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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Ver2] 경계의 끝을 넘어...
게시물ID : panic_918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못된야옹
추천 : 10
조회수 : 76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6/12/20 00:3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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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빛하늘. 분명 아침 일기예보로 서울에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릴 것이란 정보는 입수했지만, 이토록 짙은 회색의 날씨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군다나 서울을 벗어 난지가 언제인데. 그래서일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찜찜했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매일 같은 야근으로 찌든 피로를 털어낼 수 있다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모처럼 여자친구와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인데 왜 이토록 즐겁지가 않을까? 그 어떤 신나는 곡을 틀어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건 분명 이 막연한 꺼림칙함이 원인일 것이고, 그 막연한 꺼림칙함은 비단 나 혼자만의 감각이 아닐 것이었다.
 

“오빠, 그냥 우리 여행 다음으로 마룰까?”
 

긴장된 얼굴의 현주의 이 말 한마디로 확실해졌다. 현주 역시 말은 안 해도 지금까지 묵묵히 이 감각을 참아왔던 게 분명하다.
 

“…그럴까?”
 

평소 같았음 어림도 없었다. 아니, 어제 밤까지만 해도 이런 말이 오갈 거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막연한 찝찝함 하나로 여행이 틀어질 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난 언제부턴가 차창에 휘감기고 있는 기분 나쁜 안개를 바라보았다. 습하다. 여름의 장마철이라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12월의 겨울이다. 대체 이 습기는 뭐지? 난 차창에 달라붙은 습기의 원흉이라 짐작되는 안개를 유심히 관찰했다. 뭐라 설명해야 좋을까? 실? 아니, 머리칼? 그래, 머리칼이다. 여자의 긴 머리칼. 그것도 마치 살아 숨 쉬듯 기묘하게 꿈틀대는 이질적인 머리칼. 난 뜬금없이 이 ‘안개의 머리칼을 모아 가발을 만들면 어떨까?’ 라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곤 바보처럼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옆자리의 현주가 단발마의 비명 같은 한마디를 날렸다.
 

“오빠, 앞에!!”
 

난 현주가 보는 앞에서 남자답지 못하게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우악스럽게 돌렸다. 도대체가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짐작조차 안가는 육중한 덤프트럭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내 차체를 스치며 사라졌다. 이내 타이어가 내는 소름 돋는 마찰 소리가 고막을 뚫을 듯 거세게 울려 퍼졌고, 난 필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이이익-
 

중앙선을 넘어 까마득한 절벽으로 이어지는 가드레일 앞에서 차는 간신히 주행을 멈췄다. 난 한동안 핸들에 머리를 묻은 채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쥐죽은 듯 소름 돋는 정적만이 전신을 감쌌다. 그래, 차창에 휘감겼던 그 머리칼처럼. 내가 놀란 건 갑작스럽게 우릴 덮쳤던 덤프트럭 때문이 아니었다. 난 똑똑히 보았다. 차창에 달라붙은 그 기묘한 머리칼 속에서 피어나는 얼굴을. 살기만이 느껴졌던 그 찢어진 눈을. 핸들을 꺾는 그 와중에도 사라지지 않고 우릴 노려보던 그 소름 돋는 여성의 얼굴을 말이다. 난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핸들에 묻었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하-
 

없다. 소름 돋는 그 여자의 표독스러운 얼굴도, 그 이질적이던 머리칼의 안개도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내 환상이라는 듯, 청명한 하늘 아래 위태롭게 걸려있는 차안에서 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집에…가자….”
 

하지만 이건 단순한 환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경계의 끝을 넘어….]
-못된야옹의 단편
 

 

 

“…괜찮냐?”
 

즐겨 찾는 단골 포장마차. 뜨끈한 어묵 국물만큼이나 푸근한 얼굴의 가게 이모가 소주 한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기 무섭게 석훈은 내 잔에 술을 따르며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그래, 녀석 치곤 꽤나 오래 참았지. 고등학교 시절부터 유난히 말이 많던 수다쟁이 녀석. 그런 녀석이 이만큼이나 조용히 있었다는 건 그만큼 내 기분을 살폈단 것이고, 그만큼 날 배려해 줬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난 말없이 잔을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들이켰다. 이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는 차면서도 얼얼한 감각을 느낀다. 언젠가 맥주파인 내게 석훈이 그랬지.
 

[야! 소주는 인생의 쓴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술이라고! 물론 값도 싸고….]
 

왠지 지금은 그때 석훈이 했던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인생의 맛이 있다면 지금의 내 인생의 맛은 딱 이 맛이겠지. 석훈은 내가 잔을 비우길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잔을 채워주었고, 난 다시금 식도를 감싸는 그 차면서도 얼얼한 감각에 도취되었다. 그렇게 두 잔, 세 잔, 네 잔…. 이성이 마비되기에는 턱없이 짧았던 해방감이었지만 왠지 이정도면 됐다 싶었다. 이정도면 충분히 차가워졌다.
 

“석훈아….”
“어, 그래.”
“하-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내가 뱉어낸 뜨거운 한 숨이 채 사라지기도 석훈에 의해 잔이 다시금 채워진다. 마음속에 그녀와의 추억을 하나, 둘 채워가던,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그때의 내 모습처럼. 하지만 내 잔은 이제 채워지지 않겠지. 괜스레 술잔이 야속하게 느껴져 이 얼얼한 감각조차 화가 난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석훈아? 어? 내가 대체 뭘….”
 

참았던 눈물이 또르르 볼을 타고 흘렀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럴까…?”
 

