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마침내 헌팅녀의 정체가 밝혀지다
술에 취한 가은이와 얼떨결에 하룻밤 같이 잠을 잤던 그 날 이후 우리는 갑자기 가까워져 있었다.
그 날 술 취한 가은이를 비록 잠시동안이었지만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줬다.
그 일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까? 가은이는 나를 각별하게 대했다.
그 뒤로 가은이는 자주 학교로 놀러 왔고 그 때마다 고맙게도 나를 불러 주었다.
이 시점부터 였던 거 같다.
내 생활은 점점 한 여자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마치 행성 주위를 도는 위성처럼.
온 신경이 가은이를 만나면 어딜 가서 무슨 재미있는 일을 할지에 가 있었다.
한가지 두려웠던 건 가은이가 나와의 만남에 식상해져서 어느 날 덜컥 우리의 만남이 끊겨 버리지나 않을 까 하는 거였다.
그게 두려웠고 매번 만남은 그래서 늘 긴장감이 있었던 거 같다.
가은이는 선영이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
가은이는 만날 때 마다 참 소박하다는 것을 느낀다. 화장도 거의 하지 않고 옷차림도 너무 평범해 주위에 묻힐 정도로 수수하다.
대화에서도 자신을 내세우기 보단 늘 말없이 경청해주는 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차가움도 느껴졌고.
어떻게 이렇게 다른 스타일이 서로 친구가 되었을까?
그에 비해 선영이는 같이 있다보면 머릿속이 훤히 다 보일 정도로 솔직하다.
안좋은 일이 있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다시 원래의 발랄함을 되찾는다.
옷차림도 성격만큼이나 거침없다. 어울리든 안어울리든 유행이라면 한번은 쫒아가 보는 스타일.
선영이가 같은 과 재욱이형과 사귄다고 내게 털어 놨을 때 그녀의 남자 고르는 안목에 감탄했다.
남자가 볼 때 멋진 사람이 진짜 멋진 남자다. 여자들은 때로 전혀 엉뚱한 선택을 하기도 하니까.
그 선배 어떠냐고 지나가는 말로 한 번 묻길래 "내가 여자라면 그 형이랑 사귀고 싶을 정도?"라고 한 마디 했던 기억이 난다.
설마 그 선배에게 그렇게 필사적인 대쉬를 감행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 선배 다 좋은 데 별로 연애에는 관심이 없어서 여친이 없긴 했지만.
처음에는 선영이를 멀리 하려고 했다. 그러나 선영이가 앵간히 수완이 좋아야지.
그 선배 한 달 정도 버티더니 그 다음에는 같이 밥도 자주 먹고 어디 놀러 간다고 몇 번 그러더니....
어느 날 선영이가 나타나더니 "상황종료!"라며 손을 들어 반짝반짝 빛나는 반지를 보여 줬고
우리는 킥킥거리며 박수를 쳐줬던 기억이 난다. 불과 몇 달 사이에.
하지만 일년이 지난 지금 술만 마시면 불평을 늘어놓는다. 처음에는 복에 겨워서 그러려니 했다.
"뭐가 문제냐? 도대체."
"문제? 오빠가 참 헌신적인건 알겠는데. 근데 문제는 그 사람에게 내가 설 자리가 없다는 거야.
나 혼자서 오빠에게 기댈 뿐이야. 솔직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자기의 약점을 드러내지는 않아.
내가 뭔가 자기의 부족한 걸 채워 줄 기회를 안줘."
모르겠다. 그게 문제인지. 사랑을 해 본적이 없으니. 어쨋든 우리 셋의 만남은 늘 이렇게 선영이의 연애담을 들으면서 시작되었다.
가은이를 만나는 날이 되면 무슨 말을 할까 걱정이 되다가도 막상 만나면 너무 편하다.
그리고 가은이는 누구보다도 더 재미있게 내 말에 귀 기울여 줬다.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너무 편하고 즐거웠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렇게 세사람이 만나 즐거운 관계를 가져 가던 중 문득 이렇게 만남이 계속 지속되지는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코메디 프로처럼 언젠가 식상해 질 즈음엔 사라져 버리겠지.
그전에 난 가은이랑 둘만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나는 뭔가 내 마음을 전할 부담스럽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늘 셋이서 만나는 상황에서는 그런 기회가 잘 오질 않았다.
좀 더 다가서고 싶지만 두렵기도 했고.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괜히 섣불리 들이댔다간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마저 흔들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은 계속 흘렀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가은이와의 관계를 지켜 보면서 우려를 표현했다. 약간 기운다나. 차이지 않을까라는 둥.
내가 뭐가 부족하다는 건지. 약간 시기어린 말투라고 봐야 할까. 액면 그대로는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다.
