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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등불
주렁주렁 열린 감
가을 오자 나무들 일제히 등불을
켜 들었다
제 갈 길 환히 밝히려
어떤 것은 높은 가지 끝에서 어떤 것은 또
낮은 줄기 밑동에서
저마다 치켜든
붉고 푸른 사과 등
밝고 노란 오렌지 등
보아라 나무들도
밤의 먼 여행을 떠나는 낙엽들을 위해선 이처럼
등불을 예비하지 않던가
민영, 겨울밤
겨울이 왔네
외등도 없는 골목길을
찹쌀떡 장수가
길게 지나가네
눈이 내리네
하재연, 세계의 느와르
내게로 온 불량한 목소리는
우연이었다
우리의 예산은 늘 빠듯하고
여자들은 조금 더 나쁘거나
남자들은 조금 덜 운이 좋았다
룰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불공평한 것들이 퍼즐처럼
맞아떨어지는 쾌감이 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은 어디에
라고 묻는다
시간은 빈 술병처럼
금세 비워져버렸는데
이장욱, 반대말들
오른쪽의 반대편이 사라질 때
먼 곳에서 나의 뒷모습을 보게 될 때
회색으로부터 검은 빛과 흰빛을 나눌 때
오늘의 반대말은 무슨 요일인가
너의 반대말은 누구인가
복잡한 예감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하지만 사랑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 칼을 만지작거린다면
밤이 점점 뾰족해진다면
한 그루의 부드러운 나무가
아가리를 벌린 채 자라난다면
의자는 책상의 먼 곳에서 타오르고
기린의 목이 점점 더 길어지고
나는 왜 조금씩 내가 아닌가
누가 내게서 자꾸 왼쪽을 가져가는가
내 오른쪽의 무한한 반대편을
김언, 시집
작곡하듯이 쓸 것
3차원의 문제도 4차원의 문제도 아닐 것
처음과 끝이 반드시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존재하지 않을 것
끝까지 듣게 할 것
시간이 아닐 것
어떻게 잡아챌 것인가. 그 종이의 다른 차원을
그 노래를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음악을 대할 것
소리 나는 대로 작곡하는 버릇을 버릴 것
어느 좌표에도 찍히지 않는 점이 불가능할 것
반드시 찍힌다는 신념을 의심하지 말 것
차원의 문제는 신념의 문제에서 비롯될 것
그 새벽의 전혀 다른 도시를 보여줄 것
어느 공간에서도 외롭지 않을 문장일 것
어느 시간대를 횡단하더라도 비명은 아닐 것
고함도 아닐 것. 그것은 확실히 음악일 것
작곡하듯이 되풀이할 것
음표를 지울 것
그리고 쓸 것
그것의 일부를 묶어 모조리 실패할 것
한 푼의 세금도 생각하지 말 것
오로지 쓸 것
한 명의 과학자를 움직일 것
백 명의 민중을 포기할 것
그 이상도 가능할 것
다른 문장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