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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림, 오존주의보가 내려도
더 이상 내 시가 꿈꿀
고향은 없다. 자연조차 없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속에만 존재한다
더 이상 내 시에 성스런 힘 실어줄
자본의 가속도에 브레이크 걸어줄 민중도 없다
오랫동안 물을 갈지 않아 썩어가는
우울한 이 수족관 도시
빠져나갈 껀수도 길도 없다
오존주의보가 내려도
폐에 구멍이 뚫려도
남극 뻥 뚫린 오존층 구멍이
내 머리 위까지 덮친들
땡볕에 드러난 지렁이처럼
말라 비틀어지며 기어갈 수밖에 없다
황폐해진 여름날, 가로수 없는
달구어진 콘크리트 바닥을
아황산가스 오존을 마시며 삭여내며
모질게 독하게 싹 틔워야 한다
지구가 돌아가는 데까지
사는 데까지 살아봐야 한다, 내 시는
함민복, 죄
오염시키지 말자
죄란 말
섬뜩 빛나야 한다
건성으로 느껴
죄의 날 무뎌질 때
삶은 흔들린다
날을 세워
등이 아닌 날을 대면하여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구분하며 살 수 있게
마음아
무뎌지지 말자
여림만으로 세울 수 있는
강함만으로 지킬 수 있는
죄의 날
빛나게
푸르게
말로만 죄를 느끼지 말자
겁처럼 신성한
죄란 말
오염시키지 말자
김남주, 창살에 햇살이
내가 손을 내밀면
내 손에 와서 고와지는 햇살
내가 볼을 내밀면
내 볼에 와서 다스워지는 햇살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자꾸자꾸 자라나
다람쥐 꼬리만큼은 자라나
내 목에 와서 감기면
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
내 입술에 와서 닿으면
그녀와 주고받고는 했던
옛 추억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신석정, 그 마음에는
그 사사스러운 일로
정히 닦아온 마음에
얼룩진 그림자를 보내지 말라
그 마음에는
한 그루 나무를 심어
꽃을 피게 할 일이요
한 마리
학으로 하여
노래를 부르게 할 일이다
대숲에
자취 없이
바람이 쉬어 가고
구름도 흔적 없이
하늘을 지나가듯
어둡고 흐린 날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받들어
그 마음에는
한 마리 작은 나비도
너그럽게 쉬어 가게 하라
이하석, 깊이에 대하여
자판기 커피 뽑는 것도 시비꺼리가 될 수 있는지
종이컵 속 커피 위에 뜬 거품을 걷어내면
"왜 거품을 걷어내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나는 "커피의 깊이를 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마음 없는 말일 수 있다
인스턴트 커피에 무슨 근사한 깊이가 있느냐고 물으면
대단치 않는 깊이에도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해준다
모두 얕다
기실 따뜻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대단찮은 깊이까지 사랑한다 해도
커피는 어두워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실 어둠의 깊이를 얕볼 수 없다
싸고 만만한 커피이지만
내 손이 받쳐 든 보이지 않는 그 깊이를 은밀하게 캐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 깊이를 다른 누가 들여다볼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