그런 의견에 맨 앞장을 선 사람은 선영이었지만 그녀는 다른 애들과는 좀 다른 관점이었다.
"솔직히 말해 전혀 어울리지가 않아." 선영이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 땐 몰랐다.
처음에는 다른 애들 말처럼 단순히 내가 가은이에 비해 부족해 보인다는 걸로 알았다.
하지만 선영이는 가은이에게서 자신의 남자친구의 모습을 본 듯하다.
상대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 다는 거. 친구니까 가은이 스타일을 잘알고 있었을 거고.
어쩌면 그런 스타일이 상대에게 참 편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상대에게서 존재감을 앗아갈 수도 있다.
"난 니가 필요없지만 니가 날 필요로 한다면 만나줄께."라는 분위기라고 할까.
하지만 남들의 그런 의견들은 내 안중에 없다. 오로지 가은이에게 무언가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영이의 예언대로 그녀에게서 뭔가 내 존재감을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녀는 내가 기대는 건 얼마든지 환영하지만 자기가 기대려는 생각은 전혀 없는 듯.포커페이스처럼 속마음을 알 수 없다.
이러다 내 스스로 나가떨어지겠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고민 중에 문득 한가지가 떠올랐던 게 있다. 사람은 누구나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 있다라는 말. 가은이도 틀림없이 그럴꺼야.
하지만 그걸 확인할 길은 없다. 가은이는 그걸 표현 안할테니까. 물론 상대가 표현을 안해주면 답답할 수밖에 없다.
제 풀에 꺾인다는 말처럼 차츰 그녀에게 나의 필요성, 존재감을 의심하게 될 거고.
하지만 틀림없이 그녀도 관심과 사랑에 굶주려 있을 거다. 난 그걸 막연하게 믿기로 했다.
그걸 믿고 캄캄한 밤길을 가듯 묵묵하게 걷다 보면 어느새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어 있지 않을까라는 확신같은 게 있었다.
모든 종교에서 그렇듯이 가장 첫 단계는 믿음이다. 믿습니까? 난 가은이가 나를 꼭 필요로 할거라고 굳게 믿었다.
반드시 난 가은이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말거야.
그리고나서 난 가은이에게 무엇이 필요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답을 찾아 해매던 중 내가 발견한 답은 지극히 평범했다.
그녀에게 웃음을 돌려 주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은이가 미소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얼굴에 퍼지는 희미한 미소 말고 행복에 겨워 터질듯한 환한 미소말이다.
그녀의 기분을 뼈 속까지 환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 때 내 사촌형 생각이 났다. 냉대로 일관하던 형수를 꼬실 때 유머책을 끼고 살았다고 했다. 유일한 연애전략은 만나면 최소한 세
번은 웃게 만든다는 것. 그게 어쨌든 먹혔나보다. 지금 그 커플은 결혼에 까지 골인한 걸 보면.
물론 그 뒤로 사촌 형은 유머책을 읽지 않았다. 내가 웃으면서 요즘은 유머 관심없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무표정하게 TV를 보면서 그 따위 것이 뭐가 필요해라는 표정. 형수가 안봤기 다행이다.
난 재미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당시는 난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틈나는 대로 유머를 연구했다.
결국 유머에 대해 오랜 투자 끝에 내가 얻게 된 건 유머는 단순히 상대를 웃기는 것이 아니란 것이었다.
유머란 상대가 자신을 가장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기술. 이게 내가 얻는 유머에 대한 결론이다.
결국 사람을 환하고 기분좋게 만드는 건 기술적인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면 그 사람도 자신의 소중함을 느낀다는 것.
그런 변화가 뼈속까지 그사람을 환하게 만들것이라고 믿었다.
난 가은이에게 이런 나의 간절한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이 쌓여 가면서도 포커페이스같은 그녀의 얼굴에서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내 마음이 전달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서서히 뭔가 그녀의 표정과 태도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 가고 있다는 걸 가끔씩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 느낌이란게 콜라에 사이다를 아주 조금 탔을 때의 색깔 변화를 느끼는 정도처럼 불분명하긴 하지만 말이다.
가은이가 날 어느 정도 편하게 생각한다는 걸 느낀 시점에서 꼭 필요했던 건 둘만의 데이트였다.
그 때까진 늘 셋이 만나고 있었다. 선영이가 바빠서 시간이 안되는 경우엔 모임 약속은 자연스레 깨졌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고. 여기서 탈피해야 한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내가 그 제안을 꺼낼 때 몹시 떨렸다. 어쩌면 데이트 신청으로 알고서 마음의 문을 닫을까하고.
"진짜 웃긴다는 데 이 연극.......... 보러 갈래?"