일주일 전, 갑작스러운 현주의 이별 통보는 내 행복했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렸다. 단 세 글자였다. ‘헤어져’라는 짤막한 세 글자. 따뜻함이라곤 쥐뿔도 없는 냉랭한 한 마디. 그것도 얼굴도 없는 문자메시지였다. 하지만 그 한마디의 문자메시지에서 난 현주의 차갑게 식은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서 이토록 짧은 한마디에 인생이 일그러지긴 처음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유가 뭐래? 너네 잘 지냈었잖아.”
 

석훈이 묻고 있었지만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왜? 대체 갑자기 뭐 때문에? 난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현주는 그 문자를 끝으로 내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고,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았고, 집에 찾아가도 현주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어제는 그녀가 다니는 직장까지 찾아가보았지만 현주는 이미 직장도 그만둔 상태였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내 앞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 석훈아, 나 어쩌냐? 난 정말 현주 아니면 안 되는데, 난 어떡해?”
“다른 남자 생긴 거 아냐? 아니지, 그렇다고 직장까지 그만 둘 건 뭔데? 진짜 감조차 안 오네.”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무슨 지병이 있다거나….그래서….”
“드라마냐? 에휴- 그냥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잊어버려. 너 이러고 있어봐야 너만 손해다? 세상에 여잔 많아. 내가 한 명 소개 시켜줄 테니까, 이거 마시고 다 잊어버려! 자!”
“하…현주야, 현주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눈물을 마시는지 술을 마시는지 분간조차 어려워졌을 때, 어느덧 나는 내 방 침대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석훈이 집까지 바래다 준 모양이었다. 난 지끈거리는 머리를 뒤로하고 바닥에 떨어져있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이명이랑 즉석 북어 국 냉장고에 넣어뒀으니까 일어나면 먹어라. 그리고 소개팅은 다음 주에 꼭 하는 거다? - 수다맨]
 

잠들어있을 때 석훈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난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려다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재중 전화 1통을 발견하고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걸려온 시간은 오후 10시 5분. 벌써 3시간이나 지나버렸지만 난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클래식. 불과 어제까지 차갑게만 느껴졌던 현주의 컬러링 곡에서 난 그녀와 사귀던 시절의 따뜻했던 설렘을 느꼈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희망. 그게 헛된 희망이 아닌 확실한 현실이 되길 기도하고 있을 무렵, 그렇게나 듣고 싶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응”
“현주야…!”
“오빠…. 지금 어디야? 보고 싶어. 나 집인데 지금 이리로 올 수 없을까?”
“기다려, 바로 갈께!”
 

꿈만 같았다. 역시 신은 간절한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다. 난 널브러져있는 외투를 아무렇게나 걸치며 쏜살같이 집을 나섰다. 운 좋게도 집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탄 난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그녀의 집 주소를 불렀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새벽시간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 생각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거스름돈을 대충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차에서 내린 나는 익숙한 빌라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집은 4층. 불은 모조리 꺼져있었다. 난 빌라 안으로 몸을 들이밀며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귀에서는 그녀의 컬러링 곡이 잔잔하게 흐를 뿐, 좀처럼 현주의 음성은 나오지 않는다. 잠이라도 들은 걸까? 꺼졌다, 켜지고를 반복하는 센서 등을 하나 둘 등지며 그렇게 생각할 무렵 어느덧 그녀의 집 402호 앞에 도착했다. 수하기에선 끝내 그녀의 음성대신 삐-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 된다는 영혼 없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그녀의 집 초인종을 가볍게 눌렀다.
 

띵동-
 

아무런 반응도 없다. 난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띵동-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정말 잠이 들어버린 걸까? 그냥 돌아가야 하나? 아니, 그럴 순 없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그녀를 잡을 기회를 놓칠 것만 같았다. 설사 술에 취해 술주정을 했던 거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술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녀가 보고 싶다고, 와달라고 했다면 그건 필시 그녀의 본심일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현주의 본심을 들을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난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
 

문은 열려있었다. 문틈을 타고 새까만 어둠이 소리 없이 새어나온다. 난 집안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밀어 넣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현주야…?”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건조한 내 음성만이 내부 곳곳과 공명할 뿐이었다. 이상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었던 그녀의 집임에도 오늘은 유난히 낯설게 느껴진다. 단순히 요 근래 뜸했기 때문이라 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난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사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끼이익- 철컥-
 

등지고 있던 문이 닫히며, 미약한 센서 등의 불빛이 사라졌다. 지독한 암흑 속에서 난 기억을 되짚어 손으로 벽을 더듬는다. 대충 몇 초나 지났을까? 대충 이 부근이 맞을 텐데….라고 생각했을 때, 손끝에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헌데 뭔가 축축하다. 끈적거린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난 손 끝에 살짝 힘을 불어넣었다. 이내 탁- 소리와 함께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 풍경은 결코 내가 예상했던 아니,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난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가까스로 벽을 짚고 버텨냈다. 집안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심하게 뜯긴 듯 너덜너덜해진 소파. 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져 날카로운 파편들의 잔해로 뒤덮인 TV. 뒤집어져 속의 내용물을 전부 뱉어내고 있는 쓰레기통. 걸레짝처럼 질척하게 널브러진 옷가지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경악케 하는 건 곳곳을 적신 검붉은 색의 액체였다. 마치 스프레이를 사정없이 연사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괴하게 물든 집안의 풍경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함 그 자체였다. 게다가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이 비릿한 내음은 분명 자주 맡을 수 있는 평범한 향이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해도 불가항력적인 일. 난 선명한 적색으로 물든 손끝을 코로 가져갔다. 그래, 분명 이건 피였다.
 

“…혀, 현주야….”
 

