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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택, 가로등
가로등도 빛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골목 어귀 비 뿌리는 전봇대 밑이거나
눈보라 흩어지는 마을의 입구 어둠을 한사코 밀어내며
자신의 몸으로 등(燈)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더디고 하찮은 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소란스럽고
번쩍거리는 것만이 마음에 등이 되는 때
만월(滿月)처럼 그렇게 은은함도 그리워지는 법이다
종루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골목의 개들도 두발을 모은 채 귀를 내리고
풍치(風齒)를 앓는 마을도 강처럼 고요하던 때
두근거림은 영화 포스터만큼 상큼했었다
벚꽃 피는 날, 환한 날 사랑이 어떻게 갔는지
편의점 불빛은 반짝이고 저 멀리
오래 달려온 길처럼 쭈그러진 가로등
제 몸속을 비추고 있다
신경림, 무인도
너는 때로 사람들 땀 냄새가 그리운가 보다
밤마다 힘겹게 바다를 헤엄쳐 건너
집집에 별이 달리는 포구로 오는걸 보면
질척거리는 어시장을 들여다도 보고
떠들썩한 골목을 기웃대는 네 걸음이
절로 가볍고 즐거운 춤이 되는구나
누가 모르겠느냐 세상에 아름다운 게
나무와 꽃과 풀만이 아니라는 걸
악다구니엔 짐짓 눈살을 찌푸리다가
놀이판엔 콧노래로 끼어들 터이지만
보아라 탐조등 불빛에 놀라 돌아서는
네 빈 가슴을 와 채우는 새파란 달빛을
슬퍼하지 말라 어둠이 걷히기 전에 돌아가
안개로 덮어야 하는 네 갇힌 삶을
곳곳에서 부딪히고 막히는 무거운 발길을
깃과 털 속에 새와 짐승을 기르면서
가슴 속에 큰 뭍 하나를 묻고 살아가는
너, 나의 서럽고 아름다운 무인도여
이유경, 우리의 탄식
내 숨은 아픔 이야기하면 이월 비처럼
그대 섧게 훌쩍일 수밖에 없으리
그건 꺾여진 우리 탄식의 마른 가지
살 깊이 병든 뼈처럼 파묻혀 있는 탓이야
그대 숨은 기쁨 이야기하며
풀꽃같이 웃다가도 이내 입 다물고
저 북창 적막에 젖어 버리는구나
해서 남는 건 젖은 우리 남루뿐이다
종일을 살아도 반짝이는 강물 눈 아래
가만히 지켜볼 염 없었네
다른 사람 모여 저문 들판 거슬러 올 때
우린 헤어져 떠돌아다녀야 하고
길마다 축제처럼 눈발 휩쓸려 다닐 때도
잠 청하다 청하다 밤 다 새웠네
그래 시든 풀잎 벗기며 바람 불면
우리 일없이 휘파람이나 휘날리며
언덕의 새 무덤이나 헤아려 보리
봄 뜨락마다 하얗게 목련 떠오를 때도
감성의 바닥에 닿아 앓거나
각자의 창에서 떨고 있으리
우리 탄식의 마른가지
정호승, 혀
어미개가 갓난 새끼의 몸을 핥는다
앞발을 들어 마르지 않도록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온몸 구석구석을 혀로 핥는다
병약하게 태어나 젖도 먹지 못하고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죽은 줄도 모르고
잠도 자지 않고 핥고 또 핥는다
나는 아이들과 죽은 새끼를
손수건에 고이 싸서
손바닥만한 언 땅에 묻어주었으나
어미개는 길게 뽑은 혀를 거두지 않고
밤새도록 허공을 핥고 또 핥더니
이튿날 아침
혀가 다 닳아 보이지 않았다
구상, 구상무상(具常無常)
이제 세월처럼 흘러가는
남의 세상 속에서
가쁘던 숨결은 식어가고
뉘우침마저 희미해가는 가슴
나보다도 진해진 그림자를
밟고 서면
꿈결 속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그저 심심해 서 있으면
헤어진 호주머니 구멍으로부터
바람과 추억이 새어나가고
꽁초도 사랑도 흘러나가고
무엇도 무엇도 떨어져버리면
나를 취하게 할 아편도 술도 없이
홀로 깨어 있노라
아무렇지도 않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