조마조마했던 내 생각과는 달리 가은이는 흔쾌히 허락했다.
모르지. 그녀는 데이트신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어쨌든 그 날을 기점으로 선영이 의존적인 만남에서 마침내 탈피했고 둘만의 만남의 시대가 왔다.
그 무렵 나로서는 조금 뜻밖의 순간이 찾아 왔다. 가은이가 자기 과에서 주최하는 일일주점에 초대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긴장하지 않았다. 당연히 수다쟁이 선영이가 있을 거니까.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상황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선영이는 없었다. 아예 초대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약간 그 자리가 부담이 되긴 했다.
그 날 일일주점에서 말로만 듣던 그녀 주위를 맴도는 위성들을 여럿 확인했다. 어렵게 알아차릴 필요조차 없었다.
내가 들어서는 순간 거기에 있던 가은이가 초대한 또 다른 친구들의 시선은 바로 내게 꽂혔다.
그리고 그 시선은 쭈욱 나를 따라다녔다. 마치 "도대체 저 녀석은 누구지?"라는 표정으로.
내가 심심할까봐 간간히 자리를 비우는 일을 제외하고는 가은이는 나와 함께 있어줬다. 고마웠다. 다른 친구들도 많은 것 같은데.
하기야 혼자 온건 나뿐인듯 하다.
그녀는 왜 나를 초대했을까. "이걸 봐란 말이다! 줄 서!"라는 뜻이었을까. 어쨌든 나로서는 상당히 뿌듯했다.
이유야 어쨌든 최초로 그녀의 친구들에게 내가 소개되는 자리였으니까.
가은이 주위를 도는 위성들은 멀리서 나를 관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탐사선도 가끔 쏘아 올렸다.
가은이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 누군가 다가와 쑥스럽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선 어떤 관계냐고 넌지시 물어 본다. 난 솔직하게 "그냥 아는 사이에요.", "친구에 친구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그 정도 관계라는 것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지만.
뜻밖의 동침(?)으로 가은이와 슬며시 가까워지게된 2학년 1학기.
하지만 그런 큰 발전이 있기 위해서 희생되었던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장 피해를 입은 건 나의 성적이었다. 2학년 1학기 학사경고를 맞았다. 그리고 경제 사정도 말할 나위 없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있는 대로 부모님 돈을 쪽쪽 빨아서 내놓은 결과물이란게 학사경고였으니.
여름방학이 되었다. 사실 방학 땐 나는 서울에 없어야 했다.
왜냐면 시골에 농사를 짓기 때문에 방학 때는 내려가서 일손도 좀 돕고 그래야 했는데
한창 가은이랑 가까워져 가는 중인데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좀처럼 연락을 안하시는 아버지가 한번은 전화를 하셔서 "요즘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쓰노. 방학인데 내려와서 농사도 돕고 해야지!"
무척 화가 나신 모양이다. "아버지.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에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지금의 내 심정을 이해하실 리 만무하고 그래서 고시 준비를 할까 생각중이라고 말씀 드렸다.
그 말에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을 안하셨고 다소 안심을 하신 모양이다. 나도 거짓말을 한건 아니었으니 괴로울 것도 없다.
생각중이라고 했지 하고 있다고는 안했으니까.
방학이라 시간은 많아졌지만 가은이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자주 만나자고는 할 수 없었다. 내 경제도 좋지 않았고.
해서 내가 떠올린 아이디어는 역시 아주 평범한 것이었다. 밤에 자기 전에 잠깐 전화통화를 하는 거.
사실 여자친구도 아닌데 저녁에 전화를 건다는 건 어쩌면 오해 받기 딱 좋겠지만 친구사이라 하더랃 안될 이유는 없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채 다이얼을 눌렀다.
"가은아. 오늘 낮에 든 생각인데. 너 선영이랑 동해안 한번 놀러 올래? 내가 집이 바닷가 근처잖아."
적절했다. 그녀는 지금 걸려온 전화 통화를 어떻게 볼것인가에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참신했던 전화 내용으로 바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바닷가. 한번 가보고 싶긴 하네."
처음에는 며칠을 건너 두고 하다가 나도, 가은이도 느끼지 못한 사이 어느덧 우리는 매일 자기 전에 잠깐씩 통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중에는 좀 더 편하게 자기 방 전화번호도 가르쳐 주었고.
전화 통화를 자주 하다보니 낮에 생활하면서 일어났던 일을 늘 체크해두었다 재미있게 각색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 갔다.
선영이 정도는 아니라도 가은이와도 상당히 허물없는 친구사이가 되었구나 싶었다. 놀라운 발전이다.
하지만 선영이가 그렇듯 그녀가 나를 이성으로 느낀다는 것은 의문이다.
