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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도보순례
나 돌아갈 것이다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질 것이다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짐짓 무시할 것이다
나 돌아갈 것이다
무심했던 몸의 외곽으로 가
두 손 두 발에게
머리 조아릴 것이다
한없이 작아질 것이다
어둠을 어둡게 할 것이다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즉각 반응할 것이다
하나하나 맛을 구별하고
피부를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눈을 쉬게 할 것이다
이제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할 것이다
생활하기 위해 생존할 것이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 것이다
양성우, 하루가 천날 같아도
네 마음이 너무나도 어둡구나
네 가슴을 돌같이 누르고
네 눈을 구름같이 가리는 것이
많으니
네 마음이 몹시 무겁고
숲처럼 아직도 그늘이 깊구나
사는 것 같지도 않은 네 삶속에서
겹으로 쌓인 가시 위에
날마다 거듭하여 네 몸을 던지고
넋마저 벼랑 끝에 흩날리느냐
그렇지만 은빛 물결 출렁이는
눈물의 강에
네 운명의 작은 배를 띄우지 마라
한 가닥 거친 바람에
네 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네 모든 하루가 천날 같아도
안상학, 벼랑의 나무
숱한 봄
꽃잎 떨궈
깊이도 쟀다
하 많은 가을
마른 잎 날려
가는 곳도 알았다
머리도 풀어헤쳤고
그 어느 손도 다 뿌리쳤으니
사뿐 뛰어내리기만 하면 된다
이제 신발만 벗으면 홀가분할 것이다
강은교, 빗방울 셋이
빗방울 셋이 만나더니
지나온 하늘
지나온 구름덩이를
생각하며 분개하더니
분개하던 빗방울 셋
서로 몸에 힘을 주더니
스스로 깨지더니
침 크고 아름다운
물방울 하나가 되었다
강연호, 신발의 꿈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벗어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 짝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온 길이 있었을 것이다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혹은 빈 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낡고 해어져 저렇게 버려지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내팽개치고 싶은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 던졌지만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누가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아 맨발, 이라는 말의 순결을 꿈꾸었다는 것을
그러나 신발은 맨발이 아니다
저 짓밟히고 버려진 신발의 슬픔은 여기서 발원한다
신발의 벌린 입에 고인 침묵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