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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경, 사람
한문 수업 시간
정년퇴임 앞둔 선생님께
제일 먼저 배운 한자는
옥편의 첫 글자 한 일(一)도 아니고
천자문의 하늘 천(天)도
그 나이에 제일 큰 관심사였던
사랑 애(愛)는 더더욱 아니고
지게와 지게작대기에 비유한 사람 인(人)이었다
마흔을 훌쩍 넘은 지금도
사람 인(人)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등 기대고 있는 한 사람이 아슬하다
너와 나 사이가 아찔하다
하영순, 감사와 행복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이다
길을 가다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 담을 수 있어
나는
내 손에게 감사한다
언덕길 오르는
힘든 자에게
손잡아 줄 수 있는 여력이 있어
나는
나에게 감사 한다
내가 있어 세상이 있고
세상이 있어
내가 존재한다는 이 사실에 더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나희덕, 비 오는 날에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 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송승환, 마이크
빈 곳의 중심으로 응축되는 그녀의 말은 사물이다
사물들이 내 육체를 관통한다
내 입술에서 터져 나가 검은 무대의 벽면에 부딪친다
나는 부서지는 소리의 잔향을 듣는다
나는 말한다
공중에 풀어지는 푸른 잉크의 언어
다시 들린다
고두현, 지하철에서
잘못 내린 역에서 돌아가려고
남들 다 빠져 나온 출구
되짚어 들어가는데
이 길 먼저 지나간 사람들
뒷모습이 하나씩 지워진다
여기까지 나를 밀고 온 세월과
예고 없이 길을 막던 차단기
앞만 보고 걸어온 삶이
이토록 가볍게 지워지다니
터널 지날 때마다
언뜻언뜻 비치던 얼굴들도
아하
거미줄 같은 땅 밑 길
몸 낮추고 보폭 줄이며
느리게 걷는 법 가르쳐주려고
날마다 거울 저 쪽에서
그렇게 손짓하고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