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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리고 그것에 예외란 없지>
게시물ID : panic_916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못된야옹
추천 : 13
조회수 : 943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11/24 01: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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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불필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리고 그것에 예외란 없지. - 못된야옹의 즉흥 단편
 
 
 
 
여자친구와의 이별로 하루 세끼 술로 연명하는 민석은 오늘 역시 산송장과 다름없는 초췌한 몰골로 집에서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지현아! 왜 날 떠나간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냐고!! 허어!!
 
애꿎은 술병에 대고 고함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척이나 안쓰러움을 자아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하늘이라도 감복한 것인 지, 순간 그런 그의 앞에 깔끔한 제복차림의 은발 여성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있는 듯 하늘거리는 긴 머리칼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천사? 악마? 인간? 몸에서 푸르스름한 오오라가 일렁이는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 딴 건 몰라도 빼어난 외모가 가히 신의 수준에 도달해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허나, 그 기이한 광경에 민성은 놀라기는커녕 마치 여성이 보이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변화도 없이 계속 대성통곡을 이어갈 뿐이었다.
 
“지현아!! 지현아아!!! …!!
 
그렇게 한참동안 무심한 눈으로 민성을 내려다보고만 있던 여성은 끝내 자신이 졌다는 듯, 분한 얼굴로 민성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자신의 외모를 최대한 활용해 기품 있고, 우아한 동작으로. 하지만 민석의 반응은 똑같았다. 여성의 입이 거칠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봐요, 나 안 보여요? 정말 안 보여?? 안보일 리가 없을 텐데….야! 진짜 안보여? 시발 이 새끼가 장난하나….”
“보여.”
“아, 그래요?”
“욕하지 마.”
“안했는데….”
 
여성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수줍게 말했다. 당황과는 거리가 먼 민석의 뜬금없는 박력에 묘한 매력을 느낀 탓이다. 하지만 그녀는 프로답계 언제 그랬냐는 듯 본연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렇게 술만 마신다고 뭐가 해결되나요?”
“뭐?”
“그런 짓은 건강만 망치는 어리석은 행위랍니다.”
“상관없어.”
“그녀가 돌아와도?”
 
민성의 시선이 처음으로 술병이 아닌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돌아오게 해드릴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게 정말이야?”
“물론이죠, 그것 때문에 이렇게 당신 앞에 나타난 거니까.”
“무슨 허튼 수작이면 가만 안두겠어!”
“어머? 가만 안 두면 어쩔 건데요? 제가 이래 보여도 악마인데, 인간 주제에 너무 건방지기 짝이 없네요.”
 
여성은 자신을 악마라고 소개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번만큼은 제법 효과가 있던 모양인지 민석은 약간 주춤하는 눈치였다. 그래서일까? 여성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걱정 마요, 해치지 않아요. 대신 특별한 능력을 선물로 드리죠. 고작 인간 주제에 이 나를 설레게 한 보상이에요, 호홋!”
 
여성은 품에서 작은 파란색 노트를 꺼내 민석에게 건넸다. 민석은 얼떨결에 노트를 받긴 했지만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 노트는 ‘생각노트’예요. 상상하고 원하는 일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현실이 되죠. 과거엔 어떤 반푼이에게 줬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적도 있던 전설의 노트랍니다. 반푼이 이름이 ‘죄순실’이었던가? 들어본 적 없어요? 아님, 말고! 아무튼, 어때요? 침 매력적인 노트 아닌가요? 지금의 당신에겐 꼭 필요한 물건 같은데.”
“사실인가?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악마는 거짓말 따윈 안한답니다. 또한 쓸모없는 일 역시 하지 않죠. 정 못 믿겠으면 인터넷에 ‘LED촛불’이라고 검색이라도 해보시든가 깔깔깔.”
“왜, 하필 나인거지?”
 
민석의 진지한 물음에 꽤나 표독스럽게 웃고 있던 여성은 웃음을 멈추곤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곤 민석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말했죠? 쓸모없는 일은 하지 않아요, 그냥 당신의 바람이 통한 거라 생각해요, 후후. 그럼 분발해요~? 예의 없는 민석씨~!”
 
그 속삭임을 끝으로 여성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민석의 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민석은 그 모습에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다. 이내, 홀로 남은 그는 여성이 주고 간 노트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펼치고는 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여성의 그 터무니없는 말을 모두 믿는 눈치였다, 그것도 생전 처음 본 사람인지도 불확실한 것의 말을 말이다. 아무래도 가슴 속 중2병의 씨앗이 제법 자라나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 적은 듯,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든 그는 저만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책상위에 놓인 그의 스마트폰이 불을 밝힌다. 민석은 부리나케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김지현’
 
발신인을 확인한 민석의 입 꼬리가 어두운 저 밤하늘, 요사스럽게 걸려있는 초승달만큼이나 요사스럽게 휘어간다.
 
 
 
그로부터 정확히 3일 뒤.
세간은 그동안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다, 끝내 죽음으로 끝을 맺은 연쇄 살인범 ‘강 씨’의 자살과,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살해한 ‘김 씨’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지독한 열병을 앓고 있었다.
 
 
 
***
 
 
 
피로 물든 민석의 손에 들린 노트를 낚아챈 여성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노트를 쓱쓱 닦아내며,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내, 뒤에 서있는 어리바리한 표정의 어린 소년에게 노트를 건네며 말했다.
 
“자, 알겠어? 이런 식으로 하면 돼. 다음부터는 혼자 할 수 있겠지?”
“대단해요, 선배! 정말 가, 감사해요!”
“명심해! 도와주는 건 이번뿐이야. 다음부터는 국물도 없는 줄 알아!”
 
소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눈물이라도 뚝뚝 떨어트릴 기세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데, 저놈의 인간들이라는 게 참 성가셔졌단 말이야. 이 두 년 놈만 봐도 그래. 김지현 그년은 지 팔자가 강민석한테 뒈지는 팔자인데, 그냥 좀 받아들이면 안 돼? 폭력 좀 썼다고 바로 해외로 도주나 하고 말이야! 거기다 강민석 이 병신은 기를 쓰고 그년을 찾아내 죽여도 모자랄 판에 방구석에서 술이나 처마시고 있고…. 드라마가 문젠가? 왜 그렇게 지들 운명을 거스르는 거야, 대체! 어차피 달라질 것도 없는데…. 정말 내가 이놈의 일을 때려 치든가 해야지!!”
“열 내지 마세요, 선배…. 죄송해요…. 모처럼의 휴가인데, 저 때문에….”
“알면 그런 멍청한 표정 짓지 말고, 앞으로 잘 해! 알겠어?!”
“…네.”
“가자!”
 
앙칼지게 소리친 여성은 소년의 손을 끌고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온통 피로 물든 축축한 방 안에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두 시신만이 처참하게 널브러져있을 뿐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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