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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심리] ROOM - 11. 후해(逅邂) - ①
게시물ID : panic_913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카스_네팔
추천 : 3
조회수 : 77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11/01 16: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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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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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탈출" : http://todayhumor.com/?panic_91197

11화 제목이 떠오르질 않아서 가제로 '후해(逅邂)'로 했습니다. 더 좋은 제목이
있으면 바꾸겠습니다. '후해(逅邂)'는 '해후(邂逅)'를 바꿔 본 것입니다.
ROOM은 다음 12화로 완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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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OM
                                                          

                                                                      akash_nepal


11. 후해(逅邂)


"뭐라 하더냐 의사선생님이?"
"회복이..어렵데요. 심장이 너무 오래 멈춰 있었다고. 뇌사..래요."
"에휴.......에휴......."

어머니는 땅이 꺼질 듯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공기가 너무 무겁다.
병원, 그것도 중환자실은 모든 것이 무겁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소리도 무겁고, 왔다 갔다 거리는 간호사들의 발걸음도 무겁다. 미동 없는 환자의 모습은 더없이 무겁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삐빅거리는 기계음도 무겁다. 그리고 그 무거움위에 가족들의 한숨과 무표정이 차곡차곡 쌓여 무게를 더한다. 숨이 막힐 것 같아서 밖에 나와 담배연기를 뿜어 보지만 그 연기조차도 무겁다.

돌발 상황이 터질 고비는 넘겼다 한다. 하지만 이틀 후,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것은 병세의 호전 때문이 아니었다. 중환자실이란 가능성이 있는 환자들만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

"...환자 상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동공반응이 전혀 없고, 심박은 있지만 자가 호흡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뇌파 검사결과 어떠한 반응도 현재 잡히지 않습니다. 상의해보시고 가까운 요양병원으로 옮기시길 권해 드립니다."

마스크를 끼고 주렁주렁 호스를 매단 채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여자가 내 누이라니.
남보다 더 남 같았던 존재.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 오랜 옛날의 기억일 뿐,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집을 나갔고 그 뒤부터 끊임없이 내 인생의 길목마다 초를 쳐왔던 덧없는 피붙이. 대신 합의를 보고, 대신 돈 물어주고, 대신 죄인처럼 파출소가서 각서 쓰게 하고 인생에 털끝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았던 존재. 너한테 줄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해 왔는데, 결국 이런 초라한 몰골로 눈앞에 나타나 마지막 남은 인정까지 요구하는 피붙이라니.

뇌사...뇌사라.
드라마에서나 보던 단어가 실상 닥치고 보니, 사람을 일찍 포기하게 만든다. 솔직히 할 수 있는 것이 연명치료 뿐이라면, 남아 있는 가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거의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 듯이 기름처럼 돈을 태우며 서서히 침몰해 가든가, 아니면 치료를 중단하든가.
아마 어머니와 나도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 밖으로 결정을 뱉어내야 하는 순간이 조만간 올 것이다.

"밤엔 제가 있을 테니까 들어가 주무세요."

어머니를 보내고 병실을 지키고 있자니 참 어색하다. 이렇게 둘이 한 공간에 있어 본 적이 있었던가.
모래알 같은 병원 밥을 억지로 우겨 넣은 뒤 휑한 병원 옥상에서 담배 몇 대를 피우고 병실로 돌아오니 더 이상 할 일도 없다. 침상위엔 아까 모습 그대로 그녀가 미동도 없이 누워 있다.

'너도 참 기구한 팔자다. 어쩌다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병을 얻어서...'

이미 국민학교 시절부터 난 그녀를 점점 멀리 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도 먼발치에 그녀가 나타나면 숨어 버리곤 했다. 병으로 인한 발작이 점점 심해지고 그 횟수를 거듭 할수록 난 싫은 티를 팍팍 내며 괜한 화풀이를 그녀에게 하곤 했다.

간질.

