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박정만, 죽음을 위하여
간(肝)이 점점 무거워 온다
검푸른 저녁 연기 사라진 하늘 끝으로
오늘은 저승새가 날아와서
하루 내내 울음을 대신 울다 갔다
오랜 만에 일어나 냉수를 마시고
한 생각을 잊기 위해 뜻없이 책을 읽고
일없이 고향에 돌아갈 꿈을 꾸고
그러다가 가슴의 통증을 잊기 위해
요 위에 배를 깔고 주검처럼 납작 엎드리었다
여봅시오, 여봅시오
하늘 위의 하늘의 목소리로
누군가 문 밖에서 자꾸만 날 부르는 소리
혼곤한 잠의 머리맡에
또 저승새가 내려와 우는가보다
나 죽으면 슬픈 꿈을 하나 가지리
저기 저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애간장 다 녹아나서
흐르고 흘러도 언제가 은빛 기러기가 되는 곳
그곳에서 반짝이는 홍역 같은 사랑을
아픔이 너무 깊어 또 눈을 뜬다
아무도 없는 방에
누군지 알 수 없는 흰 이마가 떠오르고
돌멩이 같은 것이 자꾸 가라앉는다
어서 오렴, 나의 사랑아
신열 복숭아 꽃잎처럼 온몸에 피어올라
밤새 헛소리에 시달릴 때도
오동잎 그늘 아래
찬 기러기 꽃등처럼 떠날 때에도
분홍빛 너의 베개 끌어안듯 기다리었다
한세상 살다보니 병(病)도 흩적삼 같다
김달진, 샘물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보다
물속에 구름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
채호기, 너
머릿속에 들어 뇌신경을 또각또각 밟고 다니는 것.
밥 먹고 세수하고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음악을 들을 때, 거리를 걸을 때
너는 언제나 꿀렁거리며 나에게 부딪치고, 흘러넘쳐 머리카락이 이마에 닿고
혀를 휘두르듯 내밀어 융털을 쓸거나, 주먹으로 가슴을 파들어오고
피부처럼 붙어서 벗을 수 없는 것
항상 물렁물렁하고 구불구불하고 찐득찐득하고 튀어나오고
빨아들일 듯 패인 깊이 뿐
사랑이란 걸죽한 액체 속에 너란 건 항상 나와 뒤섞여 있는 것
어떤 느낌이 감각의 힘줄을 거슬러 뇌의 가닥을 지그시 잡듯이
너에게서, 네가 있는 몸에서 꿰뚫고 솟아나는 내 몸에서 뚝뚝 흐르는 것
녹아 흘러내리는 것이라는 걸. 내 손이, 네 몸이 알고 있는 너
나는 비로소 너를 겪는다
시각이나 촉각이 아닌 살 속에서 꿈틀거리는 힘의 감각
목적도 없이 방향도 없이, 살아 뜀뛰고 있는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떤 운동에 의해
문덕수, 생각하는 나무
나무는 어딘지 먼 길을 가고 있다
가다가 가만히 머뭇거리며 고독을 느낀다
가지를 흔든다. 무엇인가 골똘히 사유한다
보이지 않는 지맥(地脈)에까지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을 전한다
안으로 지닌 생명의 그지없는 중량을 가뜩히 느껴 본다
받들고 숨 쉬는 하늘과 구름과 산새의 무게를 균형해 본다
먼 불안의 방황에서 돌아오듯
이제 숨 막히는 긴장을 푼다
한 잎 두 잎 목숨을 떨어뜨린다
가볍고 서운한 안으로 충만해 오는 희열이 있다
가지를 휘감아 울리는 비상(飛翔)의 흐느낌이 있다
발가벗은 채
나무는 귀를 기울여 본다
김기태, 가뭄
울음은 뜨거워지기만 할 뿐
눈물이 되어 나올 줄 모른다
힘차게 목젖을 밀어 올리지만
아직도 가슴속에서만 타고 있다
매운 혀 붉은 입을 감추고
더 뜨거워질 때까지 더 뜨거워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