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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록, 입 속의 무덤
이름이 있다
다른 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둔
아무도 없는 밤에 아껴서 발음하는
병약한 아기의 부모가 누구도 외우지 못할 만큼 길게 지은
그러나 결국 악령에게 들켜버린 이름처럼
부르지 않으려 기억하는 이름이 있다
여러 번 개명하지만 곧 들키고 마는
입속에 묻힌 이름이 있다
강유정, 푸른 삼각형
강이 만든 푸른 삼각형
그 건너에 무엇이 있어
모서리에 다쳐 뒤척이는 강물
벗어 버린 옷가지 몇 벌
꿈이 길어 짧은 이불을 당겨 덮는
당겨 덮는 세상
강윤후, 봄눈
단념하듯 봄눈 내린다
가로수들이 속죄하는 모습으로
눈을 맞으며 서 있다 아직
집에 닿지 못한 길들이
새로 갈리며 세상을 넓힌다
추억이 많은 길들은 적막하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약속도 없이
벌어지고 또 얼마나 많은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았는가 때늦어 당도한 눈발들은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한다 다만
하루살이처럼 떠돌며 망각을 부른다
높은 가지 끝에서 찬란한 빛으로 소멸하는
한 점 눈발을 두고서 나는 이제
다른 예감을 품을 수 없다 언젠가
때가 오면 띄어야 할 부고(訃告)가
내게도 있다는 걸 알 따름이다
한 번 갈린 길들은 결코
되돌아올 줄 모른다 나는
세월보다 빨리 늙어간다
김소월, 잊었던 맘
집을 떠나 먼 저곳에
외로이도 다니던 내 심사를
바람 불어 봄꽃이 필 때에는
어찌타 그대는 또 왔는가
저도 잊고 나니 저 모르던 그대
어찌하여 옛날의 꿈조차 함께 오는가
쓸데도 없이 서럽게만 오고가는 맘
정재학, 반도네온이 쏟아낸 블루
항구의 여름
반도네온이 파란 바람을 흘리고 있었다
홍수에 떠내려간 길을 찾는다
길이 있던 곳에는
버드나무 하나 푸른 선율에 흔들리며 서 있었다
버들을 안자 가늘고 어여쁜 가지들이 나를 감싼다
그녀의 이빨들이 출렁이다가 내 두 눈에 녹아 흐른다
내 몸에서 가장 하얗게 빛나는 그곳에 모음(母音)들이 쏟아진다
어린 버드나무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깊은 바다였다니
나는 그녀의 어디쯤 잠기고 있는 것일까
깊이를 알 수 없이 짙은 코발트블루
수많은 글자들이 가득한 바다
나는 한 번에 모든 자음(子音)이 될 순 없었다
부끄러웠다
죽어서도 그녀의 밑바닥에 다다르지 못한 채 유랑할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반도네온의 풍성한 화음처럼 퍼지면서 겹쳐진다
파란 바람이 불었다
파란 냄새가 난다
버드나무 한그루 내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