예전에 선영이와의 관계처럼 가은이와도 그런 관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선영이도 살짝 이성으로 느껴지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누가 봐도 매력적인 여자니까.
그 때 그녀가 물었다. 남녀간에 순수한 우정이란 게 존재할까라고.
변치 않을 우정을 나누자는 말로 받아 들였고 그렇게 하기로 순순히 약속했었지.
둘 사이에 명확하게 선을 그어버린 그 말에 더이상 선영이는 내게 여자로 존재하지 않았다. 의식화의 힘이랄까.
어느 날 가은이가 애인이 생겼다며 넌 남녀간에 순수한 우정에 대해 생각하니라고 할까 걱정이다.
갑자기 그녀의 수많은 위성들이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누구(선영이)는 되고 누구는 안되는 거야?"라고 말하면 사실 난 할 말은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
결국 방학 중반에 시골로 내려갔다.
반갑게 맞이하시던 아버지가 아시면 실망하시겠지만 귀향 이유는 집안 일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은이와의 잦은 통화로 서울에서 대화 소재가 고갈되었기 때문이었다.
소재고갈을 해소하고자 귀향이라. 자식 키워 봐야 소용없다는 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나를 기다리는 산더미처럼 쌓인 농사일.
"지금까지 머 하신 거죠. 아버지. 나만 목 빠지게 기다리신 건 아니시죠!!"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영이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내려 왔어." "어딜??" "여기 감포항. 피서 왔어. 올래?" "앵? 정말?"
나름 과에 시골애들이 많아서 만든 룰이 하나 있었다. 품앗이 투어라고.
무조건 자기가 사는 지역에 놀러 오면 대접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다른 지역으로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로 경비절감 차원에서 그곳에 사는 친구의 도움을 받는거고.
그 덕에 방학땐 돈 몇 푼 안들이고 전국을 두루두루 유랑할 수가 있었다.
"이게 누구야!! 친구. 냉큼 가께. 기달려~"
버스를 신나게 밟아서 도착한 곳은 감포항. 두리번두리번.
헉!
가은이도 함께 왔네. 예전에 가은이랑 전화통화하면서 놀러 오라고 한 걸 깜빡 잊고 있었다.
몇 일 전화가 안받는다 했더니 이런 깜짝 방문을 획책하고 있었구나.
"가은이가 올해 바다를 못봤다고 해서 강릉에 현수집에서 일박하고 동해안 타고 여기까지 왔어."
"잘 왔다. 너무 반갑다." 난 뜨겁게 두 친구를 환대했다.
가은이가 찾아 왔다. 뭔가 또한번 우리의 관계가 업되어야 할 시점에.
바닷가 경치에다 한창 붐비던 휴가철이라 우리의 마음은 한껏 낭만적이 되었고
이런 상황이라면 마음속 긴장과 경계심은 한번에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일단 숙소부터 잡았다.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일박하고 싶다고 해서
근처 가장 경치 좋은 모텔 맨 꼭대기층으로 구해 줬다.
바다가 보이는 맨 위층 방에 짐을 풀고 수산시장에 회를 사러 나갔다. 그리고선 바닷가 모래사장에 밤바다를 바라보며 앉았다.
오늘이 기회다. 고백을 해야 할 시점이다. 공식적으로 친구에서 연인으로 넘어가보자. 그래서 술도 좀 마셨다. 용기가 안생겨서.
혹시 나의 이런 행동 너무 앞서 가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선영이가 있으니 고백이고 뭐고 분위기는 자꾸 코믹하게 흐른다.
이렇게 거사는 수포로 돌아가는 것인가라고 포기할 시점.
선영이가 잠깐 산책 좀 하고 오겠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모래사장을 걸어서 나간다. 왤까?
선영이는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그래서 피해주는 걸까? 대충 짐작은 하고 있는가보다.
알고 이렇게 분위기 만들어 준거라면 고마운 녀석이다. 내 고백에 가은이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고백을 한 후 밤바다가 지금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내가 가진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전부를 건 베팅 해야 할 때.
"가은아. 사실 너 부담스러울까봐...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늘 니가 잘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거 알지?"
(이게 무슨 사랑 고백이야. 뭔가 첫 단추부터 잘못된 느낌. 아 떨려.)
가은이가 쳐다 본다.
"그러니까... 그게... 저..."
내가 버벅거리자 가은이는 뭔가 어색한 듯 표정이 굳어진다.
말을 꺼내지 말걸 그랬나 생각했지만 이미 엎질러 진 물. 여자들의 감각으로 벌써 이 상황을 읽었을 거고
그러니 여기서 어정쩡하게 도피할 수는 없었다.
