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영화 속에 한 검객이 자세를 가다듬으며 하나의 가느다란 선만 보일 때까지 칼날을 돌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칼날은 그 선과 같은 것입니다.
장자 제3편 〈양생주〉에 한 백정이 소를 잡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을 구경하며 그의 뛰어난 솜씨에 감탄하는 왕에게 백정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금 저의 칼은 십구년이 되었으며, 그 사이 잡은 소는 수천 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숫돌에 새로 갈아 내온 것과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 두께가 없는 것(無厚)을 틈이 있는 곳(有間)에 넣게 때문에 휑하니 칼날을 움직이는데 언제나 반드시 여유가 있게 됩니다.
여기서 '두께 없는 것'(無厚)과 '간격 있는 것'(有間)은 후기묵가의 글에 나오는 기하학적 전문 용어이기도 합니다. 후기묵가의 글, 즉 묵경에 쓰이는 용어들은 《장자》 내편에 자주 등장합니다. 우연일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후기묵가는 일상 언어에 쓰이는 단어들을 그들 나름의 사상체계 속에서 꼼꼼하게 재정의함으로써 애매모호함이 없는 전문 언어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장자는 이런 단어들을 묵경에 정의된 바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쓰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만큼 묵경에 대한 능통한 지식을 갖췄다는 말이죠.
묵경은 '겸'(兼)이라는 단어를 '전체'라는 뜻으로 쓰고, '체'(體)라는 단어를 '부분'이나 '단위'라는 뜻으로 씁니다. '부분/단위'(體)는 이렇게 정의됩니다:
A2 (經) 體,分於兼也。
A2 (說) 若二之一,尺之端也。
A2 (경) '부분/단위'는 전체 속의 분할이다.
A2 (설) 예를 들면 둘 중의 하나, 선의 시작점 등이다.
전체와 부분들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두가지 접근방법이 있습니다.
- 보텀업 존재론은 부분들을 우선적인 존재로 보고, 그 부분들이 어떻게 하나로 결합되는지를 문제로 삼습니다.
- 탑다운 존재론은 전체를 우선적인 존재로 보고, 그 전체가 어떻게 여러 부분들로 나뉘어지는지를 문제로 삼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두번째가 후기묵가의 접근방법입니다. 전체가 되는 것을 여러 것들로 쪼개려면 그 전체를 이것 저것으로 구분하는 경계선들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묵경에서 기하학을 다루는 내용 중에는 경계선을 정의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것이 보입니다.
묵경에서 볼 수 있는 접근법은 대충 이렇다고 봅니다. 먼저 시간과 공간을 더 작은 간격의 단위들로 쪼갭니다. 여기서 시간과 공간을 더 작은 간격의 단위들로 가르는 경계선들도 시간과 공간의 일부분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자정은 시간을 어제와 오늘로 가르는 경계선이고, 적도는 지구의 공간을 북반구와 남반구로 가르는 경계선입니다. 이 경계선들은 시공간적 구간들 사이의 간격이 없는 단면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입체의 경계'선'은 면이고, 면의 경계선은 선이고, 선의 경계'선'은 점이겠죠.)
이렇게 간격이 있거나 간격이 없는 시공간의 단위들, 특히 간격이 없는 경계선들이 쓰이는 용도는, 바로 시공간을 채우는 물질을 자연의 결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물체들로 나누는 것입니다. 시간 속의 경계선들은 사물이 시작하고 종말하는 시점들을 그어주고, 공간 속의 경계선들은 사물의 윤곽들을 그려줍니다:
A44 (經) 始,當時也。
A44 (說) 時或有久,或無久,始當無久。
A44 (경) '(어느 물체의) 시작'은 시간과 일치하는 것이다.
A44 (설) 시간에는 간격이 있는 것과 간격이 없는 것이 있다. 시작은 간격이 없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A62 (經) 端,體之無厚而最前者也。
A62 (說) 是無間也。
A62 (경) '(어느 물체의) 테두리'는 (그것의) 부분들 중에서 제일 처음에 위치한 두께 없는 것이다.
A62 (설) 이것은 간격이 없다.
다음 글에는 '겹침' (overlap), '연접' (connection), '인접' (contiguity)과 같은 기하학적 용어들이 묵경에서 어떻게 정의되는지 보고자 합니다. (이런 개념들을 다루는 학문은 사실 기하학이라기 보다는 기하학적 위상수학[topology]과 부분전체론[mereology]을 합친 것입니다. 이렇게 통합된 학문을 'mereotopology'라고 칭합니다. 복잡한 명칭이라서 그냥 기하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어제와 오늘을 가르는 경계선, 즉 자정은 어제인가요, 아니면 오늘인가요? 네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 자정은 어제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오늘의 첫번째 순간이다.
- 자정은 어제의 마지막 순간이지 오늘의 첫번째 순간이 아니다.
- 자정은 어제의 마지막 순간도, 오늘의 첫번째 순간도 다 아니다.
- 자정은 어제의 마지막 순간이며, 동시에 오늘의 첫번째 순간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답은 1번입니다. 지난 밤 12시 정각을 12 a.m., 즉 오늘 오전의 시작으로 취급하니까요. 반면에 후기묵가가 선택한 답은 4번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답을 선택하겠습니까?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면 선택한 답을 제외한 나머지 옵션들은 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될 것입니다.
선택을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체입니다. (요즘 물리학자들의 입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연속체라고 가정합시다.) 연속체는 무한히 분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을 하나의 이어지는 선이라고 상상한다면, 그 선에 위치한 어느 두 점 사이에든지 간에 점이 더 들어갈 수 있는 간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명가에서 논의된 명제들 중에 연속체의 무한한 분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도 있습니다 (제논의 역설 중에도 비슷한게 있죠). 출처는 《장자》 제33편 〈천하〉입니다:
一尺之捶,日取其半,萬世不竭。
한 자 길이의 회초리를 매일 그 반을 부러뜨려도 만년토록 없어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장자》에서 인용한 글은 김학주의 국역입니다.
후기묵가의 글은 제가 번역했습니다. 후기묵가의 글, 즉 묵변은 《묵자》의 제40~45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40~41편 〈경 (經)〉 상, 하는 간략한 정의와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42~43편〈경설 (經說)〉 상, 하는 〈경〉에 나오는 각 정의와 명제를 일일이 해설합니다. 제44~45편 〈대취 (大取)〉 및 〈소취 (小取)〉는 훗날의 편집자가 여러 손상된 후기묵가의 죽간서에서 골라 모은 글들로 보입니다.
저는 〈경〉 상, 하와〈경설〉 상, 하를 통틀어 '묵경'이라 일컫겠습니다. 묵경에 나오는 글을 언급할 때 'A'는 〈경〉이나〈경설〉의 상편, 'B'는 〈경〉이나〈경설〉의 후편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자면 'A44 (경)'은 제40편 〈경〉 상편에 나오는 44번째 정의이고, 'A44 (설)'은 〈경설〉 상편에 나오는 44번째 정의에 대한 해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