그때만 해도 뇌전증이란 이름대신 듣기만 해도 혐오스러운 그 이름으로 불릴 때, 모두들 쉬쉬했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들리던 이야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쟤네 누나 이상해."

그리고 오버스런 행동으로 몸을 떨던 그 연기 또한 분명히 기억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난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누이에게 화를 냈었다.
누이가 집을 나가 버린 후 나는 본격적으로 그녀를 저주했다. 가끔씩 사고친 소식이 집으로 날아오던 날이면 욕이 속사포처럼 터져 나왔고 그런 날은 술을 진탕 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지금 이 끔찍한 현실 앞에서 다시 생각해 보건데 아마 그녀도 살면서 억울한 일이 참 많았을 것 같다. 그리고 좀 외롭기도 하지 않았을까.
그녀에 대한 나의 분노와 학대는 미안함과 불쌍함이 바닥에 늘 깔려 있어 이리도 괴롭다.

'그 병만 없었어도 이렇게 살진 않았을 텐데...너나 나나...'

선택지 밖의 삶,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나의 몫이다. 억울하다.
이런 저런 억울한 상념들이 꼬리를 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슴이 조금씩 미어져 왔다.
문득 침상위에 힘없이 놓인 그녀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아...난 이 여자에게 참 모진 사람이었는데...사람은 왜 이리도 쉽게 무너지는가?
난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힘없이 펴진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작고, 생각보다 따뜻했다.

'철들고 나선 처음일 거야....니 손을 이렇게 잡아 보는 게..'

피곤함이 갑자기 몰려왔다. 이젠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잠이 온다. 이상하게도 병원에서 쪽잠을 자기 시작한 후부터 악몽을 꾸지 않는다. 내가 어머니를 보내고 밤을 병원에서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병처럼 따라다니던 두통의 기미도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니가 주는 선물인거냐?'

그렇게 누이는 그날 밤 떠났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난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고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아니 몇 가지 달라진 것은 규칙적으로 들리던 기계음이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는 것과 모니터에 단조로운 그래프를 그리던 바늘이 움직임을 멈췄다는 것.

난 의외로 담담하게 그녀의 손에서 내 손을 거둬들였다. 몸이 굳어서 인지 그녀의 손이 마치 악수를 하듯 내 손을 꽉 잡고 있어서 남은 손으로 하나하나 풀어내야만 했다.
.
.
.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그거...입에 동전하고 쌀 넣던 거...그걸 뭐라고 하죠?"
"반함말이라?"
"네...그거 좀 해서 보낼게요 내가."

그녀가 떠난 지 이틀째, 삼베옷을 입고 가지런히 손발이 묶인 채 관속에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녀가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쌀이 든 나무 그릇과 나무 젓가락을 받아 들고 그녀가 누워있는 관 앞에 가만히 앉았다.
누군가가 그녀의 입술을 벌려 주었다. 나는 그녀의 뽀얀 이를 바라보면서 입술 사이로 동전을 세로로 세웠고 그리고 그 벌린 입속으로 쌀을 흘려보냈다. 옛날 아버지에게 그랬듯이.

"일천 석……."
"이천 석……."
"삼천 석……."

이제 그녀는 저승길에서 남부럽지 않을 것이다.
잘 가라 누이여.
.
.
.
그녀의 유골은 아주 옛날 그녀와 내가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 전, 온 가족이 자주 놀러가던 강가에 뿌렸다. 수박도 먹고 아버지 등에 매달려 헤엄도 치고 매운탕도 끓여 먹던 곳.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머니와 나는 그때 그곳을 떠올렸다. 적어도 그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전이었고, 그곳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복한 추억이 남아 있던 곳이니까.

장례를 치르고 며칠이 지났을까, 그녀가 있던 정신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유품이 있는데 택배로 받을지 가지러 올지를 묻는 전화였다. 마침 출강하던 학원도 개강 전이었고 받아 온 휴가도 남아 있었기에 선뜻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녀가 최근 몇 년을 지낸 정신병원은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요양원 겸 병원이었는데 주로 장기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일기장인가봐요."

