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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어떤 나무의 말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관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김희업, 담배 끊은 파이프
연기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입술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얼굴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사내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이영춘, 세월
한 폭도 못 되는 내 손등을 들여다보면서
손등 면적보다도 넓고 깊게 골진
세월을 읽는다
애써 공들이지 않았어도
애써 힘들이지 않았어도
이토록 골 깊이 뿌리내린 세월
하많은 그 광음 속에
진정 내가 심은 것은 무엇인가
새삼 내 정원이 텅 빈 것을 알았을 때
어이없게도 그 텅 빈 사잇길로
구름 몇 조각이 흘러가고 있었다
박연준, 서랍
사랑하는 사람아
얼굴을 내밀어보렴
수면 위로
수면 위로
네가
떠오른다면
나는 가끔 눕고 싶은 등대가 된다
원구식, 탑
무너지는 것은 언제나 한꺼번에 무너진다
무너질 때까지 참고 기다리다 한꺼번에 무너진다
탑을 바라보면 무언가
무너져야 할 것이 무너지지 않아 불안하다
당연히 무너져야 할 것이
가장 안정된 자세로 비바람에 천년을 견딘다
이렇게 긴 세월이 흐르다 보면
이것만큼은 무너지지 않아야 할 것이
무너질 것 같아 불안하다
아 어쩔 수 없는 무너짐 앞에
뚜렷한 명분으로 탑을 세우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면
맨 처음 탑을 세웠던 사람이 잊혀지듯
탑에 새긴 시와 그림이 지워지고
언젠간 무너질 탑이 마침내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디에 탑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탑을 바라보면 무언가
무너져야 할 것이 무너지지 않아 불안하고
무너져선 안 될 것이 무너질 것 같아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