너무 놀란 나머지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현주는 무사한 걸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난 마음과 다르게 무거운 한 발을 내딛었다. 저만치 현주의 방문이 살짝 열려있는 게 보였다. 처음으로 그녀와 밤을 보냈던 그날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그녀의 옷가지를 거칠게 풀어헤쳤던. 그녀의 늘씬한 다리를 쓸어내렸던.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입맞춤. 그 숨소리. 모든 것이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나를 휩쓴다. 난 어느덧 거친 파도에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조각배가 되어, 뜨거워진 아랫도리를 느낄 수 있었다.
 

“현주야….”
 

살며시 문을 밀고 방 안으로 들어갔지만, 현주는 그곳에 없었다. 어차피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정말 이상했다. 현주가 없는 걸 확인했는데, 안심을 하는 내가 정말 이상했다. 난 그녀의 화장대 위에 반쯤 붉게 얼룩진 액자로 시선을 가져갔다. 언젠가 같이 놀이공원에 갔다가 찍었던 사진. 미키마우스 머리띠를 차고 어색하게 웃는 나와 달리 그녀는 정말 예쁘게 웃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난 마치 무언가를 훔치러 들어온 도둑이라도 된 것 마냥 헛바람을 들이키며 빠르게 문 뒤로 몸을 틀었다. 그 바람에 화장대 위에 있던 액자가 바닥에 떨어지며 정적을 무참히 깨버렸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왜 숨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찔꺽’
 

뭔가 물컹한 것이 밟히는 느낌. 대걸레를 빨고 물기를 발로 짤 때의 느낌과 비슷한, 그 느낌은 어릴 적 실수로 떨어트린 햄스터를 밟았을 때보다 훨씬 강렬한 것이었다. 천천히 내려가는 시선. 그 끝에는 깔끔하게 도려낸 고양이의 검붉은 머리가 놓여있었다. 흥건하게 피에 젖은 채.
 

“으아아아악!!”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치던 난 그녀와 뜨거웠던, 그러나 지금은 싸늘하기 그지없는 기분 나쁜 침대에 걸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간다. 점점 사고력이 떨어진다. 난 더 재볼 것도 없이 빠르게 일어나 방을 벗어났다.
 

착각이었던 걸까? 다행스럽게도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왠지 시선이가는 한 곳. 난 뭐에 홀린 듯 주방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라는 본능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슴엔 아련한 지난날의 추억들이 요동쳤다.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함께 먹었던 식탁. 그녀의 특기이자,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오므라이스. 어느덧 난 식탁 앞까지 와 있었다. 식탁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므라이스가 놓여있다. 향긋한 내음. 케첩으로 그린 하트에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이 느껴진다. 그녀가 돌아온 건가? 그녀가 돌아 왔구나!
 

“현주야! 어디 갔다가 이제….”
 

어디선가 들려온 손뼉소리에 눈이 떠진다. 마치 최면에 걸렸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눈을 뜬 내 앞에 모든 것은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다. 보기 흉하게 갈라져 기울어진 식탁. 일그러진 하트모양의 케첩은 검붉은 핏물이 되어 식탁을 뒤덮는다.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리는 끈끈하면서도 역한 그 질척거림의 끝엔 그녀가 해준 오므라이스 대신 내장이 반쯤 흘러나와 있는 목 없는 고양이들의 시체뿐. 향긋한 내음이 있어야 할 자리는 지독한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으아악!!”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이성의 끈이 또다시 마비되기 전에 이 지옥에서 벗어나야한다. 난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그렇게 구르다시피 하며 필사적으로 주방을, 그리고 거실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문을 쾅 닫아버렸다. 마치 안에 있는 무언가를 가두기라도 하려는 듯, 문고리를 잡은 손엔 엄청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왠지 이 손을 놓는 순간 안에 있는 무언가가 뛰쳐나와 나를 덮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안엔 분명 아무도 없었지만 아무도 없었기에 더 그랬다. 이성이 공포로 마비된 내 사고력은 이미 정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캉- 하는 계단 난간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난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센서 등이 전부 꺼져있는 탓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잘못 들은 것일까? 순간 내 머리 위에 있는 센서 등마저 꺼지며 빌라 내부가 새카만 어둠에 잠식되었다. 그리고 다시 들린 캉- 하는 소리. 소리는 분명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서 들려왔다. 그래, 지금 등 뒤로 느껴지는 이 인기척만큼이나 가깝게. 갑자기 어디선가 분명 경험했었던 지독한 습기가 느껴진다. 온 몸에 휘감기는 기분 나쁜 끈끈한 공기.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린다.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다. 다만, 뭐에 홀린 듯 내 목만이 의지와 상관없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탓에 머리 위에 있던 센서 등이 켜졌다.
 

“혀, 현주야…?”
 

내 뒤에 있는 건 다름 아닌 현주였다. 허나, 내가 알던 현주는 결코 아니었다. 피로 얼룩진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머리를 산발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은 검붉은 액체로 흥건히 젖어있었고, 다리는 온통 크고 작은 생채기들로 무참히 더럽혀져있었는데, 생채기 하나하나에서 매우 사실적인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매우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에서 복받치는 애잔함이 소용돌이치는 게 느껴졌다. 순간 그녀의 왜소한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흐흑’ 거리다가도 ‘크큭’ 거리는, 흐느끼는 건지 웃는 건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는 소리도 흘러나왔다.
 

“현주…야?”
 

그제 서야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산발한 머리칼이 양 옆으로 갈라지며 그녀의 야윈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현주는 분명 울고 있었다. 젖은 그녀의 두 눈을 마주하자 가슴이 무척이나 먹먹했다. 그녀는 나를 한 없이 슬프게 응시하며 작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왜…야?”
 

