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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대숲에서
숭숭 하늘 향해 솟은 나무 그늘에 서 있었다
곧고 푸른 지조가 만들어낸 텅 빈 육체에서
플루트 소리가 났다
위로 뻗어가느라 아무것도 품지 못한 생애가
한 번은 꽃 피고 한 번은 꽃 지고 싶다고
우수수 잎을 날려보냈다
나이를 숨기느라 마디 진 등뼈 타고
초록을 물들이며 노랗게 솟는 대쪽의 항진(亢進)
창공을 버티느라 굵어지지 않고
다만 단단해진 울대가
무성한 잎을 떨어뜨렸다
위로 뻗기만 하는 삶을 받치려고
실타래처럼 엉킨 땅 아래 상념들 스산하게 흔들렸다
너 한 번 꽃 필 때마다 하늘 향한 가지 꺾이고
너 한 번 꽃 피려고 무너진 자리
이문숙, 슬리퍼
지압 슬리퍼를 팔러 온 남자를 보고 생각났다
작년에 신다 책상 아래 팽개쳐뒀던 슬리퍼
먼지를 폭삭 뒤집어쓰고 까마득 버려져서도 슬리퍼는
여전히 슬리퍼다
기억이란 다 그런 것이다
기억 속에는 맨홀 뚜껑 같은 확실한 장치가 없어서
그 아래 무언가를 고치러 들어간 사람을 두고도
꽉 뚜껑을 닫아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 남자가 질식하건 말건
그러다 숨을 놓기 직전
고철 덩어리 같은 기억을 붙들고서야
아차 뚜껑을 열어보는 것이다
어쨌건 물건이라는 건 마지막이라는 게 없어서
먼지만 활활 털어버리면 또 슬리퍼가 된다
망각의 먼 땅을 털벅거리며 돌아다니고서도
금방 뒤축이 닳아빠진 슬리퍼로 돌아온다
작년 이맘때 어디서 무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발을 충실히 꿰차고
슬리퍼는 또 열심히 끌려다닐 것이다 저러다가도
슬리퍼는 또 책상 아래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처박힌다
기억이 그렇게 시킨다면
케케한 먼지와 어둠을 거느리고
누군가 슬리퍼를 사납게 끌며 또 어두운
복도 저쪽으로 사라진다
백무산, 경계
누가 이런 길 내었나
가던 길 끊겼네
무슨 사태 일어나 가파른
벼랑에 목이 잘린 길 하나 걸렸네
옛길 버리고 왔건만
새 길 끊겼네
날은 지고
울던 새도 울음 끊겼네
바람은 수직으로 솟아 불고
별들도 발 아래 지네
길을 가는 데도 걷는 법이 있는 것
지난 길 다 버린 뒤의 경계
아, 나 이제 경계에 서려네
칼날 같은 경계에 서려네
나아가지 못하나 머물지도 못하는 곳
아스라히 허공에 손을 뻗네
나 이제 모든 경계에 서네
이은봉, 사루비아
골목길 어디
부서져 딩구는 장난감 병정들
그 먼 장난감 나라로
즈의 사내
오오, 미운 사랑을 찾아서 떠난
누이야
네 아이 슬픈 보조개
네가 남긴 설움이
여기 이렇게 한점
붉은 눈물로 피었고나
정다운, 당나귀처럼
어떤 절망은 사소해질 것이라고 말하지 마라
모든 밤은 아침을 밟고 걸어온다
사람들의 구두코가 검은 것은
기름진 아침의 살점으로 늘 반들거리기 때문이다
자루는 신발장보다 크고 우리는 때로
그것을 소금으로 채울 만큼 약삭빨라
물을 만나면 넘어져 일어나지 않았을 뿐
이를 부딪치면 별들이 튀어 오른다
하늘에 별이 떴다, 라고 말하면서
일어나지 않았을 뿐 고약한 추위였다
자루는 천천히 흐물흐물해졌고 우리는 손을 들어
이토록 작고 가볍다고 흔들어 댔다
당나귀처럼 헹헹 웃으면서
쭈그러든 절망을 팔러 갈 수 있었다
잔돈을 흔들며 돌아오는 길은
머리카락에 매달린 소금 알갱이들이 잘강이는 소리
바삭바삭한 밤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헹궈도 사라지지 않는 자루
저도 모르게 그 안에 솜을 쑤셔 넣고
물속에 드러누운 채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밤
하늘에 별이 가득하고 입술은 파랗고
거대한 자루 위에 누워 후회하는 밤
물먹은 밤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다
모든 밤은 아침을 밟기 위해 걸어간다
우리는 때로 사소한 소금을 한 주먹 쥐고
여러 번 헹궈 낼 수 있었을 뿐
어떤 절망도 결코 사소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