼굴이 다시 활기차게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씩씩하게 웃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우유홍차를 한모금 마시고 말을 꺼냈다.
"제가 왜 가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세요?"
여자는 네? 하고 잠시 당황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러네요, 물을 생각을 못했네. 오빠는 왜 가세요?"
"노안이라고 오빠라 단정 짓는 건가요? 이거 섭섭한데요."
"어어, 그런건 아니에요. 그냥 오빠 같아서요."
"저는 스물 다섯인데 그쪽은요?"
"저는 스물 셋이요."
"정말 오빠였네. 감이 참 좋으신 분이네."
여자는 별거 아닌 농담에도 밝게 웃었다.
왜인지 그모습이 좋았다.
여자는 적극적이고 한편으로는 어벙한 구석이 있었다.
싹싹하게 내 말에 빈틈없이 맞장구 치면서도
한편으로 내게 밉보일까봐 눈치보는듯한 면도 귀여웠다.
이상한 여자, 하지만 어딘가 끌리는 여자.
배를 타고 가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배가 선착장에 닿았다.
나는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시은씨 덕분에 안 지루하게 왔네요."
여자는 아쉬운 얼굴로 악수했다.
"이게 끝은 아니겠죠?"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갓 깨어난 알에서 어미 오리만을 쫒는 새끼오리처럼.
어미품을 떠나기 싫은 아기오리의 눈을 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툭툭 치듯 쓰다듬었다.
"인연이 된다면 또 만나겠죠."
오글거리는 표현인데도, 감동받은 얼굴이었다면 내 착각일까.
짐 트렁크를 찾아서 배에서 내렸다.
오랫만의 만월도, 짠내가 허파 깊숙이 치고 들어왔다.
트렁크를 잡아 끄는데 예의 그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손을 부여잡았다. 시은씨였다.
"저, 실은 제가 숙소를 못잡아서요. 좀 도와주시겠어요?"
"아.. 저희 사촌형이 운영하는 펜션이 있긴 한데.. 물어봐드릴까요?"
"그래주시면 정말 좋죠!"
나는 흔쾌히 전화를 걸어 사촌형에게 남는 방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대답은 깔끔했다. 남는 방이 없었다.
"미안해요, 시은씨. 방이 없나봐요."
"저.. 그럼 오빠 방에 저좀 재워주시면 안될까요?"
겁도 없는 여자.
과자에 잠시 풀렸던 경계심이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살아났다.
어쩌면 내 신체를 노리고 처음부터 조사하고 붙었을런지도.
이래서 페북에 시시콜콜 일기를 쓰는게 아니었는데.
"아뇨, 다른 곳을 알아보세요."
나는 트렁크를 잡아끌고 잽싸게 발걸음을 옮겼다.
손목을 잡히진 않았지만 찜찜한 기분이 내 뒷덜미를 잡았다.
과자와 음료수도 얻어먹고 즐겁게 배에서 내려놓고.
그래ㅡ 내 숙소를 같이 쓰진 않아도.
다른 숙소를 구하는 것쯤은 도와줘야하지 않을까.
"저기 시은.."
뒤돌아본 자리에,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대합실이다.
시계는 8시 10분.
[ 만월도 8시30분 출항대기중 ]
배가 뜨길 바라는 마음에 배가 뜨는 꿈이라도 꾼건가.
초조한 마음으로 전광판을 바라봤다.
그때 한 여자가 내 맞은편 대기석에 앉았다.
긴 생머리, 어딘가 익숙한 얼굴.
꿈? 꿈에서 본 여자와 많이 닮았다.
여자는 전광판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와 눈이 마주쳤다.
"죄송한데 탑승구가 어느 쪽이죠?"
기시감이 드는 질문.
나는 손으로 탑승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쪽에서 타시면 됩니다."
여자는 내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탑승구 위치를 확인하고는 내게 감사하다며 목례를 했다.
그리고 그뿐, 조용히 팜플렛을 꺼내서 유심히 읽고 있다.
본듯한 눈매, 들어본 목소리, 우연이라기엔 지나친.
여자는 전광판을 보기위해 고개를 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 시선이 기분 나쁜듯 고개를 돌렸다.
꿈과 여자, 그 생각에 젖어 전광판이 바뀐줄도 몰랐다.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보고서야 출항이 허가된 걸 알았다.
나는 짐트렁크를 이끌고 탑승대기열에 섰다.
여자는 내 바로 뒤에 줄을 섰다.
나는 여자를 흘깃흘깃 훔쳐보다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쪽도 만월도 가시나봐요?"
여자는 잠시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보더니
그쪽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무안해진 나는 혼자 고갯짓으로 인사를 했다.