병원 원무과에서 누런 포장용지에 싸여 있는 동생의 유품을 받아 들고 나오다가 문득 그녀가 머물던 곳이 보고 싶어졌다.

"원생들이 단체 생활 중이라 숙소로 들어갈 순 없으세요. 그런데 이 환자분은....잠시 만요."

간호사는 담당의사에게 전화를 하는 듯 했다. 그리하여 난 담당의사와 함께 남자 보호사와 간호사까지 대동하고 그녀가 생활하던 방을 돌아 볼 수 있었다.

"환자분께서 우울증이 좀 있으셔서 폐쇄병동 1인실에서 생활하고 계셨어요. 다른 원생들하고 다툼이 잦았고 환자 본인이 원하기도 했었구요. 이방이에요"

그녀가 머물렀던 방은 아담했다.

"이상했던 게..환자가 약을 먹지 않고 숨겨두는 일이 최근에 많았어요. 이유도 말하지 않고 그저 도움이 안 된다고만 했죠. 방해된다고..."
"토파맥스 말인가요?"
"네 몇 가지 약이 같이 나가요. 안 먹으면 발작이 심해진다고 얘길 해도 말을 듣지를 않았죠."

방안에는 출입문 맞은편에 싱글침대가 있었고 침대 머리맡 벽면엔 거울이 붙은 철제 캐비닛이 놓여 있었다.

"환자는 거의 종일 침대에 누워 있길 좋아했어요. 가끔씩 저기..맞은편 벽에 그림을 그릴 때도 있었죠."

간호사가 가리키는 벽에는 그녀가 그린 그림들이 있었다.  자잘한 낙서 같은 것도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벽 전체를 채우고 있는 부채꼴 모양의 선들이었다.

"뭘 그린 건가요?"
"아마 그네 같아요. 그네가 왔다갔다 움직이는 모습 말이죠. 환자들이 간혹 자신의 마음이나 바람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네는 주로 뭔가 자유를 갈망한다거나..그런데 보통 그네를 그릴 땐 환자의 상태를 유심히 보죠."
"왜...그렇죠?"

'유심히 본다'는 말에 욕지기가 끓어올랐지만 궁금함이 더 컸기에 난 의사의 대답을 잠자코 듣기로 했다

"환자들은 언제나 빨리 나가고 싶어 하죠. 하지만 저희들 입장에선 치료가 안 된 상태에서 퇴원조치를 할 수는 없어요. 가족들 동의도 얻어야 하구요. 그네는 그런 환자의 심리상태가 나타난 것이라고 봐요. 그네는 계속 높은 곳을 향해 움직이지만 실제로 갈 순 없죠"
"그넷줄 때문에.."
"네..우울증 환자들에겐 자신의 처지를 더욱 비관하게 만들 우려가 있어서. 차라리 바다나 풍경 같은 걸 그리게 하죠. 막연하지만 평온함을 주니까.."
"창문은 다 저렇게 창살이 있나요?"
"아시다시피 병원 특성상 어쩔 수 없어요."
"문..도 밖에서 잠그나요?"
"네. 다 그렇진 않구요 폐쇄병동 1인실은 그렇죠."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설 때 간호사 한 명이 따라 나왔다.

"저... 보호자분?"
"네?"
"저...환자분이요. 우울증 증상이 심해져서 1인실로 옮기실 무렵에..."

그녀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면회를 왔던 분들이 있었어요. 여자분 두 분, 남자 한 분. 사실 환자분하고 제가 좀 친했거든요. 그 날 면회 왔다 간 후 한동안 힘들어 했던 것 같아요. 1인실도 그 이후에 옮겼구요."
"누군지는 알 수 없나요?"
"면회일지를 찾아 봤었는데 기록이 없더라구요."

<계속>

- 아카스_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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