말라붙은 입술만큼이나 건조한 음성. 그녀는 분명 왜냐고 묻고 있었다.
 

“왜…야?”
 

왜냐고? 뭐가? 무슨?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그 한마디만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던 현주는 돌연 나를 째려봤다. 그건 무척이나 원망스러운 얼굴이었다. 좀 전까지의 그 슬픈 눈이 아니었다. 그것도 잠시, 그녀의 두 눈은 점차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졌다. 그래, 눈웃음이라도 치는 것처럼. 동시에 그녀의 입이 쩌억- 열렸다. 아니, 찢어지기 시작했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얼굴의 반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지며, 살점 등이 피와 뒤섞여 후두둑…투툭- 바닥에 볼품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헛구역질이 올라와 급히 입을 틀어막은 나는 그 안에서, 그러니까, 현주의 찢어진 입 안 깊숙한 곳에서 날 보는 또 하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건 ‘그 날’ 내 차창에 달라붙어있던 그 소름끼치는 여자의 표독스러운 얼굴이었다.
 

 

 

***
 

 

 

익숙한 천정. 어슴푸레하게 창틀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 날이 밝은 모양이었다.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난 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전날 먹은 술 때문이리라. 대체 얼마나 마신거야? 라며 중얼거리며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시간은 오전 6시 30분. 문득 현주의 얼굴이 떠오른다. 현주의 입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나왔던 표독스러운 여자의 얼굴. 마치 눈앞에서 실로 마주한 것처럼 생생하기 그지없다. 참으로 지독한 악몽이었다. 그러나 꿈 치고는 너무나 생생하다. 하지만 이내 난 고개를 저었다. 꿈이 아니면 뭔데?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지. 난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통화 목록을 훑었다.
 

“…….”
 

스크롤을 올리던 내 시선이 익숙한 번호 하나에 고정되었다. 현주의 번호. 통화목록엔 그녀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오후 10시 5분에 걸려왔던 부재중 전화 1통과,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그녀에게 걸었던 발신 통화. 난 자연스럽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통화를 했던 기록마저 꿈과 동일하다.
 

‘꿈이…아니었다고?’
 

난 힘없이 스마트폰을 떨어트렸다. 분명 현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내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
 

 

 

“뭐? 귀신? 너 술 덜 깼냐?”
 

석훈은 좀처럼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솔직히 내가 석훈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뜬금없이 현주가 귀신이 들렸다니, 오히려 진지하게 받아들여줬다면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새벽에 현주네 집에 갔는데 그….그래, 고양이 시체에다가 완전 난장판이었고, 도망쳐 나오다 현주를 봤는데 현주가 입이 찢어졌다고? 그리고 이상한 여자가 나왔다? 헌데, 그 여자 얼굴이 아는 얼굴이었고?”
“딱히 아는 건 아니고….”
 

늦은 오후. 술잔을 막 털어내던 석훈은 도무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주시하며 말했다.
 

“너 어제 어떻게 집에 들어갔는지는 기억해?”
 

내가 고개를 젓자 석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마셨으니, 필름 끊겨서 악몽이라도 꾼 거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하- 아니다.”
“네가 요즘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야! 생각해 봐, 너 걔랑 헤어지고 나서 요즘 솔직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들었으니까.”
“그, 그럴까?”
“그렇다니까?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냐? 귀신이 있었으면 나라가 이 모양이겠어? 이미 진즉에 쓰레기란 쓰레기들은 다 데려갔을 걸? 네가 요즘 기가 허해서 그래, 그러니까 이번 소개팅….”
 

기 승 전 소개팅으로 끝맺음 하는 석훈의 녹음기 같은 멘트를 대충 스무 번 쯤 들었을까? 난 녀석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그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그저 술에 취해 현주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뿐일까? 그저 단순한 악몽이었을 뿐일까? 아무리 생각의 생각을 거듭 해봐도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뭔가가 석연치가 않다. ‘그 날’ 도로에서 느꼈던 이질감과 정체모를 안개, 그리고 차창에 달라붙어서 죽일 듯 노려보던 그 의문의 여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아무래도 현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가 곁에 없으면 죽을 것만 같았던 나임에도 이제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난 차창으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거리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벨을 눌렀다.
 

 

 

***
 

 

 

차라리 아침에 올 걸 그랬나? 막상 현주의 집 앞에 도착하니 전날 밤의 꿈이 떠올라 좀처럼 다리가 떨어지질 않았다. 익숙 할대로 익숙해진 곳임에도 웬일인지 낯설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쫄지 마! 꿈일 뿐이야!”
 

난 투명한 빌라 유리문 앞에서 어쩐지 초췌해 보이는 나를 향해 작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끼이익-
 

녹슨 쇠붙이가 바닥을 긁는 마찰음과 함께 주황색 센서 등이 빌라 내부를 은은하게 비춘다. 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며 주변을 경계했다.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뚜벅뚜벅-
 

쥐 죽은 듯 고요한 탓에 내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진다. 아직 오후 10시도 안 된 시간이거늘 전부 잠이라도 자는 건가? 층계를 올라가면서 그 어떤 인기척조차 느껴지질 않는다. 마치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어이없는 느낌이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석훈과 함께 오는 건데…. 씁쓸한 후회감이 밀려오기 시작했을 때, 난 현주의 집 402호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또다시 전날 밤의 악몽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왠지 뒤를 돌아보면 현주가 칼을 들고 서있을 것만 같았다. 난 미간을 찌푸리며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난 스마트폰을 꺼내 다시금 현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아까 오면서 전화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기계음만이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괜한 헛기침을 뱉어내고는 벨을 눌렀다.
 