"가은아... 나... 사실... 좀 더 너랑 가까워지면 안될까... 그러니까... "
표정이 싸늘해 진다. 난 말을 멈췄다. 파산한건가? 가슴이 내려앉는다.
아무 말이 없다.
"난 아직 너에 대해 잘 몰라. 그리고 난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건 무지 싫어. 관계는 차곡차곡 쌓여 가는 거 아닐까."
"아... 난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말하려고 했던 건 그게 .... 그러니까..."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
나도 더 이상 변명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밤바다를 쳐다봤다.
완전 망한 기분으로 바라보는 밤바다다. 조금 전에 불길하게 예상했던 그 바다. 재수없는 상상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관심이 있으니까 만나고 전화를 받는 거 아닐까. 그리고 내 방 전화 알려준 사람은 처음인데."
그 말에 난 눈물이 날 듯 울컥했다. 갑자기 뭔가 확 뚫리는 느낌이었다.
"미안해. 부담스럽게 해서." 그 두 마디에 어찌 내 감사의 마음을 다 담을 수가 있을까마는.
어쨋든 그 날 밤바다에서 난 희망을 봤다. 아주 작은 불빛이긴 했지만.
우리는 모텔로 돌아가서도 한참을 보내다 잠을 잤다.
그러니까 선영이랑은 두 번째 같이 잔 셈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야릇한 일은 없었다.
그렇게 방학은 끝나고 다시 2학기가 되었을 때도 내 생활의 핵심축은 역시나 가은이였고 더욱더 뚜렷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바뀐 한 가지, 예전에는 가은이가 속마음을 잘 털어 놓지 않았는데 요즘은 달라졌다.
전처럼 주로 듣는 입장이었지만 요즘은 가끔씩 "-하면 어떨까"라는 말을 자주 했다.
물론 속마음까지 털어 놓는 건 아니지만 무슨 결정을 할 일이 있을 땐 내 의견을 자주 물어 봤다. 예전에는 전혀 안그랬는데.
마치 그전엔 무인도에 혼자 앉아서 막 지껄이다가 요즘은 가끔이긴 하지만 섬에 배가 한번씩 들어온다고나 할까.
그러던 어느 날 내 생일이 다가왔다. 1학년때는 애들 여럿 불러 놓고 호프에서 맥주나 한잔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와 단둘이 있고 싶었다. 생일이라고 하면 너무 부담스러울까봐 그냥 차 한잔 하자고 했다.
끝까지 말 안할 생각이었다.
여대 앞 번화가 조용한 레스토랑에 앉아 함께 있으니 이건 완전 연인사이같다.
물론 누가 친구와 애인 사이에서 어정쩡한 사이라고 실토해야 겠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선물을 준비해 왔다!! 난 아무 말 안했는데 말이다. 어떻게 안걸까?
부담 줄까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선영이 이뇬이 불었나.
선물을 주고 받고 단둘이 생일날 만나는 건 연인끼리나 가능한 일인데. 덜컥 겁이 났다.
"친구들 안만나?"라고 가은이가 물었다.
"어... 저녁에 뭐 시간되면 잠깐 볼수도 있고..."
그러면서 선물을 꺼낸다. 그녀가 직접 그린 그림이란다.
헉!! 연필로 그린 자신의 초상화다. 제법 그림을 잘 그리는 구나 감탄하고 있는데 "이거 방에 갖다 둘래. 그 그림 대신."
그 그림??? 아... 내 방에 있던 헌팅녀 초상화 말하는 구나. 맞다. 처음 만났을 때 술 취해서 내 방에 잤을 때 그 그림을 봤었구나.
"그래. 당장 바꾸께." 난 기쁘게 말했다.
바로 그 순간.
난 왠지 모를 놀라운 상상을 하게 된다.
혹시 가은이가 헌팅녀가 아닐까 하는.
며칠 전에 선영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도 그걸 가은이에게 물어 봐야지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며칠 전 선영이가 술값이 없다고 돈 가지고 나오라고 해서 급하게 택시를 타고 온 곳이 바로 이곳 여대 앞 번화가.
그 자리에서 난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된다.
이런 저런 얘기 하다가 갑자기 옛날 생각이 짠해서 여대 앞 번화가의 슬픈 전설을 말해 줬더니
선영이가 웃으며 "그래? 가은이도 예전에 재수할 때 여기서 헌팅당했다고 하던데. 태권도부 악명은 알아줘야 돼.
찾아서 혼 좀 내줘."
가은이가 재수할 때라면 내가 1학년때..
그리고 그 신입생 환영회때 나머지 팀은 다 종로로 나갔고 이곳으로 헌팅왔던 팀은 나밖에 없는데 ..
