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판사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딸을 무참히 강간한 피고인이 그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은 채
매우 평온한 얼굴을 하며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제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충동적이었습니다.
과거에 착실하게 살아와 작은 범죄 한번 저지른적 없이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지금 정말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피해자 가족들에게도 미안합니다.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나라 법을 아주 잘 간파하고 있었다.
강간죄는 무거운 죄이나 심신미약의 경우 감형이 된다. 또한 초범이라는 이유로도 감형이 된다.
게다가 그는 범행 직후 자수를 했고 지금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다고 반성의 의사를 표현했다. 완벽했다.
김 판사의 딸은 22살 성인이다.
밤에 매우 짧은 치마를 입고 늦게 돌아다니다가 저 놈의 눈에 띄어 강간을 당했다.
김 판사는 물론 딸이 잘못헀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다른사람들에겐 편견을 주기 쉽다.
이로서 저놈이 받을 형은 대략 4년쯤일까?
"박판사, 제발 좀 봐줘. 알잖아? 어? 저새끼가 강간한게 내 딸이라고! 박판사도 알잖아 내 딸. 금지옥엽 귀하게 키운 외동딸인거.
내가 진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이라고! 으흐흐흑...."
눈이 새빨개져서 박 판사를 붙잡으며 숨이 넘어가듯이 통곡을 하는 김 판사였다.
"김판사.... 내가 잘 알지...잘알아.....하...내가 내마음대로 형 때릴 수 있으면 저 새끼 어? 사형이야 사형! 근데....알잖아...
그렇게 안 되는거.....나도 미칠 노릇이야.... 우리나라 법이 이래요. 이렇게 뭐 같아.
저 새끼 저러다가 정신과 상담기록 안 들고 오기나 기도해야지"
옆에서 김 판사를 조용히 토닥이던 박 판사는 씁쓸한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목석같은 그의 성격 탓에 딸에게 살갑게 대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참 예쁜 딸이었다.
그런데 그런 딸이 지금 저 금수만도 못한 놈한테 처참히 뭉개져 병원에 입원해 있다.
딸은 남자 의사선생의 진료마저도 격한 공포로 거부하고 있었고 애 엄마는 이미 두 번이나 실신했다.
며칠후 그놈의 형이 내려지는 날이었다.
"......이하 피고인 OOO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한다."
"이 씨X! 뭐라고? 야 이 개새X야!!!!니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박 판사!!야!!!!"
박 판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박 판사도 마음 같아선 사형을 선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피고인에게 너무 유리했다.
초범이라는 점, 술을 먹었다는 점, 죄를 깊게 뉘우치고 있다는 점.
게다가 그의 인생 또한 불우하여 배심원들의 안타까움을 샀는데 그가 뺑소니를 당해 혼수상태로 입원하던 중 혼자 키우던 딸도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먼저 죽고 말았다. 깨어났을 당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한 남자의 불쌍한 인생.
매일 술로 지새우며 통곡하며 잠 못 이루는 하루하루. 쌓여가는 병원 치료비. 박판사 자신도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동정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러한 동정심이 저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박 판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애써 공정한 판결이었다고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김판사는 매일 술을 먹었다.
하루가 다르게 푸석해져갔고 하루가 다르게 눈빛이 탁해져갔다.
그럼에도 그는 매일 딸의 병원을 들렀다.
평소에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어색한 부녀지간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매일 병원을 갔다.
약 3주후 딸은 퇴원을 했고 통원치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4주 째 되는 날, 딸은 자신의 방 옷장에 목을 매고 자살을 했다.
하지만 바뀌는건 없었다. 범인은 여전히 감옥에서 잘 먹고 잘 쉬고 있었고 심지어 벌써부터 모범수 이야기가 나온다고 했다.
3개월이 지난 날, 김 판사의 아내도 자살을 했다.
짧은 시간에 아내와 딸 모두를 잃었다.
그는 교도소로 향했고 범인의 면회를 신청했다. 그 동안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그놈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 새끼 잘 지내고 있어요?"
김판사의 물음에 최 교도관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어....네 뭐...... 죄도 이미 뉘우쳤고.... 요샌 성경책을 읽더라구요. 얌전하고 말썽 안 일으키고 주위 교도관들이나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평판 좋고. 매일매일 반성문도 쓰고. 참, 근데 그놈도 딸이 있었더라구요. 딸 가진 아비가 어찌 그런 일을 .....
그래도 이제.......!"
자신을 노려보는 김판사의 눈빛을 알아차린 최 교도관은 그만 입을 닫아버렸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면회실로 안내했다.
크게 신호흡을 했다. 김 판사는 그 새끼를 만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혈압으로 쓰러질 것 같았기에 손으로
가슴을 꽉 움켜쥐고 침착하게 숫자를 세며 진정시켰다.