띵똥-
 

아무런 반응이 없다. 어디 외출 한 걸까? 아님 잠이라도 든 걸까? 난 긴장감의 끈을 놓지 않고 다시금 벨을 눌렀다.
 

띵똥-
 

여전히 반응은 없다. 난 조심스럽게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역시 어제 그건 꿈이었을까? 문이 열려있었다면 그거대로 찝찝했을 테지만 만약 열려있었다면 확실히 확인해두고 싶었다. 내가 어제 보았던 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안에 들어가서 똑똑히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불가능해보였다. 친구라도 만나러 나간 걸까? 문득 현주의 절친 중 한 명인 지현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현주의 대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보니 현주와 헤어지고 그녀에게만 집착했지, 정작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볼 생각은 미쳐 못했었다. 참으로 바보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난 빠르게 스마트폰에서 지현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생소한 빠른 비트의 통화 연결 음이 고막을 간지럽힌다. 요즘 유행하는 최신곡인 모양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수화기 너머로 앳된 여성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혹시 현주 친구 지현씨 되세요? 저 현주 남자친구 김지훈이라고 하는데요.”
“아, 지훈 오빠? 웬일이세요? 그보다 왜 존댓말?”
 

문득 현주 생일날 유난히 털털했던 한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쉽사리 말을 놓지 못하는 내게 자꾸 말 편하게 하라고 다그쳤던 여성. 난 그제 서야 그녀가 지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뒤로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폰에 번호가 남아있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아…. 그랬었지…. 너무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어요. 아니, 잊고 있었어….”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혹시 요즘 현주한테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엥? 현주한테 무슨 일 있어요? 요새 연락해도 안 받고 계속 잠수타서 안 그래도 한 번 집에 찾아가볼까 했었거든요. 현주 무슨 일 있어요?”
“그게 그러니까….”
 

난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지? 대체 언제부터 서있던 거지? 등골을 타고 한줄기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 눈은 402호라고 쓰여 있는 번호 사이로 비치는 하얀 원피스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수화기 너머에선 ‘여보세요?’ ‘오빠? 듣고 있어요?’ 라는 지현의 목소리가 재차 흘러나왔지만 난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저 전화를 귀에 댄 채로 등 뒤의 원피스에 주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문고리에 올려뒀던 한 손을 주머니로 찔러 넣으며 금색으로 코팅된 문고리로 시선을 천천히 내리 깔았다.
 

‘현주…?’
 

문고리에 비친 얼굴은 분명 현주였다. 혹여나 그 표독스러운 여자의 얼굴을 보게 될까 심장이 벌렁거렸는데, 다행히 비친 얼굴은 그 여자가 아닌 현주였다. 그것도 불과 얼마 전까지 매일 같이 보았던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도도한 얼굴. 난 용기를 내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꿈에서처럼 현주의 입이 찢어지는 기괴한 일은 없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여기서 뭐해?”
 

나와 눈이 마주친 현주는 꽤나 쌀쌀맞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하얀 원피스에 삼선 슬리퍼를 대충 끌어 신은 그녀는 다른 건 몰라도 꿈에서처럼 많이 야윈 모습이었다.
 

“어, 어디 다녀오는 거야?”
“어. 잠깐 요 앞에 지현이 좀 만나고 오는 길이야.”
 

지현이를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현주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차림으로?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의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곤 주머니로 가져갔다.
 

“누구랑 통화하던 거 아니었어?”
“어? 아…. 어, 서, 석훈이. 계속 술 한 잔 하자고 그래서….”
“그래?”
 

현주는 생전 처음 보는 차가운 눈빛으로 날 훑으며 입 꼬리를 올렸다. 내 속을 빤히 들여다 보는 기분 나쁜 눈빛이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 이미 얘기는 끝났을 텐데?”
“그게….”
 

어제까지만 해도 현주를 볼 수만 있다면 쏟아낼 말들이 산더미만큼 많았는데 어쩐지 난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돌아와 달라고, 헤어지자는 네 말이 전혀 납득 되질 않는다고, 몰아붙여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할 말 없는 것 같은데, 그만 돌아가 줄래?”
 

현주는 우물쭈물하는 나를 쌀쌀맞게 밀치며 문을 열었다. 이내 안으로 들어가려는 현주의 팔을 난 본능적으로 낚아챘다. 그러자 그녀는 약간 놀라는 얼굴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는 거지…?”
“…….”
“갑자기 이럴 애가 아니란 건 내가 더 잘 알아. 그래, 말하기 힘든 일일거야. 그렇지 않고는 네가 이럴 사람이 아니니까. 돌아와 달라고 하지 않을 게. 붙잡지 않을 게. 대체 무슨 일인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 했는지 알아? 오죽 하면 말도 안 되는 꿈까지….”
“꿈이라 생각해?”
“뭐?”
 

현주는 나를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순간 압도적인 살기가 내 심장을 찔렀다. 하지만 왜일까? 분명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음에도 그 두 눈은 어쩐지 많이 슬퍼보였다.
 

“됐으니까 돌아가!”
“현주야!”
“나 남자 생겼어. 오빠보다 훨씬 다정한 사람이야. 이제 설명이 됐어? 제발 두 번 다시 우연이라도 마주치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부탁이야, 잘 가.”
 

더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현주는 내 팔을 뿌리치고 문을 닫아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얼굴이라도 봤으니 그걸로 만족해야하는 걸까? 만나게 되면 뭔가 명확한 해답이라도 얻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이렇게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그냥 헤어져야 하는 걸까? 답답한 한 숨이 담배 연기처럼 눈앞을 어지럽히다 사라진다. 빌라를 벗어나 그녀의 집을 올려다보지만 불은 전부 꺼져 어둠만이 가득할 뿐, 그녀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다. 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칼칼한 목 넘김이 썩 나쁘지 않다. 이내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을 옮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참으로 많은 것이 달라져버렸다. 고작 현주 하나가 내 곁에 없을 뿐인데, 그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오늘 역시 맨 정신으로 잠들기는 그른 것 같았다.
 

