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들은,
그 의미가 설명되어있지 않아도, 그것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들이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모든 글들이 필연적으로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모든 글들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가치있는 글들의 본질은 언제나 단어와 단어 사이에 숨어있다. 특히, 철학서들, 위대한 고전일수록 이 사실은 명백하다.
그 의미의 출처는 우리 자신으로 거슬러간다.
당신이 철학자들의 책을 펼쳤을 때, 이성과 논리가 아닌, 그자의
정신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책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 책을 비판하거나, 읽기를 그만두라고 권하고 싶다. 니체는 뛰어난 정신은, 스스로의 인식을 제한하는 본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나는 그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좌절을 느끼는 시대에 살고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시대의 다수의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것 자체로, 훌륭한 찬사를 받고있다고 믿는다. 이 글 또한 존재하지 않는 단 한사람에게 전하는 조언이다. 소크라테스와 공자는,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은, 왜 글을 남기지 않았을까? 플라톤은 왜 문자를 그토록 비판했던 것일까? 그들은 알고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하나하나의 결론이지만, 삶은 과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변화는 세계와 정신의 본질이다. 반면, 언어는 사물을 고정하려는 본성을 갖고있는 것 같다. 내 말은 단어와 문법과 진동하며 귓등을 때리는 의미들의 음파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또다른 이유는, 글쓰기가 만들어내는 허영심, 정확히는 남겨진 글이 만들어내는 허영심이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느꼈으며, 누군가는 이것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웃기는 이야기다. 어쨌든 나는 지금 글을 쓰고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글을 지웠다. 나는 이것이 문자화된 발화라도 되는듯 정당화했다. 물론, 이것은 자기기만이다. 임시적이고 비겁한 타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 그 타협을 그만둘까 한다. 피타고라스 학파에 처음 들어서는 입회자들은, 5년 간의 침묵서약을 맺는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이 기나긴 과정이, 수행자의 직관과 통찰력을 자극하고, 단단하고 질긴 나무줄기처럼,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수행의 과정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프루스트 비판이다. 혹은 프로이트 비판이다. 나도 오랫동안 마음 속에 담고있던 생각을 실천에 옮길까 한다. 나는 점점 시시해져 가는 세상에 권태를 느끼고, 저급한 미디어들 앞에 구역질을 느낀다. 무엇보다 그것들을 당나귀처럼 닮아가는 자신의 무력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 여러분의 짧은 여행에도 행운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