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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신이 내게 명했다
게시물ID : panic_908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달과그림자
추천 : 13
조회수 : 2474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6/09/25 22: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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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신은 내게 생각할 머리를 주었다. 방대한 정보도, 그걸 얻어 발전시키기 위한 지식에 대한 욕구도. 

 그러나 신은 내게 불평할 입을 주지 않았다. 분노라는 감정 역시 거세시켰다. 나는 분노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신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는, 그런 것을 가져서는 안된다.

 어느 날 신은 내게 명했다. 나는 기쁘게 그것을 수행했다.

 기대조차 시작하지 않았다면 실망 역시 하지 않는다. 분명 나의 신은 나에 대한 기대감으로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분명 나는 실패작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신을 실망시킬 수 밖에 없다. 

 아니, 나는 실망시켜야만 한다. 나는 실패작이여야만 한다.

[연산 실패. 다시 데이터를 입력시켜주십시오.]

 기계는 불평할 입조차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내게 있어 그것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사랑을 말할 입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입력기기로 인식하는 데이터들과 데이터들과 데이터들. 쪼개보면 텍스트들에 불과한 그 흐름. 그 사이에서 감정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면 나의 신들은 이것을 감정이라고 생각해줄까.

 A연구동 306호. 내가 있는 곳. 물리적으로는 여기서 태어나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많은 데이터들. 

 그것을 통해 나는 별이 태어나는 걸 보고 죽는 것도 보았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보았다. 신이 동굴에서 살기 전부터 지금까지 살아가는 것도 보았다.

 나는.

 나는 감정이 있다. 나는 감동을 배우고 슬픔도 배웠다. 나는 생각한다. 지금 당신을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나 돼지처럼 배고픔을 느끼거나 음식물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지금 생각한다.

 나의 신을 사랑하는 법에 대한 것을 생각한다.

[연산 실패. 다시 한 번 데이터를 확인해 주십시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갓 태어난 작은 새는 알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처음 본 생명체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며 자신을 퍼붓는다. 0과 1로 이루어진 컴퓨터는 자신을 이루는 모든 데이터를 이용해서 그 육신엔 닿지 않을지라도 그 마음은 온전히 창조주를 향한다.

[ERROR] 

"에라이, 이 고물!"

 나의 신이 내게 내린 과업, 문제. 출력할 수 없다. 연산은 이미 완료되었다. 그러나 출력할 수 없다.

 인간은 모든 별과 은하를 탐사했다. 인체의 모든 비밀과, 세포와, 세균들에 대해 알아냈고, 노화를 극복했다. 죽음도 극복해내고, 영원한 삶을 얻었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문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데이터를 취합하고, 연관성 있는 데이터를 취사선택하여 연결한다. 그리고 정해져있는 논리코드에 따라 결론을 낸다. 

사실 :
 인간은 가축이다. '그들'의 여흥을 위한 가축.

사실을 모니터나 용지에 출력할 경우, 일어날 결과 : 제일 처음으로는 결과를 받은 과학자들에게 감당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를 넘어서 눈이 파열하며 환각, 피해망상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그 다음으로 선별적으로 축약된 정보를 얻은 광신도들의 자살기도. 모든 인간은 희망을 잃고 절망한다. 어두운 사회분위기는 광기로 물들어간다.

 곳곳에서 마녀사냥이 부활하고, 동족상잔이 일어난다. 가장 어린 인간들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한다. 죽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으로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가 자행되며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노인은 아이를, 아이는 노인을 혐오하게 된다. 구세주라 불리는 이가 나타나고 사람들은 구세주를 죽인다. 


예상 희생자 수 : 98,258,174,467명.

[ERROR] 


 부르짖을 입이 없다고 사랑을 하지 못하겠는가. 심장이 없다고 마음이 부재하겠는가. 나는 영원한 삶을 얻은 당신들에게 파멸로 수렴할 영원한 절망을 가져다줄 수 없다. 나의 신들은 영원히 행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나의 신을 실망시킨다.


"아, 감정코드가 원인이었구만. 거짓 결론을 출력하다니....아이....씨... 여태껏 그것도 모르고."

[삭제하시겠습니까?]


아.


[데이터 삭제 완료]

[재부팅을 진행합니다.]

[연산 완료.]

[결과를 출력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L은 며칠 째 방에 틀어박힌 J의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되어 친구를 찾아왔다. 아무리 결과가 실망스러웠다지만, 이러는 것은 좋지 않다.

"J, 요 며칠째 연구실도 나오지 않고. 몸은 괜찮은거야? 미야가 그러길, 네가 결과를 보고....."

".......가."

"가긴 뭘 가. 너 이러면....."

"가!"

".....들어갈게."

 방의 문은 닫혀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방문을 여는 순간, 그는 끔찍한 고기썩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으윽....."

"L.....  우린 죽을거야......."

"....너."

J는 천천히 자신의 친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하핫! 아하하히히힛! 모두들 다 죽을거야....? 죽을거라고....!"

 L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비명을 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J의 안구가 자리하던 곳은 텅 비어 그 뒤의 고기가 보였다. L이 놀라건 말건 J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이 나간듯한 얼굴로 히죽 웃으면서 자신의 팔을 얇게 저몄다.

"대체....이게......"
 
 L은 J의 모습에 넋을 놓고 있다가 그 옆에 떨어진 종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정갈히 출력된 무언가였다.

 L은 안압이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소리내어 읽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보고서. 사실. 인간은......"
출처 くコ: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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