 

 

***
 

 

[돌아가!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헉-
 

난 눈을 뜸과 동시에 침대에서 튕겨지듯 일어났다. 어질러진 술병들과 옷가지들. 난 그제 서야 새벽 4시까지 병나발을 부르던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침 한 방울 없는, 메마른 나뭇가지 같은 입술을 한 번 스윽 닦아낸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이 탄다. 난 어질러진 술병들을 발로 밀어내며 저만치 탁자위에 있는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미적지근한 게 영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갈증은 해소되었다. 욕실로 들어가 찬 물로 세안까지 하고 나자 제법 정신이 돌아온다. 난 거울에 비친 초췌한 내 얼굴을 피해 도망치듯 욕실을 빠져나왔다. 오전 9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창 출근길에 올랐을 시간. 하지만 지금은 더할 나위없는 나태함만 가득하다. 난 결국 다시 침대에 드러눕는 것을 선택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아니, 아무것도 하기 싫다. 현주가 없는 삶은 죽지 못해 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난 멍한 얼굴로 천정을 응시한 채 꿈을 떠올렸다. 어제도, 그제도 꿈에서 현주가 나왔다. 배경은 며칠 전 그녀를 만났던 그날의 그 시간. 문 앞에 선 현주와 나. 쌀쌀맞게, 그리고 매몰차게 돌아서며 문을 닫아버리는 그 장면을 끝으로 꿈에서 깬다. 매번 다르기는 허나 같은 맥락의 대화.
 

‘돌아가! 날 좀 내버려 둬!’
 

현주는 날 완강히 밀어낼 뿐이었다. 그렇게 밀어내면서 대체 왜 그런 슬픈 눈을 하고 있는 거니? 그녀의 그 슬픈 눈이 선명하게 떠오르자, 가슴이 저려온다. 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이름 앞에서 손가락은 멈춰 선다. 이내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는 스마트폰. 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는 걸까? 분명 아닌 걸 알면서,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걸 알면서도 그냥 속아주며 현주를 놔줘야 하는 걸까? 현주는 정말 내가 그러길 바랄까? 머릿속이 깨질 것만 같다. 문득 처음 꿈에 등장했던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싸늘한 한기가 느껴진다. 고작 떠올린 것 하나만으로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다. 현주를 붙잡겠다는 생각이 점차 흐려진다. 그제보다, 어제보다도 더. 난 베개를 끌어안은 채 소리 없이 흐느꼈다.
 

잠은 더 오지 않을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또 잠이 들어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후 6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그것도 이미 하루가 지난 뒤의 저녁이었다. 대체 몇 시간을 잔거야?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난 난 베란다로가 익숙해진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해가 저문 캄캄한 어둠속을 늘어서 있는 휘황찬란한 간판들이 대신하고 있다. 차가운 바람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달아 담배를 입에 문다. 칼칼한 목 넘김은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8미리나 되는 독한 담배를 물고 있는 게 맞는지 의구심마저 든다. 벌써 현주와 헤어 진지 보름이 넘어가고 있다. 그동안 달라진 건 황폐해진 일상 뿐. 솔직히 이젠 그녀를 붙잡고 싶은 마음도 옅어져버렸다. 사랑보다는 공포심이 더 컸다. 그녀를 떠올리면 덩달아 그날 차창에 매달렸던 그 여자도 같이 떠올랐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모습이 썩 달갑지만은 않다. 그렇게 현주 없이는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더니 고작 며칠이나 지났다고 태도가 급변하다니, 정말이지 스스로 생각해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현주의 집을 오가며 현주를 붙잡겠다는 생각만 가득할 때와 달리 요 이틀간은 꿈에서 그 여자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현주를 잡겠다는 생각은 집어치우라는 일종의 경고와도 같이 말이다. 어느덧 세 번째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난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녀를 놓아주어야 할 것 같다고. 그래야 내가 살 것 같다고 말이다.
 

 

***
 

 

이런저런 TV프로로 시간을 때우다 밤 11시가 넘었을 때 난 집을 나섰다. 아무것도 안 먹은 것 정도야 넘길 수 있었지만, 왠지 술이 없이는 안심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TV에 집중하려해도 자꾸만 그 여자의 얼굴이 이따금씩 떠올라 무서웠다. 그렇게 패딩 하나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삼선 슬리퍼를 찍찍 끌며 난 집을 나섰다.
집 앞 편의점에 들러 소주 몇 병과 이런저런 안주거리를 사서 익숙한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 난 예사롭지 않은 한기에 본능적으로 몸이 떨려왔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는 나였지만 딱히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커녕 고양이 새끼조차 씨가 말랐다는 점만 빼면. 원래 이 시간에 이렇게 사람이 없던가? 요즘 들어 부쩍 익숙했던 곳곳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게 다시금 멈췄던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 기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스륵스륵-
 

지푸라기? 낙엽? 뭔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가볍고 건조한 것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 같았다.
 

스륵스륵-
 

어디서 들려오는 거지? 평소 같았음 그저 바람에 흩날리나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신경이 자꾸 쓰였다. 이미 머릿속은 그 여자의 기괴한 모습으로
가득해졌다.
 

