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곡의 음악과 장편소설로 엮은 이야기 『가상의 씨앗 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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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10 이곳
슘은 아나키가 그녀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는 별표시 된 참나무상자를 천천히 열어보았다. 상자 안은 물컹하고 검붉은 선지 같은 것들이 담겨진 핏빛 유리병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누군가의 행복과 희망이 타다 남아서 채 걸러지지 않은 상태로 응고된 이상한 핏물찌꺼기의 어지러운 향연. 왠지 아름다웠다.
'퐁'
하고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빨간 과즙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향기. 안심이 되었다.
'꼴깍'
하고 한 모금을 넘겨보았다. 따뜻했다. 까무룩 눈이 감기자 까매진 빛깔들이 달콤했다, 마치 코코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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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7 그곳
'오도도독. 오도도독.'
그녀는 그를 정확히 네 박자에 한 번씩 씹어 삼켰다. 마지막 남은 그의 머리는 왠지 다른 조직들보다 훨씬 더 강하게 뼈에 엉겨 붙어있는 것만 같아서 씹을 때마다 뼛조각들이 덜그럭거렸다. 해골에 엉겨 붙은 근육들 역시 뼛조각들과의 치밀한 결합 때문에 으깨고 씹고 삼키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빨들은, 뚫어져라 천장을 주시하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눈동자를 지휘자 삼아, 행여 박자를 놓칠세라 하행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듯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뚜르르륵 뚜르르륵 소리를 내며, 정확히 네 박자에 한 번씩, 뼛조각과 근육의 견고한 결합을 끊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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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음악과 글로 빚어낸 초현실.
소설음반 『가상의 씨앗 슘』
레게(Reggae)와 고스(Goth), SF와 철학, 음악과 문학 간의 물질교환.
『가상의 씨앗 슘』은 음반제작자로 활동해온 김상원의 소설음악 프로젝트 [프로젝트슘]의 첫 번째 작품이다. (사실 그는 십여 년 전 [아소토유니온]의 제작을 맡기 직전부터 '소설음반'이라는 형식을 구상했었다.) 글과 음악이 서로에게 자연스레 영향을 끼쳐가며 온전한 '소설음반'으로 완성 될 수 있도록, 11곡의 음악작업(작곡/작사/연주 등)과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집필 과정 모두를 김상원 단 한 사람이 꼬박 2년간 작업하였다.
여기에 신스팝 듀오 [전기흐른]의 흐른이 그녀 특유의 담담함에 다채로움을 더한 목소리로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슘을 노래하였으며, (Track 01, 02, 05, 06, 07, 08, 10) 섬세한 터치의 초감각 테크니션 [악퉁]의 임용훈이 2곡의 드럼을 연주하였다. (Track 06, 09)
- 줄거리
뇌 복제와 신경네트워크가 구축된 24세기. 모든 노동은 복사뇌를 장착한 클론들에게 전가되고, 모든 결정은 아나키(Anarchy)라는 사법알고리즘에게 위탁된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구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인간들은 복사뇌 클론들이 전송하는 다중감각에 빠져 한가로이 새로운 종(種)으로의 진화를 모색하게 된다. 아나키는 이러한 다중감각이 인간들의 욕망을 급증시켜 결국 클론노동의 생산속도를 따라잡아서는 인간을 자원고갈에 처하게 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상계의 새로운 씨앗인 '슘(Shume)'을 탄생시키는데……
- Track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