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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사랑과 진실된 사랑.
게시물ID : phil_101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널소유하겠어
추천 : 0
조회수 : 49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1/10 13:49:43

종속된, 구속된 사랑은 진실될 수 없다.
오직 자유로운 사랑만이 진실한 사랑이 될 수 있다.

흔히 사랑하면 떠오르는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랑의 관계다.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는 관계.
바로 가족간의 관계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형제나 자매간의 사랑.
이 사랑은 뗴어낼 수 없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고를 떠나 그들은 나의 가족이니까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폭력을 행사해도, 모욕을 주어도, 심지어 가족을 이용하더라도
'가족이니까'라는 이름으로 용서를 구하기도 한다.

자식에게 무관심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식에게 폭력적인 부모도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식은 그런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식은 그런 부모에게 사랑을 받아본 기억도 얼마 없으며,
사랑받길 원했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삶이 각박하고 힘들어 그럴 수도 있다.
또 가족이라는 것에 대한 압박감을 받아 그것을 분노로 표출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연인간의 사랑과도 정말 비슷하다.
집착하는 한쪽과 지루해진 다른쪽의 대립과도 같다.
이 상황에서 그들은 서로 합의를 보고 헤어질 수 있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가면 되니까.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은 그런 것마저 거부해버린다.
어쩔 수 없이 종속될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개만도 못한 놈이라도 가족이니까라는 변명으로 용서를 구한다.
도대체 가족이라는 끊을 수 없는 끈의 한계를 어디로 정해야할까?

두려움에 눈 먼 강아지는 주인을 두려워한다.
주인은 그런 강아지에게 간식을 주며 미안하다며 사과한다.
강아지는 달라진 주인의 태도를 보고 의아해한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아지는 주인과 뛰어놀기 시작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은 강아지를 또 다시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위의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
주인은 미안하다며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길 바란다.
강아지는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반복된다면, 또 일어난다면 하는 두려움이 든다.

강아지는 결심한다. 주인을 떠나기로.
하지만 어디로 떠나야할까? 막연하다.
주인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때 되면 밥주고, 놀아주던 주인이지만, 
그 달라지는 이중적인 태도 하나때문에 주인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강아지는 주인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설령 복수를 성공한다 하여도, 강아지에게 남은 그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제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아문다하여도 그떄의 그 감정은 잊혀질 수 있을까?

가족이라는 이름이 때로는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겠지만,
가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공포를 느끼고, 두려움을 느낀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의 해결책은 결코 도망치는 것밖에 없을까?

그들은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종속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설령 떠난다하여도 그 아픔의 깊이는 너무나도 깊숙하다.

어느 선택을 하더라도 그들은 아프다.
한 번도 그런 감정을 원한 적 없으니, 그들은 더 두려울 수밖에.
가해자들을 이해한다면 그 모든 것들을 치유할 수 있을까?

자기 또한 그런사람이었다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애초에 내가 그런사람이었을까?
더럽고 욕심많은 이기적인 악마였을까?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힘든 사실이라 더 고통스럽지.

자기 또한 언젠가 가해자가 될 수 있으리라.
해답을 찾지 못한다고 패배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에 대한 고뇌와 고통을 똑같은 행동으로 되물린다면 나 또한 가해자가 된다.

결국 그것은 내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가 됐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람들 앞에서 걸었듯.

하지만 피해자들은 단 한 번도 그런 삶을 원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보면 삶에서 이런 고난을 겪지 않는 것이 더 아이러니할 수도 있겠다.
애매하다. 
모든 것은 한 끝 차이에 불과하다.

짊어지느냐, 버리느냐의 차이다.
그러고보니 선택은 항상 내가했다.
짊어지고 고통스러운 것과 버리고 안도감을 느끼는 것처럼.

이상은 어디까지나 바람이고 이뤄질 수 없는 상상의 불과한가?
내가 보기엔 적어도 겪어봤기에 그렇게 바라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받아들이라는 사람들에게 뭐라할 수도 없으니 더 애매하다.
너무 애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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