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긴글] 김대중이 왜 빨갱이란 소리를 듣는지 물어본 유저님께 드리는 글
게시물ID : sisa_9189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니트와넥타이
추천 : 21
조회수 : 1215회
댓글수 : 40개
등록시간 : 2017/05/04 03:26:33
옵션
  • 창작글
어느 여자분이 글로 질문을 하셨어요.
처음에 댓글로 답을 쓰다가 너무 길어져서 그냥 글타래로 써봤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 완벽하지 않아 디테일에서 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야기부터 해야할 것 같은데요.
임시정부 수립 후 이승만이라는 자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그런데 독립자금을 미국 한인회에서 후원받아서 중간에서 쏙쏙 빼먹는 사기꾼이었지요.
임시정부는 가난에 허덕였는데 말입니다.
임시정부는 참다못해 이승만을 자르고 김구를 대통령으로 선출합니다.
김구는 투쟁 중심의 독립운동가였고, 바로 이봉창 의사 등의 독립의거를 비롯 투쟁모드로 들어갑니다.
 
이후 광복 이후에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왔고, 미 군정 아래서 이승만의 로비가 시작됩니다.
결국 미국 유학파 출신이던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고, 김구는 암살당합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이승만은 서울은 안전하다고 하며, 도망간 뒤 한강다리를 폭파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훗날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무려 4선을 노리다 시민들의 거센 요구에 하야합니다.
그게 4.19 입니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해서 거기서 죽죠.
 
그 뒤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하죠.
그런데 만주군 출신 박정희가 김종필과 함께 쿠데타로 권력을 잡습니다.
박정희는 무려 18년을 통치하죠.
유신헌법을 만들어 종신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거의 히틀러 급이죠.
 
여기서 박정희에 대한 신화가 많이 탄생하는데,
실은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많은 도움을 미국으로부터 받습니다.
당시는 냉전시대였고,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전략은 군비를 늘리는 것보다 신흥국을 자본주의 국가로 키우는 것이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더욱 경제적이고 안정된 전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대한민국에 돈을 빌려주고 그 돈으로 투자를 해서 공장을 짓도록 했죠.
박정희는 간섭이라 여기고 원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압력은 컸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미국이 세워준거죠.
결국 할 수 없이 받아들인 수출장려정책이었는데, 이게 대박이 터져서 한국 경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지금의 중국경제처럼 싼 인건비로 몰아붙인거죠.
그 과정에서 개개인의 살림이 많이 좋아졌는데,
지금의 중장년층은 이걸 잊지 않고 박정희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미국이 세워준 자본주의 우방 육성 전략이죠.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잘 돼서가 절대 아닙니다.
박정희 초기 집권 당시에 돼지를 키워 돈을 벌자 정도가 주요 경제 육성 정책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군인이 경제정책을 잘 세울 것 같습니까?
월남전 파병을 해서 한국군인이 당시 많이 베트남으로 갔습니다.
미국은 한국군인에게도 미군과 동일한 임금을 지불했는데 박정희는 여기서 80퍼센트 정도를 삥땅치고 20퍼센트 정도만 줬죠.
고엽제 희생군인에게도 보상따위는 없었습니다.
광복 이후 한국은 일본과 외교가 단절되어있는 상태였는데 박정희는 일본한테 또 돈을 받고 수교를 했죠.
그 돈도 삥땅치고 위안부 이야기는 그때도 마무리 된 걸로 합의를 봤었습니다.
심지어 일본 기생집에서 만주군관출신 동기에게 그 때 일본 군관 생활이 자신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식의 발언을 했었죠.
그런 식으로 돈을 긁어모으며 박정희는 재벌을 키워주며 또 뒷돈을 챙기고, 알토란 같은 기업은 자기가 먹고, 재벌은 재벌끼리 돈 놓고 돈 먹고.
이때 제일 혜택을 많이 본 것이 삼성이죠.
또 육영수는 자기 이름을 따 육영재단을 만들었죠. 지금의 미르 케이 같은 겁니다.
이게 얼마나 알짜였으면 훗날 자손들끼리 죽이고 죽고 했을까요.
아무튼 박정희는 김재규 열사의 총탄에 저 세상으로 갑니다. 그게 10.26입니다.
 
