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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위, 시집(詩集)
시집(詩集)을
사는 일은 즐겁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 책을 사다가
모르는 이의
불꽃같은 시가 있는
시집(詩集)을
덤으로 사는 일은 즐겁다
이형기, 나의 취미는 멸망이다
학교 주변 그 뒷골목에는
낙첨된 주택복권을 사들이는
가게가 있다
혹시나 혹시나
몰래 숨긴 1억 원짜리 꿈이
역시나 허탕으로 꺼져야만 반기는
심술꾼 가게 주인
군대로 치면
이들은 모두 전사자지요
그러니 다시는 죽을 리 없는
불사의 군대만을 모으고 있지요
과연 그는 백전노장
지고 쫓기는덴 이골이 나서
도주하는 밤길
그 어둠조차도 절망으로 불 밝힌다
이유는 무슨 이유
다만 취미
허망을 위한
꿈 많은 복권 구매자여 들으라
나의 취미는 멸망이다
길상호, 물끄러미
물끄러미라는 말
한 꾸러미 너희들 딱딱한 입처럼 아무 소리도 없는 말
마른 지느러미처럼 어떤 방향으로도 몸을 틀 수 없는 말
그물에 걸리는 순간
물에서 끄집어낸 순간
덕장의 장대에 걸려서도
물끄러미
겨울바람 비늘 파고들면
내장도 빼버린 배 속 허기가 조금 느껴지는 말
아가미 꿰고 있는 새끼줄 때문에
너를 두고 바다로 되돌아간 그림자 때문에
보아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말
남진우, 소음
나도 모르게
벌집을 건드렸나보다
붕붕거리며 날아오른 벌들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싼다
발을 디뎌서는 안 될
금지된 영지를 침범한 것일까
늙은 떡갈나무 아래를 지나다 무심코
머리 위로 손을 뻗치는 순간
먹구름처럼 모여드는 벌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수많은 말들이 거침없이 나를 찔러대며
어서 무릎 꿇으라고 잘못했다고 빌라고 다그친다
퉁퉁 부어오르는 살 위에 다시 침을 박는다
개울을 건너 풀숲을 헤치고
아무리 멀리 달아나봐야 소용없다
내가 건드리기도 전에 한 모금 꿀을 맛보기도 전에
벌들이 날아와 나를 쏘아댄다
아픔이 환희처럼 온몸에 번져갈 때
꽃가루를 모으던 닫힌 입 안에 갇혀 있던 말들이
쉴 새 없이 붕붕거리며 어서 쏴버려
쏘아버리라고 말한다
벌들에게 쏘이며
나 또한 입가에 힘을 모으고
최후로 마지막 침을 날린다 이제 막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저 거대한 말벌을 향해
벌이야
벌이라니까
우대식, 고래와 시인
저인망 그물에 걸린 고래가 죽었다
익사(溺死)다
그의 몸에 남은 망사스타킹 같은 그물자국에서
선(線)에 관한 몇 개의 보고서를 읽는다
윤리학(倫理學)이 아니다
생의 근친(近親)인 죽음 앞에서
물에 빠져 죽은 고래에 대한 내 명상이 길어질 때
시(詩)에 대해 생각해본 것뿐이다
말(言)의 촘촘한 저인망에 걸려 죽어가는
한 시인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진정한 죽음이란
저와 가장 친근한 곳에서 완성되는 법
객사(客死)를 면한 고래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