난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전에 봤던 그 헌팅녀의 그림이 신경 쓰여서 바꾸라는 건 데 거기다 대고 '혹시 너 헌팅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없고.
궁금해도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 때 난 헌팅녀의 친구랑 주로 대화를 나눴다. 헌팅녀랑은 말을 많이 안했던거 같고. 내가 힐끔힐끔 얼굴만 쳐다봤을 뿐.
그래서 그 얼굴이 기억에 더 없는 지도.
그녀가 가은일까? 설마....
어쨌든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지금 이 순간 나는 좋아하는 한 여자의 남자친구로 암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셈이니까.
생일인줄 알고서 만나주다니. 나는 묵직한 자신감과 기쁨을 느낀다.
나와서 거리를 걸었다. 나는 대담하게도 손을 잡았다. 그 때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는 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은이가 가만히 있다.
이건 실로 정말 엄청난 사건이다. 최초의 스킨쉽이 아닌가. 감동. ㅠㅠ
이 거리.. 그 때 헌팅녀와 함께 걷던 바로 그 자리다.
"가은아. 첫 눈에 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첫눈에 반한 사랑같은 건 믿지 않아. 사랑은 함께 차곡차곡 쌓아가는 거지 한 순간에 모든 게 오겠어?"
"나도 공감해." 더이상 궁금한 건 모두 잊어 버리자. 눈치 챌라. 손을 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 이밤은 대감동이다.
왜냐면 친구끼리의 행동은 절대 아니니까. 그 날 그 거리의 야경이 얼마나 멋있어 보이든지.
"사실 한 가지 털어 놓을 게 있는데... 아니다. 됐다. 나중에 말해 주께."
"그래."
난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빌어 먹을. 왜 그렇게 어깨에 손을 올려보고 싶던지.
난 가은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 채 겁없이 자꾸만 다가가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살포시 어깨 위에 올리자 "여기서 헤어지자. 오늘은 혼자 갈게."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였지만 순간 내 얼굴은 사색이 되어 버렸다.
또 한번의 위기.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만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갔다. 그냥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오해를 풀고 보내야 하는데. ㅠ
ㅠ 내가 왜 그랬을까. 철모르는 아이처럼.
"사과하께. 미안해." 버스가 저 멀리서 다가온다.
"뭘?" 아무 말 없던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어쨋든 한 가지만 말해 두께.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상대방은 이걸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미안. 경솔했어." 버스가 오자 그녀는 떠났다. 가슴을 쓸어 내렸다.
왜 그랬을 까 후회가 되었다. 무슨 음흉한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내게 그렇듯이 그녀에게도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돌아 내려오는데 생각이 났다. 이 버스정류장.
예전에 헌팅녀도 버스를 타러 여기까지 왔었지. 그리고 바로 이 자리.
예전에 헌팅녀가 기다리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가은이가 떠났다.
설마... 가은이가...?
그날 둘만의 생일파티 이후로 변화가 있었다.
내 책상에는 가은이의 초상화가 놓여 졌으며 가은이도 바뀐 게 있다.
저녁에 전화할 때면 자신의 속내도 조금씩 털어 놓는다. 게다가 요즘은 내 문제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생각을 얘기한다. 큰 변화다.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여는 것일까?
그녀의 말대로 함께 차곡차곡 쌓아가며 느끼는 변화에 그저 기쁜 마음이다.
난 그렇게 2학기도 가은이에게 올인 했다. 차마 가은이에겐 내 공부와 성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가은이는 이렇게 심각한 지 상상못할거다. 내가 성격상 한 가지에 몰입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연애와 공부의 병행이 무리였나 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렇게 간단히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드디어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표가 날아 올 때가 되었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2차 학사경고가 나왔다.
어쩌면 예정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면 나는 가은이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니까.
각오만이 아니라 실재로도 희생을 시켰고.
이 모든 사실을 가은이에게 철저히 숨겼다. 혹시 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까봐.
나는 한동안 방황을 했다. 집에도 내려가지 않았고 가은이에게도 이 모든 문제를 비밀로 한 채.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군대였다.
가은이랑 사귀느라 난 공부나 진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난 이제 혼자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비록 진행중이긴 하나.
지금 이 시점에서 서로의 미래를 위해 냉철하고 진지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가은이만 허락한다면 나는 군대에 가고 싶었다. 왜냐면 한번만 더 학사경고를 받으면 3회 누적 학사경고로 재적당할 위기에 처한다.
학업상으로도 지금 이대로라면 무엇도 할 수 없는 처참한 컨디션이다 보니.
한마디로 내 인생에 작전타임이 필요한 때였다.