스륵스륵-
 

점차 사라져가기는커녕 가까워지고 있는 소리에 위화감을 느꼈을 무렵, 난 다시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헛!”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 했다. ‘그 여자’였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모습이 아니,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만큼 너무도 자세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움푹 페인 광대뼈. 지나치다 싶을 만큼 찢어진 입술. 표독스러운 눈. 여자는 분명 나를 노려보며 웃고 있었다. 그것도 동물처럼 네발로 천천히 기어오면서 말이다. 덕분에 산발을 한 긴 머리가 땅에 쓸리며 소름 돋는 마찰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낙엽이나 쓰레기 따위가 쓸리는 고상한 소음이 아니었다. 난 돌처럼 굳은 다리를 손으로 쿵쿵 치며 어떻게든 움직이려 애썼다.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에도 다리는 남의 다리마냥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습기가 코앞에서 느껴졌다. 한여름의 장마철도 이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앞엔 웬 한복차임의 풍채 좋은 할아버지가 나를 막아선 채 그 여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나를 이전보다 더 죽일 듯 노려보며 이리저리 기어 다니고 있었는데 좀처럼 이쪽으로 다가올 엄두는 못내는 눈치였다. 그때였다. 나를 막아서고 있던 할아버지가 뭐라고 중얼거리며 손을 한 번 크게 휘젓자 순식간에 사방이 짙은 안개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그날’ 차에서 보았던 정체불명의 기분 나쁜 안개와도 같았다. 이내 살아 숨 쉬듯 한 올 한 올 머리칼처럼 사방을 옭아매는 안개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할아버지는 조금 전과는 반대로 손을 크게 휘저었다. 그게 끝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아무도 없는 골목 한가운데서 나 혼자 볼품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 여자도, 그 의문의 할아버지도 그곳엔 존재하지 않았다.
 

“이거 필요 없으면 내가 가져도 돼?”
“으아아악!!”
 

불현듯 들려온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바닥을 뒹구는 내 모습에 목소리의 주인공은 눈살을 찌푸리며 쌀쌀맞게 말했다.
 

“거 참, 싫으면 싫다고 하지, 소리는!”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는 불쾌하다는 뉘앙스로 가래침을 뱉듯 퉁명스럽게 말을 뱉어냈다. 주차되어 있는 차량 두 대의 틈. 그 비좁은 공간이 마치 소중한 자신의 안식처라도 되는 듯 편하게 기대어 앉아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노숙자의 모습이었는데, 문제는 그 모습을 보고 정말 참 안락하겠는 걸? 하고 내가 생각했다는 것에 있었다. 난 이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생각에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그럴 필요 없을 걸? 꿈이 아니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인지 바닥에 떨어져있는 비닐 꾸러미를 쥔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네?”
“나도 다 봤거든.”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지못해 비닐에서 손을 때며 팔짱을 끼었다.
 

“다….보셨다고요??”
“물론.”
 

남자는 나와 비닐꾸러미를 번갈아 보며 입맛을 다신다. 난 그제 서야 남자의 행동을 알아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하세요.”
“오? 정말? 형씨 생긴 거와 다르게 마음씨는 천사가 따로없구만!?”
 

내 생긴 게 뭐 어때서? 라고 반문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쓸데없는 생각인 것 같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어느덧 소주 한 병을 모조리 비워버린 남자는 제법 만족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술도 얻어먹었겠다, 감사의 표시는 해야겠지? 보다시피 내가 돈은 없고…. 대신 형씨가 지금 제일 궁금해 하는 걸 알려주지, 어때?”
 

남자는 한차례 방긋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건 남자의 입에서 ‘그 여자’란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당연한 것이었다.
 

 

 

***
 

 

잿빛하늘. 분명 아침 일기예보로 서울에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릴 것이란 정보는 입수했지만, 이토록 짙은 회색의 날씨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군다나 서울을 벗어 난지가 언제인데. 그래서일까? 난 남자의 말에 품었던 작은 의구심마저도 쉽게 털어버릴 수 있었다.
난 언제부턴가 차창에 휘감기고 있는 기분 나쁜 안개를 바라보았다. 습하다. 여름의 장마철이라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12월의 겨울이다. 그렇기에 난 지금 제대로 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난 비어있는 조수석에서 애잔한 현주의 향기를 느꼈다. 대체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했던 것일까? 넌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런 주제에 바보 같이….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난 점점 거세게 차창을 두드리는 머리칼에 휘감긴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날 죽일 듯 노려보는 그년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네 뜻대로 되진 않아! 표독스러운 여성의 눈알이 금방이라도 차창을 뚫고 달려들 것 같았다.
 

 

 

***
 

 

 

난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와 현주가 그날 죽을 운명이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 허무맹랑한 말을 왜 곧이곧대로 듣고 있어야 하는 거지? 난 기분이 나빠져 자리를 벗어나려 등을 돌렸다.
 

“형씨도 봤잖아? 여자 친구 속에 들어있던 그 여자를 말야.”
“뭐요?!”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건 꿈이 아니야. 형씨는 그날 여자 친구 집에 갔었고, 못 볼 걸 전부 봐버렸어. 맞잖아?”
 

남자는 내가 꿈이라 여겼던 전날 밤의 기억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남자의 안광이 파랗게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보통 사람이 아닌 건 분명했다.
 

“더 들을 마음이 생긴 모양이군? 그럼 계속 하지.”
“…….”
“살다보면 막연하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 왠지 저곳으로 가면 안 될 것 같다든가, 어떤 물건을 특정 위치에 놓으면 안 될 것 같다든가, 어떤 행동을 하면 안 될 것 같다든가….말이지. 그게 왜 그런 건 지 알아?”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남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남자는 살짝 기분이 언짢은 듯 미간에 주름을 잡더니 다시 하던 말을 이었다.
 

