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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비 내리는 밤
빗방울은 장에 와 흐득이고
마음은 찬 허공에 흐득인다
바위 벼랑에 숨어서
젖은 몸으로 홀로 앓는 물새마냥
이레가 멀다하고
잔병으로 눕는 날이 잦아진다
별마다 모조리 씻겨 내려가고 없는 밤
천리 만길 먼 길에 있다가
한 뼘 가까이 내려오기도 하는
저승을 빗발이 가득 메운다
박태일, 너희는 말 많은 자식이 되어
너희는 말 많은 자식이 되어
울산으로 부산으로 떠나고
잘 살아야지 못 먹고 못 입힌 죄로
사십 오십 줄엔 재산인 양 너희를 바랬어도
자식도 자라면 남이라 조심스럽고
어제는 밤실 사돈댁이 보낸 청둥오리 피를 받으며
한목숨 질긴 사정을 요량했다지만
무슨 쓰잘 데 있는 일이라고
밤도와 기침까지 잦다
몸 성하거라 돈은 정강키 쓰되 베풀 때는 헤푸하거라
누이는 자주 내왕하느냐 큰길 박의원에서 환 지어 보낸다
술 먹는 일도 사업인데 몸 보하고 먹도록 해라
그리고
정진규, 옛날 국수 가게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서 옛날 국수 가게를 만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 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손택수, 지렁이
잠깐 스쳐 가는 소낙비인 줄 알았다면
이렇게 아스팔트가 녹아나는 도로변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너는 어쩔 수 없는 미물이다, 생각하는 순간
지렁이 한 마리 밟지도 않았는데 꿈틀한다
언젠가 불에 데인 흉터처럼, 열이 많은
내 몸을 아스팔트 바닥 삼아 기고 있는 흉터처럼
속살까지 뜨겁게 달아오른 무리들
제 안의 남은 수분 속에
한여름의 열기를 다 빨아들일 듯
끝없이 말라비틀어져 가는 무리들
한방에선 해열제로 쓴다고 했던가
열 먹고 죽어 열을 푸는 약이 된다고 했던가
이열치열 지극히 뜨거워져서 아픈 몸을 서늘하게 식히는 것
어디 그것이 한방에서만의 일이겠는가마는
마디마디 몸을 지지며 염천을 향해 기어간다
회초리 자국 같은 붉은 화상 자국이 꿈틀꿈틀
내 앞의 길을 쓰라리게 휘감고 있다
전영관, 주소록을 다시 만들며
해마다 정월이면
수첩을 사서
주소록을 다시 만든다
출석을 부르듯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생각한다
버려지는 이름들
버려지는 주소와 전화번호
새로 올리는 이름들
새로 올리는 주소와 전화번호
누군가도 내 이름을 이렇게 버리고 있겠지
누군가도 내 이름을 이렇게 새로 올리고 있겠지
버려지지 않으려고
갈림길에서 떨고 있던 이름
다시 끼워 넣으면
불씨 한 점 가슴에 안은 듯
내 두툼한 수첩 주소록 호주머니가 따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