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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저녁 스며드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녁 스며드네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들이는 듯 했는데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 슬근 저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며 올리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빛 아래
그렇게 그렇게 스며드는 저녁
저녁 스며드네
강영은, 묵매(墨梅)
휘종의 화가들은 시를 즐겨 그렸다
산 속에 숨은 절을 읊기 위하여
산 아래 물 긷는 중을 그려 절을 그리지 않았고
꽃밭을 달리는 말을 그릴 때에는
말발굽에 나비를 그리고 꽃을 그리지 않았다
몸속에 절을 세우고 나비 속에 꽃을 숨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붓을 묻었다
사람이 안 보인다고 공산(空山)이겠는가
매화나무 등걸이 꽃피는 밤, 당신을 그리려다 나를 그렸다
늙은 수간(樹幹)과 마들가리는 안개비로 비백(飛白)질하고
골 깊이 번지는 먹물 찍어 물 위에 떠가는 매화 꽃잎만 그렸다
처음 붓질했던 마음에 짙은 암벽을 더했다
한하운, 목숨
쓰레기통과
쓰레기통과 나란히 앉아서
밤을 새운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죽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아직도 살아있는 목숨이 꿈틀 만져진다
배꼽아래 손을 넣으면
37도(三十七度)의 체온(體溫)이
한 마리의 썩어가는 생선처럼 뭉클 쥐여진다
아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 나의 목숨은
아직도 하늘에 별처럼 또렷한 것이냐
송재학, 눈물
눈물이 말라버렸다
너무 오래 눈물을 사용했다
물푸레나무 저수지의 바닥이 간당간당
물푸레 나뭇잎도 건조하다
일생의 눈물 양이 일정하다면
이제부터 울음은 눈물 없는 외톨이가 아니겠는가
외할머니 상가에서도 내 울음은 소리만 있었다
어린 날 울긋불긋 금호장터에서
외할머니 손을 놓치고 엄청 울었다
그 울음이 오십 년쯤 장기저축되어
지금 외할머니 주검에 미리 헌정된 것을 이제야 알겠다
그 잔나비 울음이야 얼마나 맑으랴
내 어린 날의 절명 눈물이었으니
김남조, 출발
남은 사랑 쏟아줄
새 친구를 찾아 나서련다
거창한 행차 뒤에
풀피리를 불며 가는
어린 초동을 만나련다
깨끗하고 미숙한
청운의 꿈과
우리 막내동이처럼
측은하게 외로운
사춘기를
평생의 사랑이
아직도 많이 남아
가슴앓이 될 뻔하니
추스리며 추스리며
길 떠나련다
머나먼 곳 세상의 끝까지도
가고 가리라
남은 사랑
다 건네주고
나는 비어
비로소 편안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