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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만약이라는 약
게시물ID : lovestory_916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32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4/14 17:26:50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오은, 만약이라는 약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라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바지에 커피를 쏟지 않았더라면

승강기 문을 급하게 닫지 않았더라면


내가

시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좋아했다면

대화보다 침묵을 좋아했다면

국어사전보다 그림책을 좋아했다면

새벽보다 아침을 더 좋아했다면


무작정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날 그 시각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너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말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닦아주는 데 익숙했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앞을 내다보는 데 능숙했다면

만약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하루하루를 열고 닫지 않았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불고

읽다 만 책이 내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만약 내가

어젯밤에 이 책을 읽지 않았었더라면

 

 

 

 

 

 

2.jpg

 

도종환, 생애보다 긴 기다림




밤사이에 산짐승 다녀간 발자국밖에 없는데

누가 오기라도 할 것처럼

문 앞에서 산길 있는 데까지

길을 내며 눈을 쓸었다

이제 다시는 당산나무를 넘어오는 발소리를

기다리지 말자 해 놓고도 못다 버린 게 있는 걸까

순간 순간 한 방울씩 녹아내린 내 마음도 흘러 고이면

저 고드름 같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동안

종유석 같은 고드름이 댓돌 위에 떨어져 부서진다

기다리는 것 오지 않을 줄 늦가을 무렵부터 알았다

기다림이란 머리 위에 뜨는 별 같은 것인지 모른다

내가 내게 보내는 화살기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길이 눈에 덮여 지워지고

오직 내 발자국만이 길의 흔적인 눈 속에서

이제 발소리를 향해 열려 있던 귀를 닫는다

누군가를 기다리던 날들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천천히 지워진 다음날 새벽

아니 그 새벽도 잊어진 먼 뒷날

창호지를 두드리는 새벽바람 소리처럼 온다해도

내 기다림이 완성되는 날이 그날쯤이라 해도

나는 섭섭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접은 것은 어쩌면 애타는 마음이나

조바심인지 모르겠으나

생애보다 더 긴 기다림도 있는 것이다

기다림을 생애보다 더 길게 이 세상에

남겨놓고 가야 하는 생도 있는 것이다

 

 

 

 

 

 

3.jpg

 

이장욱, 샌드 페인팅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저녁에는


소년은 날카로운 쇠못으로 자동차의 표면을 긁으며 걸어가고

가늘고 긴 선이 대안으로 건너가 교각을 이루고

교각이 무너지자 보고 싶은 얼굴이 자라고

얼굴이 무너져 황혼의 지평선으로


모든 것이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사막이라고 부른다

밤거리에 혼자 서있는 사람이

모든 것에 동의하는 중이다


어디 안 보이는 곳에서 모래가 집요하게

나를 생각하고 있다

 

 

 

 

 

 

4.jpg

 

유홍준, 사진관 의자




참 이상한 곳에 놓여진 의자군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기지 않고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졸지 않고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창 밖

지나가는 차 바라보지 않네

참 적막한 곳에 놓여진 의자

외톨박이 의자군, 오늘도

혼자뿐인 의자 단 한 번도

엉덩이가 따뜻해져 본 적 없는 의자

누구랑 마주 앉아서

얘기를 하나, 얘기를 듣나

오늘도 검은 커튼 뒤에 앉아

혼잣말만 하는 의자

독백의 의자 그래도

단정한 의자군, 진짜보다 예쁜

가짜 꽃바구니 두어

제 곁에 가져다 놓고 누구는

이 의자 한 가운데에 앉아

돌사진, 독사진을 찍고

누구는 졸업사진, 영정사진을 찍고

나는 또 새 이력서에 붙일

굳은 표정의 증명사진 몇 장

시선이 없는 내 청춘의

무표정 몇 장을 남기네

 

 

 

 

 

 

5.jpg

 

고옥주, 끈질기게 나를 찾아다니는 전화




몇 개의 숫자 속에서 나는 숨지 못한다

무수한 기억을 뚫고 네가 나를 추적해 올 때

뇌세포보다 더 많이 입력된 정보와 영상 사이로

나는 아무 기억도 상상력도 없다

파묻힌 찬 세월 속에

얼음공주 미이라 손가락의 문신처럼

움찔거리며 살아나는 네 그리움을 이해할 수 없다

죽었던 모기가 다시 살아난다면

해체된 지뢰가 다시 폭발한다면

끝난 사랑이 다시 불붙는다면

나는 갈갈이 찢어지고 말리

날 찾지 마

빠득빠득 잊혀지고 싶어

부족함이 가득한 이 세상

지난 시간을 내게 남겨 줘

묻힌 인연들이 제가 세운 둥지를 틀어 안고

흘러간다

흐르는 대로 흘러가면 좋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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