잠시 후 그 놈이 파란 죄수복을 입고 걸어와 유리창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김 판사는 자리를 지키고 있던 교도관들에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들어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마침내 단 둘이 남았을 때 김판사는 스피커 버튼을 눌러 입을 땠다.
"왜...그랬나? 왜 하필 내 딸이야?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너 때문에 내 딸이 죽었어. 내 아내도. 이젠 내가 죽을까?"
가만히 아래만 보고 있던 죄수는 눈을 깜박이며 김판사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입이 귀에 걸리도록 씨익 웃었다.
"?!"
김 판사는 소름이 돋았다. 이 미친X이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건가?
"김판사님, 왜 하필 김 판사님 딸이냐구요? 김판사님 딸이 재수가 없어서 저한테 걸렸을까요? 7년 전 9월에 있었던 사건 기억나세요?
노숙자 강간사건. 기억나요?
그는 머리를 굴렸다. 그가 아무리 판사여도 7년이라는 긴 시간을 일일이 기억하기는 무리였다.
"몰라. 그런거 기억 못한다고 개새X야.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왜? 강간한 사건 보니까 너도 그러고 싶었어?"
"하하 설마요. 나는 모든 범죄중에 강간을 가장 혐오해요. 그 사건 이후로 가장 혐오하는데. 그 사건 피해자 이름 기억나요?
'마리아'라고 .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할텐데?"
순간 7년전 그 사건이 번쩍하며 스쳐지나갔다. 맞다. 이름이 정말 특이한 피해자였다.
친구랑 밤 늦게 돌아다니다 웬 노숙자한테 걸려서 강간당했던 피해자. 강간사건이야 꽤 많아서 하나하나 그 케이스를
다 기억할 순 없지만 마리아 라는 이름이 특이해 다른 사건에 비해 자세히 기억이 났다.
그 노숙자. 믿었던 친구에게 보증 섰다가 전재산 탕진하고 정신병까지 얻었던 피의자.
"응. 이제 기억나나 보내. 근데 그거 알아요? 리아 내 딸인데. 내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소중한 내 딸.
나도 마씨잖아요. 판사라 금방 알아챌 줄 알았는데. 판사라고 다 똑똑한건 아닌가봐?"
강렬한 충격이 김판사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뭐..? 네가 그 마리아 아빠라고? 너 딸 죽었다며! 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사고로 죽었다며!"
"죽었죠. 성폭행 당한 충격으로 길거리 돌아다니다가 트럭에 치어서 죽은거잖아. 난 리아 장례식도 못 봤어요.
내가 의식이 돌아왔을땐 이미 49제까지 지나있었는데."
마 죄수는 얼굴이 창백해진 김판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근데 씨X 웃긴건 뭔지 알아요? 내 딸 강간한 그 새끼는 네가 심신미약으로 선처해준 덕분에 이미 예전에 복역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더라구요?"
그랬다. 김판사는 그 당시 그 노숙자에게 심신미약으로 감형을 해줬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엇는지는 알지 못했다.
사실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그 당시에 김 판사는 지난 판례를 보았고, 변호사와 검사의 말을 들었고,
보증을 잘못 서 전 재산을 잃어버린 노숙자를 동정했다.
"김판사님 따님에겐 정말 죽을 죄를 지은거 알아요. 그 애가 무슨 잘못이 있었겠어요.
그저 내 딸 강간한 새끼한테 선처해준 병X같은 판사 애비 둔 잘못이겠지"
김 판사는 이제 어억 하는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나는 죽어서 지옥 갈 겁니다. 자식 먼저 보냈고, 김판사님 따님한테 몹쓸 짓 했으니까. 근데 김판사님은 지금이 지옥이길 바랍니다.
그래야 내가 했던 행동이 의미가 있을테니까"
"어..어억!!으어어억!!! 이 개새X야!!으억!!으어어어억!!!"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김판사는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며 땅을 손으로 쾅쾅 내리쳤다.
교도관이 헐레벌떡 들어왔고 마 죄수는 일어서서 김판사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문뒤로 차분히 걸어들어갔다.
"박 판사, 그 장례식 잘 다녀왔어?"
"아 네네..."
"표정 풀어. 자네 잘못한 거 하나 없어. 김판사 그렇게 죽은 거 그거 다 마음 약해서 그런거야. 자네는 판사로서 맞는 판결을 했어"
교도소 창살 사이로 햇볓이 내리쬐었다.
마 죄수는 그 사이로 떠다니는 먼지를 바라보다 이내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의 착한 딸은 그에게 왜 그랬어야 했냐며 그를 탓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착실하게 교도소 생활을 할 것이다. 모범수로 최대한 빨리 복역할 것이다.
그리고 복역하는 날, 자신의 딸을 강간했던 노숙자를 찾아가 그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할 것이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