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제부터였을까. 내 삶은 실패한 삶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 능력과 노력은 부족했고,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냈다. 생각만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 날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 날도 평소와 같았다.
-탁 소리를 내며 소주잔으로 바닥을 내리 찍었다. 평소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 이렇게 친구 녀석이 찾아오는 밤이면, 나를 위로해주는 것은 한 잔의 술이었다.
“매 번 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씁쓸한 미소를 흘리는 내 앞에는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항상 웃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남자는, 둘도 없는 내 친구였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미안해하니까, 내가 더 미안하다.”
미소 짓는 친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다시 소주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모로 부족한 자신과는 다르게 완벽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대를 졸업하고 최근에는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을 준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 반해서 자신은...
-후
남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고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단숨에 고개를 젖혀 술을 들이켜니, 식도를 따라 들어오는 액체가 느껴졌다.
“너무 많이 마시지마. 요즘은 술 취해서 돌아다니면 가진 돈 다 털리고, 알몸으로 다음 날에 일어난다더라.”
“크... 야, 나는 털릴 돈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좀도둑이 와봐야 먼지밖에 더 털어가겠냐!”
친구의 걱정을 실없는 농담으로 웃어넘기고 다시 술 한 잔을 쭉- 들이켰다. 그렇게 얼마나 마셨을까, 벌써 시계 바늘이 새벽을 향하고 있었다. 친구도 자꾸 시계를 쳐다보는 것이 눈치보였다.
“야. 너 내일도 회사 출근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
내심 아쉬움을 뒤로하고 친구의 등을 떠밀었다. 친구도 못 이기는 척 자리를 일어나, 계산을 하고 뒤따라 나왔다.
“조심히 들어가라!”
“그래. 너도...”
나는 두 팔로 크게 흔들며 인사했고, 친구도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같이 왼팔을 흔들었다. 네온사인 불빛 아래, 녀석 존재는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짜식, 시계도 비싼 거 같은데...”
피식, 실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며 걷다보니 집 근처에 공원을 지나게 되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운동하는 사람도 없어, 으스스한 것이 살짝 무서워서 멈칫한 것도 잠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순간 무엇인가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푹 소리를 파고든 그것은 금방 빠져나갔지만, 힘도 같이 빠져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아봤지만 어두운 탓인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단지 칼을 든 남자의 손이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뭐야. 이게...’
초라한 삶이었지만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손을 휘저어 무엇인가를 잡아보려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피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몸이 식어간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싸늘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점차 몸에 힘이 사라지고, 시야가 어두워진다.
“이런 씨...”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하고 나는 쓰러져 일어나지 다시는 못했다. 며칠 뒤 범인이 밝혀졌지만, 이미 나는 죽은 이후였다.
2.
-두근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 칼에 찔려 죽었는데, 이 포근함은 뭐지? 심장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울려 퍼진다. 나를 둘러싼 이 액체를 통해 심장의 울림이 전해졌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환생이라는 건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세상 밖으로 내가 나왔다. 밝은 빛, 눈을 앗아갈 것 같은 밝은 빛이 가득한 그 공간에 내가 첫 숨을 내뱉었다. 이번 생의 첫 통증에 울음을 내뱉고, 입 밖으로 무엇인가 토해냈다. 드디어,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다.
평화로운 삶이었다. 내가 전생에서 패배자 같은 삶을 살았다고 푸념했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비슷한 나이대의 이야기였다. 환생이라는 것을 믿을 리도 없지만, 너무 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나는 최대한 노력을 해서 적당한 천재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부모님은 흡족해하셨다. 부모님이라...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고, 그리고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문득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이곳은 전생과 같은 곳일까?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옛 집은 텅 비었다.
‘아. 이 시간에는 아직 일하고 계셨나.’
너무 잊고 살았다. 내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이 끝인가.
그런 내 눈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놀이터에서 홀로 그네를 타면서 골목길 입구를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은 확실히 ‘나’였다.
‘나...?’
나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외로워 보이는 그 모습을 보듬어주고 싶었다. 몸만 어려진 자신과 다르게, ‘나’는 마음까지 여렸다.
“안녕?”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나의 모습에 ‘나’는 경계심을 내비쳤다. 흔들리던 그네가 멈추고 소년은 눈앞에 다가온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 친구할래?”
-씨익 웃는 나의 모습에 소년은 머뭇하더니 손을 마주잡았다.
“그럼 이제 우리 친구다?”
소년이 조심스럽게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결국 나는 ‘나’였구나’
시간은 계속 흘렀고,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그동안 계속해서 좋은 일만 생겼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되어서 집안 형편은 갈수록 좋아졌고, 아름다운 아내도 생겼다. 긴 생머리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는 늘 나를 보면 손을 입으로 가리고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이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고민의 시작이었다.
나의 탄생은 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모든 행복도 결국 ‘나’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사상누각이었다. 그런데 만약 ‘나’가 죽지 않는다면? 나라는 존재는 결국 없는 것이 되는 건가? 그날도 책상에 머리를 감싸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요즘 무슨 고민 있어요?”