“사계(死界)와 가까워졌기 때문이지. 본능적으로 몸이 피하라고 경고를 하는 거야. 일종의 금기지. 왜냐? 그걸 어기면 형씨처럼 되거든.”
“무슨 말도 안 되는….”
“사후세계라고 하면 되게 먼 곳일 것 같아? 저 높은 하늘 위? 천만에! 사계는 이 세계와 경계선 하나를 두고 아주 가까이 밀접해 있지. 선 하나만 넘으면 사계라는 말이야. 그날 차안에서 분명히 느꼈을 텐데? 금기를 어기고 사계로 발을 들여놓던 순간을.”
 

지독히도 습한 공기. 차창을 휘감는 머리칼의 안개. 난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에 몸서리를 쳤다. 그게 사계로의 진입했기 때문에 벌어졌던 현상이라고? 쉽사리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남자의 말을 흘려들을 수도 없었다. 그는 내가 겪은 일들을 모조리 아는 눈치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그곳에 들어간 이상 죽음을 피할 수는 없어. 헌데, 아까 그 풍채 좋은 영감 봤지? 그게 형씨 수호령이거든? 그게 형씨 살려 보겠다고 규율을 깨버렸어. 강제로 형씨를 사계에서 이곳으로 빼내왔단 말이지. 덕분에 이렇게 일이 꼬인 거야. 형씨는 살렸을지 몰라도 여자 친구는 이미 그때 죽었어. 지금 몸속에 있는 건 ‘그 여자’ 그러니까 사계에 서식하는 일종의 악령 같은 거지. 사계에 있어야 할 존재가 형씨 때문에 이곳에 흘러들어 온 거라고!”
 

도무지 허튼 소리라고, 정신 나간 인간의 악질적인 장난이라고 흘려듣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었다. 정말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좋지? 난 뭘 어떻게 해야 한 단 말인가?
 

“그 여자. 한 번 이곳의 맛을 봤으니, 쉽게 이곳을 떠나려하지 않을 거야. 더군다나 액받이 역할을 형씨 여자친구가 아주 충실히 해내고 있거든. 자기 딴엔 형씨를 지키려고 하는 모양인데 어림없을 걸? 얼마 가지 않아 그 여자한테 장악되어 버릴 거야. 아무리 형씨를 밀어 낸다 해도 사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그, 그럼, 현주가 날 지켜주려고 일부러 밀어내고 있단 말입니까?”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남자에게 묻자, 그는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가슴 한 구석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이제 그녀의 갑작스런 이별통보와 달라진 행보들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아픈 것이었다. 생과 사의 경계 속에서조차 날 지켜주려는 그녀를 난, 나는…. 하염없이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스스로가 소름끼치도록 원망스러웠다.
 

“그럼, 이제…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현주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겁니까?”
 

남자는 나를 한동안 말없이 응시했다. 그 생전 처음 겪어보는 기묘한 눈빛에 압도되어 나 역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는 마치 내 눈에서 무언가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꽤나 만족스런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형씨 여자 친구 덕분에 시간은 좀 벌었어. 틀어진 운명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있단 말이지. 지금 타이밍이 아주 간당간당 해. 형씨 수호령이 지켜주는 것도 이젠 무리 같거든. 앞으로 한 번 더 그 여자 눈에 띄었다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어.”
“그래서 방법이 뭡니까!!”
 

나도 모르게 난 남자의 옷깃을 거세게 잡아채며 소리쳤다. 허나 남자는 그런 내 반응을 예측이라도 한 듯 덤덤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곤 나직이 한 숨을 뱉어냈다.
 

“형씨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운명을 받아들이는 거야.”
“어떻게….”
“어차피 여자 친구는 살리기엔 이미 늦었어. 여기서 형씨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두 가지.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가슴 졸이며 그 여자를 피해 다니며 목숨을 부지하는 것. 물론 그렇게 되면 여자친구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그 여자의 노리개로 존재하게 돼.”
 

이런 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현주를 희생해서 얻는 삶 따위 무의미하다. 난 빠르게 다른 선택지를 물었다.
 

“앞서 말했듯 원점으로 돌리는 거지. 그렇게 되면 그 여자는 다시 사계로 돌아가게 돼. 그러니까 처음 사계로 진입했던 그곳으로 가서 어긋났던 시간을 바로 잡는 거야. 즉, 형씨가 그 여자 손에 죽임을 당하기 전에 형씨가 먼저 죽는 거지. 할 수 있겠어?”
 

난 남자의 말에 오히려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건 내가 원하던 대답이었다.
 

 

 

***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난 이를 악물고 핸들을 돌렸다. 내게 처음부터 선택지는 정해져있었다. 현주는 죽어서까지도 이런 날 지켜주려 했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이것 뿐. 비겁하게 도망치며 삶을 연명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지 않는가? 이왕이면 순리대로 그녀와 함께 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점차 가까워지는 새하얀 헤드라이트 불 빛 속에서 난 옆자리에 있는 현주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촉촉하게 젖은 너의 두 눈. 떨리는 네 입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제야 알 수 있게 되었어. ‘왜 돌아 온 거냐고?’ 알잖아? 난 너 없인 못사는 거. 이제 절대 혼자 두지 않을 게. 그것이 설사 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야 하는 일일지라도.
 

난 눈을 질끈 감으며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렇게 강렬한 빛에 시야가 완전히 흐려졌을 때, 차체가 부서지는 강렬한 소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그 여자의 원망스런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난 그저 어딘지 분간할 수 없는 고요한 공간 속에서 현주를 품에 안은 채 잠들어갈 뿐이었다.
 

‘마지막까지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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