"좋은 여행 되세요."
그래, 단순한 우연일테지.
배에 탑승해서 트렁크를 적재칸에 싣고 표를 확인했다.
[ 나-35 ]
가 열, 나 열, 5, 10, 15, 20, 25, 30...
놀랍게도 아까의 그 여자가 34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여자를 나를 보고 잠시 놀라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꿈에서의 내 표정이 아마도 저랬을까.
여자는 가방을 부시럭거리더니 과자와 음료수를 꺼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반갑게 외쳤다.
"어, 김맛 연근깡이네요. 호불호 갈리는 과자인데."
여자는 성가시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래 감자깡을 사려고 한건데 봉지가 비슷해서 잘못 고른거에요. 혹시 좋아하세요? 드실래요?"
여자는 봉지채로 과자를 줬다.
그리고 가방에서 음료수를 꺼냈다. 우유홍차였다.
"이것도 드세요. 숙소 냉장고 있던거라 챙겨오긴 했는데 제 취향은 아니라서..."
여자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음료수 캔을 따며 여자에게 물었다.
"만월도에는 왜 가시는 거죠?"
"남자친구가 해병대거든요. 면회가는 거에요."
"아..."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는 적적함을 깨려 말을 이었다.
"제가 왜 가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세요?"
".....아저씨는 왜 가요?"
"아저씨라니.. 내가 아무리 노안이라지만 아저씨는 아닌데."
"저보단 나이 많으실 거 같은데요?"
"저는 스물 다섯인데 그쪽은요?"
"저는 스물 셋이요."
쎄한 느낌이 어깨를 타고 지나갔다.
하지만 꿈에서 본 여자, 비슷한 대화의 흐름.
물론 그것만으로도 내 호기심이 자극되기엔 충분했다.
여자가 퀴즈를 내면 귀신 같이 맞췄고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찾는지 단박에 알아낼 수 있었다.
처음에 경계하던 그녀도 내 이런 태도에 호의적이었다.
우리는 통성명을 했다. 그녀의 이름은 시은이었다.
이윽고 배가 내릴때가 되었다.
우리는 가볍게 악수하고 헤어졌다.
혹시 이대로라면.. 숙소는 괜찮을까?
나는 선착장에서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하고 서성였다.
멀리서 본 그녀는 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오르락 내리락 하더니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풀죽은 모습으로 부두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고 나도 모르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오빠 아직 안가셨어요?"
"네, 데릴러 올 사람 기다려야 해서요.."
"아, 오빠 나 이제 어떡해요. 진짜 황당하다.
예약했고 선입금으로 십 퍼센트 넣었으면 그게 예약 된거 아니에요?
나머지 입금 안해서 취소되서 딴사람 예약 받았다네..
그럼 딴방 있냐고 물었더니 방도 다 찼다고 그러고.."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 숙소가 없었을 줄이야.
예지몽이라도 꾼 느낌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 사촌형이 펜션하는데 거기 물어봐줄까요?"
"아 정말요? 그럼 고맙죠!"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방이 없었다.
아마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일거란 말도 추가됐다.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에게 용기내어 말을 꺼냈다.
"정 안 되면 제 숙소 같이 써도 괜찮아요."
저지르듯 내뱉은 말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처음본 남자랑 그래요."
하지만 내심 고민되는 듯 초조하게 입술을 뜯는다.
그녀는 내 폰을 달라고 손짓하더니 자기 번호를 찍기 시작했다.
"그럼 제가 일단 숙소 찾아보구.. 정말정말 정 안되면 신세 좀 질게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내 번호 저장해놔요."
자기 폰이 울리는 걸 확인한 그녀가 내 폰을 내 손에 꼭 쥐어주었다.
사람을 기다린다는 건 거짓말이다.
나는 그녀가 인파들 틈에 섞여 사라지는걸 보고 나서야 내 갈길을 갈 수 있었다.
밤 8시.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폰을 손에 들고 있다.
설마, 그녀는 꿈에서처럼 내 숙소를 같이 쓰자고 할까?
아니면 그건 단지 꿈이었을까?
나는 왜 꿈에 연연하고 있을까.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폰 너머에서 축 처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는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어..어. 숙소는 구했어요?"
'무슨 전화를 대기음도 없이 바로 받아요. 깜짝 놀랐네.'
조금의 웃음기. 하지만 곧바로 차분하게 가라앉는 목소리.
'숙소 정말 없더라구요. 죄송한데 거기 주소가 어떻게 되요?'
"여기 섬이라 이시간에 택시 안 다녀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거기 어딘지 알겠어요? 주변에 뭐 보여요?"