가은이는 이런 상황을 이해할까? 흔히 그렇듯이 군대로 인해 자연스레 이별의 수순을 밟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왜냐면 그녀 주위에는 너무나 많은 위성들이 돌고 있고 나의 공백은 그들에겐 절호의 기회이고 나에겐 치명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가은이랑 평생을 다짐한 사이도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사이는 그녀 말대로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우리의 관계는 그저 쌓아가는 과정일 뿐이니까.
난 한동안 끙끙 앓아누웠다. 생사를 오가는 듯한 고통스런 고민 끝에 나는 군대를 가기로 결정했다.
가은이가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다른 선택은 없어 보였다. 난 그녀를 위해 뭔가 근사한 미래를 준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지금 떠나야 했다.
이건 그녀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난 가은이에게 연락을 했고 비장한 각오로 늘 만나던 그 카페로 나갔다.
선물을 하나 내민다. 은색 지포 라이타다.
언젠가 길을 가다 멋지다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선물에 너무 감동했지만 이건 뭘까? 그냥 주는 거라고 하긴 하지만.
나는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나와서 날짜를 꼽아 봤다. 200일이 3일전이었구나.
이게 다 우리의 어정쩡한 관계설정으로 빚어 진 일이긴 하지만 그녀가 조금 서운했을 수도 있을까.
지나가는 말이라도 벌써 만난지 200일이나 되었네라고 했어야 한건 아닐까.
자신이 우리의 관계를 연인으로 못박는 걸 싫어하긴 하더라도 말이다.
어쨋든 난 그녀의 선물에 너무 기뻤다.
하지만 이 모든 행복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막혔다.
운명의 장난일까.
가장 행복하고 가장 높이 날아 오른 이 순간이 가장 처참하게 추락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라니.
나는 차마 그 행복한 순간에 군대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복학시기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입대신청을 늦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해해줄 거라 믿고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입대신청을 했다.
아니면 1년을 더 쉬어야 하거나 코스모스 졸업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 무렵 선영이에게 연락이 왔다. 술 한 잔 사달라고.
그래 선영이에게 부탁 좀 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사실을 선영이에게 털어 놓고 중재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약속했던 술자리에 갔을 땐 이미 선영이는 약간 취해 있었다.
"예전에 내가 남녀간에 순수한 우정이 어쩌고 했던 거 기억나?"
나는 기억을 더듬었고 "아... 예전에... 그래 기억나지."
"그때 내 생각은 안밝혔지만 난 남녀간에 순수한 우정은 없다는 쪽이야."
난 그 이야기를 왜 하는 지 잘 몰랐다. 난 가은이랑 내 관계를 얘기하는 줄 알았다.
사실 가은이랑 내가 이렇게 가까워져 가는 걸 선영이는 잘 모른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가은이가 늘 관계에 대해 성급하게 말하는 걸 조심하는 편이었고 내가 자칫 성급하게 밝혔다가 가은이의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해서.
"예전에는 몰랐는데 너랑 있으면 참 편해."
"그야. 나도 선영이 너랑 있으면 그렇지. 우린 친구니까."
"오빠랑은 왜 이런 편한 감정이 없지? 오빠랑 있으면 난 정말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생각밖에는 안들어."
"연인사이엔 누구나 다 힘든 게 있어. 선영아."
"여자로서 나 어때? 너랑나랑."
"여자로서?? ㅋㅋㅋ 여자로서 최고지. 하하. 그냥 웃음밖에는 안나온다. 갑자기 무슨 여자야. 최고다. 최고. 하하하하"
왜 그렇게 그 말이 우습던지 나는 선영이를 쳐다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러자 갑자기 선영이가 일어나 가버린다. 난 무척 당황했다.
한번도 선영이랑 싸우거나 내게 삐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상황이 더 당황스러웠다.
도움 좀 받으려고 했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가은이와의 문제를 해결해 줄 유일한 중재자였는 데 그 귀중한 다리가 사라져 버린 셈이다.
이제 가은이랑 만약 문제라도 생기면 도와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섬뜩했다. 하지만 내가 뭘 어쨌다고 저러지?
그리고 얼마 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결국 헤어졌다는 걸. 한동안 선영이랑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혀 뜻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럼 그게 고백이었나? 난 혼란스러웠다. 문득 문득 매력적이라는 생각은 했어도 한번도 진지하게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한 녀석과의 우정은 뜻하지 않게 흔들렸고 정말 이제는 내가 직접 풀지 않으면 안 될 큰 산이 하나 내 앞에 서 있다.
나는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어마어마하게 자세한 내 인생설계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깔끔하게 만들어진 건축설계도를 처럼 내 머리속엔 앞으로의 계획이 가지런히 정렬되었고 마침내 약속장소로 나갔다.
내 인생의 투자자에게 프레젠테이션할 시간이 다가온다. 투자자는 단 한사람.