박정희의 독재에 항거한 정치인으로는 경상도의 김영삼, 전라도의 김대중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인기가 좋았고 유력 대통령 후보였습니다.
지금의 문재인 급 정도 되는 것이죠.
박정희가 이들을 가만 둘리 없죠.
실제로 독재를 반대한 김대중 씨는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고 누명을 씌워 사형언도를 받고 수감되어 언제든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와 싸웠습니다.
그래도 항복하지 않고 독재를 반대했죠.
그것이 노벨평화상의 이유가 됩니다. 그가 살아난 것은 미국의 입김이 작용해서입니다.
그러나 언론이 거수기 역할 밖에 안되는 그 당시에는 김대중은 빨갱이가 될 수 밖에 없었죠.
다시 박정희 사망 뒤로 임시 대통령이 최규하였고, 바로 이때 또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이 전두환입니다. 박정희의 부하죠.
최규하는 힘없이 전두환 앞에서 얌전하게 하야했고,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전국 대학생들이 서울역 앞에서 데모를 했습니다. 그 선봉이 유시민 심재철이었는데, 둘은 훗날 정의당, 자유당으로 갔죠.
그 데모는 시작 전에 훗날을 도모하기로 하고 없어졌지만,
광주의 대학생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두환은 그들을 진압하려 공수부대를 파견하고 발포했죠.
그래서 시민들이 분개해서 함께 싸운 겁니다.
엄청난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그것이 5.18입니다.
 
무자비한 진압 뒤에 전두환은 삼청교육대를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는 세력들은 다 잡아들였죠. 군기교육한 겁니다.
전두환은 그 뒤로 자기 부하인 노태우에게 정권을 물려주려했는데, 그때 다시 대학생들이 데모를 했죠.
그 때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사건이 일어났고, (정확히는 고문사인데, 경찰의 변명이 탁 쳤는데 억 하고 죽었다고 한 것)
거기에 분노한 국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죠.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혹은 내정자였던) 노태우가 자신은 이전까지의 체육관 선거 그만두고 (북한 스타일 만장일치 선거입니다.)
국민에게 투표권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민주시민의 승리였죠.
그 것을 6.29 선언이라 합니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게 된 것이 이승만 이후 수 십년 만인 거죠. 정말 어처구니 없도록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 때 김대중과 김영삼이 사이좋게 한번씩 했으면 좋으련만,
둘이 표를 갈라먹는 우를 범해서,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이 됩니다. 미칠 노릇이죠.

알다시피 전두환은 일해재단과 평화의 댐으로,
노태우는 선경그룹과 사돈을 맺으며 돈을 먹고 기업들에게 삥을 뜯었죠.
선경그룹에게는 비디오 테입이라는 알짜 산업과 훗날 핸드폰 사업도 줘서 떼돈을 벌게 만듭니다. (선경=에스케이)
 
노태우 이후 국민이 뽑는 대통령은 누구였을까요?
전두환 노태우의 민정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김종필의 공화당과 합쳐서 민주자유당, 민자당이 됩니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과 김영삼의 통일 민주당이 합의 했더라면 얼마나 민주정치가 앞당겨졌을까요.

김영삼의 가장 큰 실책이 이것입니다. 군부세력과의 통합. 적폐 끌어안기인 거죠.
이때 가장 크게 반발한 김영삼 계의 한명이 노무현입니다.
노무현과 김영삼 밑에서 나와 민주당에 오고 안희정을 만난 것이 그 시점입니다.
 
김영삼의 두 번 째로 큰 실책은 '우리가 남이가'를 이때 탄생시켰다는 겁니다.
광주는 당연히 그 상처로 인해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밀 수밖에 없었고 몰표를 던졌습니다.
김영삼을 미는 경상도 또한 몰표를 던졌던 거죠.
이때도 경상도에서는 광주, 전라도, 김대중에게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승리했습니다.
 