나는 잠바를 걸쳐입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사촌형의 차를 빌려 그녀를 데리러 갔다.
어디서 마셨는지 술에 취한 그녀는
눈물로 번진 까만 눈화장을 하고 길가에 앉아있었다.
"오빠 진자 죄송해요.. 웬만하면 혼자 해결하고 싶었는데 안되네.. 저 오늘 차였어요.. 이럴거면 오기전에 말해주지 마주보고 헤어져야 예의라면서 아니 그게 말이 되요? 내가 배 탄다고 이고생을 해가면서 헤어져야해요?"
콧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내가.. 내가 숙소도 없고 진짜 오늘 최악이다.. 모르는 남자한테 이런 부탁도 해야하고 나 너무.."
"됐고 일단 차에 타ㅡ 타서 이야기해요. 취했어."
옆좌석에 탄 그녀는 두번이나 차를 세워 오바이트를 했다.
섬이라 다니는 차는 없었고.
하늘의 별은 무심하게 반짝였고.
논두렁에는 풀벌레 소리가 귓가를 찌르르 울렸다.
나는 그녀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속을 비워낸 그녀가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내게 물었다.
"근데 오빠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요?"
글쎄ㅡ 꿈 때문이라면 믿을까.
"그냥, 신경쓰여서."
차이고 기분전환이 필요했던 그녀는 한동안 나와 섬을 여행하며 기분을 풀었다.
어차피 요양차 섬에 왔던 나는 넉넉한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서 좋았다.
사촌형은 처음부터 여자친구를 데려온 거라고 믿는 눈치지만.
그래놓고 사실 아무 사이 아니라며 거짓말 하는 거라고 믿는 눈치지만. 어찌됐든 좋았다.
나흘 뒤 그녀는 섬을 떠나며 내게 물었다.
"그럼 오빠는 언제 나와요?"
"한 달 정도 있을 거야."
"너무 오래 있는 거 아니에요? 뭐, 군대도 기다릴 생각하는 내가 한달 쯤이야~ 기다려줄 수 있지."
웃는 모습이 참 이뻤다.
그녀는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풀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섬 나오거든 꼭 연락해요~"
... 눈을 떴다.
시간은 8시 10분. 배는 출항대기중.
꿈에 이어서 꿈을 꾸다니. 머리가 지끈하게 아파왔다.
꿈치고는 너무나 길고 따뜻한 꿈.
혹시 모르는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ㅡ 꿈에서 본 그 여자.
여자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더니
종종걸음으로 와서 내 앞에 마주 앉았다.
"만월도 탑승구 아시죠?"
"네, 저쪽에서 타시면 되는데.."
손으로 가리키는 나도, 질문을 한 여자도.
탑승구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 순간 눈치챌 수 있었다. 그건 그냥 꿈이 아니었다는걸.
우리는 나란히 전광판을 바라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만월도 8시30분 개찰중 ]
전광판이 바뀌자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바뀌었네요."
"아, 가시죠."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일행이었다는 듯 함께 짐을 끌고 탑승구로 향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쪽도 만월도 가시나봐요."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채 나를 보더니
마치 장난을 주고 받는 어린아이처럼 씩 웃었다.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나는 밝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좋은 여행 되세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짐을 적재칸에 옮기는 걸 도와주었다.
우리는 함께 자리로 향했고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가방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꺼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김맛 연근깡.. 호불호가 갈리는 과자죠."
"전 계속 먹다보니 맛있더라고요."
그녀가 먼저 과자봉지를 내게 건내주었다.
그리고 우유홍차 캔을 꺼내더니 탁 하고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마신 캔을 내게 내밀었다.
"목이 타서 한 입 마셨는데, 그렇다고 안 마시진 않겠죠?"
"에이.. 저 그정도로 깔끔떨진 않아요."
그녀가 푸후 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내게 물었다.
"궁금한게 있는데 만월도에 왜 가세요?"
나는 음료수를 들이키고 잠시 생각을 곱씹었다.
그러고보니 꿈에서의 그 사흘동안 한번도
내가 섬으로 온 이유를 말하진 않았지.
"폐가 좀 안좋아서요. 요양하러 가는 거에요. 방학동안."
"아.. 그랬구나.."
나는 그녀가 섬으로 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왜 가는지는 안 물어보세요?"
"꼭 물어봐야되요?"
내가 되물었다. 그녀는 당황하더니 조그맣게 속삭였다.
"다..시 시작할까봐요."
"네?"
"아니에요! 아무것도! 빨리 물어봐줘요. 제가 왜 가는지."
"남자친구 면회라도 가나요?"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알고 있는 거죠, 그렇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정말 기쁜 얼굴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갑자기 내팔을 꼭 껴안았다.