좀 조용한 곳이 좋겠다싶어 예전 그 레스토랑으로 갔다.
나는 지금 내 선택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와 앞으로의 계획을 떨리는 마음으로 설명해 나갔다.
그 때 비로소 지금까지 숨겨 왔던 2회 학사경고에 대해 말했고 그로 인해 군대를 가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도.
돌아와 어떤 시험을 준비할 것이며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를 전문화시키겠다는 그런 일종의 보고였다.
난 준비한 대로 아주 명확하고 논리정연하게 설명을 마쳤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이런 상황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의외로 그녀의 반응은 담담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내게 무얼 바라고 하는 이런 얘기인지는 잘 모르겠어. 모두 너만의 고민, 너만의 문제잖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서로 모든 생각을 공유하기로 한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는 걸 보면서 오늘 많이 느껴.
모든 일이 거의 다 결정된 시점에서 무슨 상의를 한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고. 이건 식은 내가 원하던 관계가 아니야."
항상 자기의 주장을 할 때면 평소보다도 더 차분하고 안정된 톤으로 말했다. 그게 더 무섭다.
차라리 흥분했다면 덜 무서웠을 텐데. 나는 쥐죽은 듯 가만히 듣고 있었다.
"들어가기 전에까지 연락은 말아줬음 좋겠어."
그리고나선 가버렸다. 아주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녀의 말을 마치고서.
난 이런 결과를 어쩌면 예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를 위한 결정이었다는 말은 핑계다. 그했다면 그 결정에 그녀가 떠나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을 동시에 잃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예상보다 입대날짜가 빨라졌고 약속대로 가은이겐 연락 하지 않았다. 아니 해도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
찾아가 매달린다고 그녀의 생각이 바뀔거라는 생각은 아니란 걸 잘 알았다. 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한번 돌아서면 다시는 안보는 스타일. 밀어 붙여 될 게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게 끝나버렸을 지도 모른다.
나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가은이와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렸다.
이렇게 끝나는 걸까? 군대를 앞두고 깨져버리는 수많은 커플들 처럼.
난 도를 닦는 기분으로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자제했다. 결코 그런 끈적이는 행동이 실재 문제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한번 딱 한번만은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방문했다.
입대를 1주일 남겨 둔 시점에서 난 편지 한 장을 들고.
그녀는 만날 수 없었고 처음 만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반겼으며 그 분께 내 편지를 전했다.
드디어 입소하는 날이었다.
논산훈련소 앞에서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막 들어가려던 순간 익숙한 한 여자를 발견하게 된다.
선영.
홀딱 깎은 내 머리를 보더니 깔깔깔 넘어간다. 여전하구나. 선영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남친 바꿨다는 얘기를 했다.
고맙다는 말 대신 한번 안아 줬다.
"남친 나중에 보여줘. 고마워." 씨익 한번 웃어 줬다.
그리고 나서 들어 갈려는 데 편지를 하나 건네준다.
그건 내가 가은이에게 마지막으로 줬던 그 편지였다. 그 편지가 다시 내게 돌아 왔다.
거기에 내가 큼지막하게 써 준 짧은 글귀가 있었다.
세번의 사랑
첫눈에 반한 사랑을 했다. 처음 봤을 때 그게 그저 시작이란 걸 모른채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두번째 일방적인 사랑을 했다. 내 모든 걸 주려고 했다.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 사람에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은 채.
세번째 난 사랑이라는 말을 잊었다. 그건 함께 나누며 조금씩 쌓아 가며 떠나는 오랜 여행과 같은 것이었기에.
이제서야 난 내가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쓴 글귀 아래에서 가은이가 쓴 한 줄의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집 주소.
The End
헌팅녀 1편
http://todayhumor.dreamwiz.com/board/search_view.php?table=humorbest&no=263411&page=1&keyfield=subject&keyword=헌팅녀&search_table_name=humorbest& 헌팅녀 2편
http://todayhumor.dreamwiz.com/board/search_view.php?table=humorbest&no=263842&page=1&keyfield=subject&keyword=헌팅녀&search_table_name=humorbest& 어쩌다 글을 쓰다 보니 너무 길어 졌습니다.
아무쪼록 휴일 심심하신 분들께 기분좋은 휴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헌팅녀 1편은 실화입니다. 아주아주 오래 전에 성신여대 앞 번화가에서 일어난.
2,3편은 글쎄요.^^
혹시 1편의 헌팅녀께서 여전히 솔로이시라면 연락 한번 주세요. 저도 솔로라는 사실에 너무 부담 가지시진 마시구요. 딱 한시간만 우리 커피타임 가져요. ^^
메일주소는
[email protected]입니다.
이렇게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