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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
게시물ID : phil_101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널소유하겠어
추천 : 0
조회수 : 43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1/12 17:47:25

사람이 태어났으면 살아야하고,
살려면 먹고 자고 기본적인 의식주가 있어야하며,
살다보면 언젠간 죽음이라는 것이 들이닥친다.

시작과 끝 그것에 대한 물음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중요한 건 과정.

우리는 늘 살아가면서 어떤 삶을 살까 고뇌에 빠진다.

가난하여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걸 원하듯,
우리 인생의 긴 삶의 목표를 정하는 것을 기본으로,

때때로 내 삶에 뜻하지 않은 악재가 닥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상황에 빨려들어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나를 마구잡이로 때리고 수치심을 준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싶다는 결심과 복수를 이루는 행동도,
누군가 나의 돈을 훔쳐가는 바람에 큰 문제에 엮이고 소용돌이처럼 인생이 한 순간 망가져버려 자포자기하는 것처럼.

삶은 예측할 수 없듯, 이러한 일들이 수시로 그리고 매번 일어나고
우리를 선택의 순간으로 인도한다.

너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선택은 극과 극이다. 
알고보면 정말 쉽기도 하다.
언제나 시간이 지나고보면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듯,
맞서느냐, 도망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왜 사냐? 너는 왜 사냐? 우리는 왜 살까?
우리는 매 순간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고민한다.
가끔은 이러한 질문을 보면 또라는 생각이 들고 지겨워보이기까지 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도 되겠고, 그만큼 많이 생각한다는 뜻도 되며, 그만큼 답이 어렵다는 말도 된다.

삶의 무게는 과연 얼마만큼일까?
인간의 감정을 가장 쉽게 나누면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이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으로 바라보자면,
사랑하는 감정으로부터 악이 발생할 수 있고, 선이 발생할 수도 있다.
죄의식이 악을 만들고 반대로 선을 만든다.
두려움이 악을 만들고 선을 만들듯...

'방황하는 칼날'에서 주인공은 비참하게 죽은 아들을 위해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나선다.
악이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소년을 용서하고 친아들처럼 키웠다.
이부분은 선이다.

지나친 죄책감이 나를 조여와 결국 잘못을 인정하고 죗값을 받기로 결심한다.
선이다.
지나친 죄책감을 피해 도망쳐 결국 스스로 불순하다고 믿으며, 그러한 삶을 지속한다.
악이다.

중요한 건 우리의 삶은 그 상황에서만 선이냐 악이냐를 따진다.
그렇다면 악을 선택한 사람은 정말로 악할까?
반대로 선한 선택을 한 사람은 선할까?
이러한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솔직하게 말해서 불편하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은 때에 따라 선의 하얀 가면이냐, 악의 검은 가면이냐를 따라 정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이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방황하는 칼날에서 주인공은 복수를 통해서나마 자신의 마음을 달래길 바란다.
그에게 선택지는 많았다. 
경찰에게 맡기고, 법에 처벌을 받게 할 수 있었고,
또 그들을 용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분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고, 아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는 스스로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선택한다.

영화 21그램을 보면, 주인공 숀 펜은 심장을 이식받아야만 살 수 있는 위태로운 삶을 살아간다.
하루하루 시간은 흐르고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을 무렵, 그는 극적으로 심장을 이식받는데 성공한다.
그 뒤 그는 고철덩어리에 의존하던 삶을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되찾아준 기증자를 찾아 감사의 말을 전하기로 결심한다.
기증자의 가족을 찾자 그녀의 가족이 끔찍한 뺑소니사고로 죽었음을 알게된다.
그 심장은 합리적으로 그에게 전달됐지만 그는 그점이 마음에 걸렸다.

원래는 죽었어야 할 자신이 누군가의 죽음 덕분에 되살아난 것은 물론이고,
그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해 발생한 인위적인 죽음이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그녀는 한순간 가족을 잃어버리고, 삶을 잃어버려 괴로워했다.

"복수하고 싶어요."
그녀의 한 마디에 그는 결심한다.
본래의 심장의 주인을 생각하며 그녀의 삶을 망친 남자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그들이 가진 이 복수의 무게는 얼마인가?
전자의 주인공은 아들에 대한 사랑에서 파생된 동정과 연민, 그리고 부자관계라는 유대감을 통해 복수를 결심한다.
후자는 역시 '심장'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또 심장이식이란 부분에서 복잡한 심정을 느끼고 그녀를 돕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 모두 복수를 성공했지만 끝내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복수를 하겠다는 그 분노와 그것으로 발생하는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허탈했다.

이들의 복수는 바로 합리적인, 필요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복수다.
그들은 피해자였고, 복수의 대상은 가해자였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그들은 가해자이고, 대상은 피해자가 된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언제나 복수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한다고 하지만,
복수를 한 순간에는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된다.
(그 무게가 다를 뿐, 언제나 복수는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했을 때 선택하게된다.)

이렇듯 인간의 삶의 무게는 얼마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영화는
끝에서 그 무게는 각기 다르지만 결코 따질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돌아와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흔히 영화적 구조로 따지자면, 처음 30분은 사건의 발생, 다음 30분은 전개,
그리고 마지막 30분은 절정과 해소다.

우리의 인생에서 기억되는 큰 사건 역시 영화와 같다.
크게 전체의 삶으로 보자면, 100포인트짜리 A의 막대가 있다면,
일어난 사건 B는 A의 막대 속 불과 몇 포인트에 속할 뿐.
A(100)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B(5)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위처럼 말이다.

큰 전체의 인생으로 봤을 때 얼마되지도 않아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별것도 아닌 일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그 기대값이 예를 들어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더 높아지게된다.

10살짜리 아이가 있다. 그걸 나이로 환산해서,
그 아이의 10포인트 막대가 있다.
아이(10)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리고 40세의 엄마가 있다.
40포인트짜리 막대가 있다.
엄마(40)ㅡㅡㅡㅡㅡㅡCㅡㅡㅡ

여기서 엄마의 막대에서 아이가 차지하는 부분은 10포인트다.
남은 30포인트는 그녀의 부모와 친구 그리고 다른 것들로 채워져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막대 10포인트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그리고 그 기대값이 100%이다.
(어린 아이라는 점에서 엄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어 100%로 정했다.)
하지만 반대로 엄마의 인생 전체로 봤을 때 아이의 기대값은 크지 않다.
그러나 아이가 다 클 때 까지(20세로 정하고) 돌바와햔다는 의무감 덕분에
그 기대값은 어느 지점부터 현재까지 100%에 가깝다. (C와 그 이후 지점)

이렇듯 그 기대값이 높은 상황에서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비탄할 수밖에.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포인트가 점차 늘어간다.
40세의 엄마가 아이를 잃고, 60세가 됐을 때 그것은 처음 A의 막대처럼 
엄마(60)ㅡㅡㅡㅡㅡㅡㅡㅡD(10)ㅡㅡㅡㅡㅡㅡ
뭐 대략 이렇게 될 것이다.
그 이후 지점부터 살아온 삶에서 다른 부분이 그것을 대신하기 시작했을 테니까.

흔히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무엇이던 지나가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의 전제는 '맞섰을 때'에 있다.
만약 그 상황에서 도망쳐버렸다면 아마 지금 쯤 후회와 회의에 가득차있겠지.

중요한 건 선하고 악한 행동의 차이와 그런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다.
맞서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본다.
삶의 무게는 피할 수록 무거워지고,
맞설 수록 가벼워진다고 생각한다.

쓰고보니 글이 개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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