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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해, 공중전화 앞에서
동전 몇 닢 넣고
너에게로 가서
망설임 끝에 문을 두드리면
반복되는 신호음이 너의 부재를 알려
흔적도 없이 나 돌아서면
네 방은 다시 고요로 잠잠하고
너와 나는 다시 거리를 회복한다
네가 문을 열고 수화기를 들어도
손가락만 자유로운 벙어리로 나서면
누구세요 저편에서 계속 물으며
몇 개의 이름을 늘어놓는데
낯선 이름 사이에 내가 없다
너와 나 사이 찰카닥 문을 닫고
네 생각 밖에 나는 다시 선다
입구를 알 수 없는 벽
우리는 한 번쯤 이별을 했던가 싶다
이성선, 큰 노래
큰 산이 큰 영혼을 가른다
우주 속에
대붕(大鵬)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설악산 나무
너는 밤마다 별 속에 떠 있다
산정(山頂)을 바라보며
몸이 바위처럼 부드럽게 열리어
동서로 드리운 구름 가지가
바람을 실었다. 굽이굽이 긴 능선
울음을 실었다
해지는 산 깊은 시간을 어깨에 싣고
춤 없는 춤을 추느니
말없이 말을 하느니
아, 설악산 나무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
밤에 길을 떠나 우주 어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파문도 없는 밤의 허공에 홀로
절정을 노래하는
너를 보았다
다 타고 스러진 잿빛 하늘을 딛고
거인처럼 서서 우는 너를 보았다
너는 내 안에 있다
김영재, 어머니
전화기 속에서 어머니가 우신다
니가 보고 싶다 하시면서
나는 울지 않았다
더욱 더
서러워하실 어머니가 안쓰러워
어릴 적 객지에서 어머니 보고 싶어 울었다
그때는 어머니
독하게 울지 않으셨다
외롭고
고단한 날들을 이겨내야 한다고
언제부턴가 고향이 객지로 변해 버렸다
어머닌 객지에서
외로움에 늙으시고
어머니
날 낳던 나이보다, 내 나이 더 늙어간다
박형진, 입춘단상
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쪽에 나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
추녀 물을 세어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
봄이 잦아들었다
최하림, 밭고랑 옥수수
내 눈이 너를 보고
내 귀가 너를 듣는 동안에
감추인 아침이 차츰차츰 열리고
감당할 수 없이 세상이 밝아온다
경이로운 아침이여 새벽부터 길들은
사립을 나서서 숨소리 깊은 들로 간다
내가 처음의 나그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몇 사람째 이슬을 털고 갔다
그들의 발걸음이 들을 깨우고 비린내음 물씬한
밭고랑 옥수수들을 흔든다 옥수수들이
눈 비비며 일어나 제 모습 본다
우리도 어느 날, 들을 가면서 우리가 지나는 모습
볼 것이다 긴 낫 들고, 그림자 드리우며
존재하는 것들이 밝게 얼굴 드러낼 것이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도랑에서, 나는 잠시, 햇빛에 싸여
걸음이 미치지 않는 곳의 신비를 본다
가려고 하지 않는 길들은 매력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