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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겨울 혜화동
겨울 혜화동은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 간다
하늘에 높이 솟은 가지 가지
플라타너스는 굵은 세월
떠나는 거
머무는 거
겨울 혜화동은 하얀 눈 속에서
마냥 깊이, 생각 속으로 가라앉아 간다
아, 바람에 매달린 열매
하나
김충식, 모과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의지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망신의 사랑이여
김수영, 책
책을 한 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 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 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지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김상옥, 어느 날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천상병, 강물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