뒤에서 팔 하나가 목을 감싸며 어깨 위로 올라왔다.
“아니. 피곤해서 그런가봐.”
나의 무뚝뚝한 말에도 그녀는 또 다시 입을 가리며 –풋 하고 웃었다. 무엇이 그렇게도 즐거운 걸까?
“당신, 정말 거짓말 못하는 거 알아요? 얼굴에 다 써있다니까.”
내가 정말 그랬나?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아니. 별건 아니고, 아는 후배가 시나리오 하나를 가지고 와서 결말을 짜달라고 하네.”
“무슨 내용인데요?”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녀 앞에 서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실 내심 나도 답답했던지라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나를 위해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에 괜히 흐뭇하게 바라봤다.
“으음... 주인공이 강도한테 죽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고민할 필요 없지 않아요?”
그녀의 답변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죽음을 방관할 것인가. 이게 핵심이지.”
“그럼 고민할게 뭐가 있어요. 원하는 삶을 살아야하는 거죠. 전생이 맘에 들면 막을 것이고, 지금이 맘에 들면 안 막으면 되요!”
그렇다. 사실 나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씁쓸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지?”
오늘따라 입이 썼다.
3.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겼다. 검은 셔츠에 검은 양복을 갖춰 입고 왼팔에 시계를 찼다. 그리고 ‘나’를 불렀다. 술이나 한 잔하자는 말이었지만, 이것은 나를 위한 이별주였다.
‘장례식장은 안가도 되겠다.’
“매 번 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미안해하니까, 내가 더 미안하다.”
내가 살고자 너를 죽이는데, 미안하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쥐구멍 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써 표정을 숨기고자 미소를 지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이제 점점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야. 너 내일도 회사 출근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래. 나에겐 내일이 있다.
“조심히 들어가라!”
“그래. 너도...”
‘나’가 두 팔로 크게 흔들며 인사했다. 점차 녀석이 멀어져간다. 나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얼마나 남았지?”
힐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나의 몸이 굳었다.
“이건...”
내 기억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갔다. 칼에 찔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피가 흐르고, 범인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휘두르던 그 때, 분명 범인의 손목에서 빛나던...
“하... 나였냐?”
허탈했다. 이제 ‘나’를 죽이는 범인은 없다. 내가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사라질 것이라.
-위잉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는 아내가 환하게 미소 짓는 사진이 보였다.
‘이 행복... 절대로 놓치지 않아.’
나는 급하게 근처 마트에 들어가 식칼과 모자를 샀다.
‘제발 늦지 않기를...’
이미 ‘나’가 가는 방향은 알고 있다. 술에 취해서 걸음이 느리니까, 빨리 뛰면 만날 수 있으리라.
-하아.
숨을 내쉬며 필사적으로 뛰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 사실이 내 머리 속을 채웠다.
가까스로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칼을 찔러 넣었다.
피가 얼굴에 튀며, 비릿한 냄새가 흘렸다. 의문이 가득한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그렇지만 이제 난 살아 있다.
4.
공원 화장실에서 칼과 옷가지를 처리하고 오는 길에 단 한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칼은 옷가지로 싸서 공원 연못에 던져 넣었고, 시간이 흐르면 모든 증거도 사라질 것이다. 술에 취한 취객이 공원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그렇게 기억되리라.
“여보. 나왔어.”
몸도 마음도 지쳤다. 이 마음을 위로해줄 아내의 존재가 절실했다. 그러나 집 안 어디에도 아내의 존재는 없었다. 단지 식탁 위에 한 장의 쪽지가 있었다.
-친구 만난다고 연락했는데 안 받아서 그냥 나간다! 냉장고에 생과일 쥬스 있으니까, 꼭 마셔!
아내의 쪽지를 보고, 냉장고를 열자 물병에 담긴 쥬스가 있었다. 안 그래도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끼던 터라 컵도 안 쓰고 입으로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침대 위로 드러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끼익.
방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깊은 잠에 빠진 사내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잠에 들었다.
“효과 좋은 수면제야. 내 마지막 배려니까. 잘 자.”
방 안은 금방 연기로 가득 찼다.
“친구를 죽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
유서는 특이한 점이 없었다. '나' 필체도 당연히 똑같다. 어색한 부분은 없이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사내의 모든 재산은 이제 잠시 후면 모두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혹시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해서, 안 죽이면 어쩌나 했어. 사실 불안했거든. 어쨌든... 나는 살았네?”
-풋 하는 웃음소리가 조용히 방 안에 울렸다.
작가의 한마디 :
[내가 환생하면 '나'를 안 찾을까? 만약 사고사였다면 그 사고를 막을까? 막는다면 두 번째 삶은 사라지는 걸까? 그 순간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라는 의문의 꼬리를 물고 탄생한 스토리였습니다. (세 번째 삶은???) 사실 생각만하던 스토리였는데, 쓸 기회가 있어서 한 시간만에 써내려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말이 다소 허점이 보이긴하지만... ㅎㅎ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