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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문재, 꽃
지금 네가 흘리고 있는 진땀이 비누 거품처럼 꺼지고 말겠지만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으련다
너는 사라지는 운명에 미련을 가지고 사진이나 찍어대지 않는다
떠날 때에는 그림자까지 거두어 갈 용의를
너럭바위의 표정처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절벽에 매달려 있는 조난자처럼 장맛비에 패인 언덕에서
흔들리면서도 권투 글러브를 끼는 링 위의 도전자 같은 불길을
너의 키 위로 넘긴다
그 어떤 하소연도 패악으로 간주한다고
너는 정으로 비석을 쪼듯 녹음한다
햇볕이 바뀔 때마다 네 목소리는 변색되고 말겠지만
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믿고 있기에
너는 추억을 한 움큼 움켜쥔 바람처럼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허영선, 뿌리의 노래
깊디깊은 바윗돌 잘도 견뎌왔구나
갯메꽃, 뫼메꽃 살가운 것들 껴안고
잘도 견뎌왔구나
억세게 땅을 움켜쥔 채 늙은 뿌리는
늙은 노래를 부르며 삶을 견뎌왔으니
우린 놀랍게도 무르고 헐은 상처도 싸매며
메꽃, 달개비꽃 보드라움을 노래해 왔구나
질펀한 여름날의 해무
길 잃은 자들 위로 짙게 깔려
버둥거리며 우린 길을 찾아왔으니
막버스가 이미 지나가도 두렵지 않았던 건
삶은 이미 견딤의 시작에서
견딤의 정점으로 향한다는 의지 아니었던가
자갈은 자갈대로 한밤중 자갈자갈
섬 속에서 떠다니는 섬은 부웅부웅 소리 내며
해무가 지우는 길을 빛나게 닦는구나
들어봐라, 제주 섬 한밤을 빙빙 돌며
떠나지 못하는 뿌리의 울음
견딘 만큼 더 견디라 하지 않느냐
이달균, 평촌역에서
나는 여지껏 기다리며 살아왔다
오지 않는 기차를, 허기진 한 줄 시를
이렇듯 목만 길어진 짐승처럼 살아왔다
기실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비련의 사랑도, 피 묻은 혁명도
혼돈의 이천 년대를 열망한 적도 없었다
김두안, 의자
의자에 앉아 있다
의자처럼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흰 바람이 뽑혀 나가고
오늘은 가을이
오늘을 따라 떠나갔다
의자에는
겨울이 따사로이 앉아 있고
나는
겨울 무릎 위에 앉아 있다
박서영, 업어준다는 것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사람이 짐승을 업고 긴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이
젖어 더욱 무거워진 몸을 업어주고 있다
울음이 불룩한 무덤에 스며드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