따뜻한 온기. 꿈에서의 그녀같이 포근했다.
"우리 이번에는 꼭 같이 나가요.."
"나가다니요?"
내 질문에 그녀는 오히려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뭔가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해요?"
"말해도 되나.. 헤어지는 날까지 기억해요."
"어디서 헤어질 때요?"
"시은씨가 배 타고 나가는 날요."
"희망적인 대답이네요."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있다. 나는 내 팔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내렸다.
그리고 물었다.
"어떻게 된건지 설명해줘요. 왜 그런 꿈을 꾼건지."
"그건.. 꿈이 아니에요."
그녀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섬에서 떠나고 난 후, 나는 한동안 그녀와 문자와 전화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한달 뒤에 나온다더니 섬에서 나올 생각이 없더란다.
답답한 마음에 자기를 만나러 나오라고 닥달을 했더니
언젠가부턴 전화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버려졌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크게 상심했단다.
그녀는 나를 설득하러 다시 만월도에 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매몰차게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했단다.
"제가요? 왜요?"
"그건 저도 모르죠. 제가 좀 질리는 스타일인가봐요.."
그녀는 너무 억울했다고 그랬다.
처음 만났던 그날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같이 섬에서 나왔다면.
이렇게 혼자 애타지도 외롭지도 차이지도 않았겠지.
예전처럼 섬에서 술을 거하게 마셨지만
그녀를 돌봐줄 사람은 없었다.
술에 취해 발을 헛디딘건지 머리가 세게 부딛힌건지.
쿵하고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떠보니.
8시 10분의 대합실, 바로 그날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녀는 처음 나를 보자마자 "오빠!"하고 반가워했다.
그러자 나는 그녀를 정신 나간 여자 취급하면서 무시했다고 한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슬펐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고 했다.
하지만 선입견이 뭔지. 대화는 좀처럼 잘 이뤄지지 않았고.
배에 타기도 전에 두통이 오면서
가장 처음, 8시 10분의 선착장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러니까 특정한 말. 특정한 행동.
우리의 처음을 만들었던 아주 중요한 언행만큼은 꼭 있어야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는 거다.
"내가 해야할 첫 마디는 탑승구를 묻는 거였어요.
그걸 물어보지 않으면 배조차 탈 수 없었거든."
"그럼 내가 꾼 꿈은.. 다 진짜 있었던 일이란 말이에요?"
"있었던 일이라기엔 지금이 그순간인거 아닐까요?"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말은.
원하는 결말이 나올때까지 순간을 반복하고 있는 건가ㅡ?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말도 안돼. 이건 꿈이야."
"오빠.. 자리에 앉아요. 나 이제 너무 지쳐서 그만하고 싶어요. 나가고 싶어. 지금 가버리면 다시 반복된다구요."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난 이번이 고작 세번째 꿈인데?
"너.. 몇번이나 반복한 거야."
"나도 모르겠어요. 세다가 포기한지 오래됐으니까. 최소 오십번도 넘은거 같아."
그녀가 힘들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화가 치밀었다.
그럼 나도, 나도 이 꿈을 앞으로 반복하게 된다는 건가?
"그럼 네가 기억하는 나랑 만난 처음은 언젠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그때 정말 좋았죠."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오빠 이젠 솔직히 말해봐요. 나 배 타기 전부터 계속 나만 봤잖아요. 나한테 계속 먼저 말걸구. 나한테 오빠 숙소 오라고 끼부리구. 내 전화 기다리다 받은거 다 알아. 어쩜 걸자마자 받는거 보고 아~ 이오빠 나한테 확 꽂혔구나 바로 알았지."
"그거.. 난 그게 두번째였어."
"네?"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아파왔다.
어지러웠다. 배멀미가 온 거처럼 속이 메슥거렸다.
눈을 떴다.
아.
예감이 좋지 않아 시계를 본다. 8시 10분.
아. 씨.
전광판을 다급하게 바라본다.
[ 만월도 8시30분 출항대기중 ]
아. 씨발.
눈을 질끈 감는다. 꿈이라면 너무 지독하잖아.
제발 깨길 간절히 바라며 눈을 떴을 때.
눈앞에 그녀가 있었다.
" 오빠 !! "
갑자기 목덜미를 껴안기에 반사적으로 밀쳤다.
"오빠, 저.. 아.. 그렇구나."
"이 미친련아!!!"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대합실 사람들이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죄..죄송해요. 아는 사람인 줄 알고."
"아.. 너 무슨 짓을 한거야.. 진짜.. 너.. 넌 정말!"
미처 고함을 다 지르기도 전에
갑자기 편두통이 머리를 지긋이 눌러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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