김영삼 이후 국민이 뽑은 대통령은 김대중이었습니다.
민자당은 선거 직전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그 당시 선거철에 북한에 돈을 주고 총을 쏴달라고 했는데 이게 발각이 되었죠.
그 유명한 총풍사건입니다.
이것만 봐도 빨갱이 프레임이 선거에서 얼마나 유용한지 알 수 있죠.
한나라당은 이때도 김대중을 빨갱이라 하며 반공세력을 이용했습니다.
평화통일 노선을 추구하는 김대중은 항상 그 누명의 희생자였죠.
김대중이 당선 된 것은 대세였던 이회창의 표를 이인제 (피닉제) 가 한나라당의 표를 갈라먹었기 때문입니다.
박빙의 차이로 겨우 이겼죠.
그런데 김대중 당선 시기는 대한민국이 부도 상태였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가 얼마나 해먹었는지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난거죠.
김영삼은 경제정책 같은 걸 잘 모르고요, 그래서 아이엠에프가 왔죠.
김대중은 아이엠에프를 국민과 함께 금모으기 운동으로 극복하고,
또 북한에 햇볕정책을 써서 한반도에 평화의 분위기가 돌게 했죠.
적어도 그때는 매우 좋은 시기였습니다.
 
그 다음 선거에서 노무현의 신화적인 당선이 있었습니다.
노무현은 지역구도 타파와 검찰조직의 개혁을 내세웠지만,
언론의 비협조, 김한길의 배신, 한나라당과 손잡은 정의당의 뒷통수에 의해 탄핵위기까지 겪는 등
숱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노무현은 오죽하면 가장 친한 친구이자 비서실장인 문재인에게 정치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죠.
 
탄핵은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었고, 그것이 오히려 한나라당에게 역풍으로 작용했는데,
그때 한나라당을 구한 여제가 박정희의 딸 박근혜입니다. 그 뒤에는 정윤회와 최순실이 있었겠지만 그때는 아무도 몰랐죠.
박정희 향수는 선거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고, 경상도는 항상 몰표로 화답했습니다.
 
그 이후는 잘 아실겁니다. 이명박근혜.
그때부터는 빨갱이가 종북이라는 용어로 바뀌었고,
거기다 자본계급의 반대인 노동세럭, 즉 좌파까지 북한추종세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종북좌파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자본계급이 보수라 주장하지만
사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딱가리들이야말로 권력자 옆에서 콩고물 뜯어먹으며 재벌과 혼인관계로 결탁하며 살아온 기득권 층이죠.
그동안 해먹은 것도 많고요.

민주 세력과 별개로 재벌과 반대로 싸워온 노동운동 계급들이 있습니다.
진보정당이죠. 거긴 족보가 복잡하고 마이너 라인이라 패스합니다.
 
자,
이번 선거는 아시다시피 촛불 집회 이후의 첫 선거입니다.
촛불선거는 나이드신 세대들에게는 6월 항쟁을 떠올리게 하죠.
이미 우리에게는 6.29 이후 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어부지리로 노태우가 집권한 어처구니 없는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무현의 가슴아픈 최후가 있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반쪽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기득권 세력은 여전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똘똘 뭉쳐있습니다.
지역의 충성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발정제고 뭐고 다 용서해주니까요.
과연 우리에겐 무엇이 남아있나요?
누가 우리 옆에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기득권 세력을 이길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다시 이명박근혜 시대로 돌아가는 건가요?
 
아닙니다.
약 9년 전, 노무현의 친구가 운명처럼 정치를 시작하고,
원칙과 상식으로 무장한 새롭고 참신한 민주당을 만들어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중요한 시점에 감히 진보가 끼어들 게재가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소수 차별, 노동자, 인권, 진정한 남녀평등 다 좋은 이야깁니다.
그런데,
저 적폐를 놔두고 그게 말이 될 것 같습니까?
보수? 
역시 미안한 이야기지만 대한민국에는 보수가 없습니다.
 
개혁보수? 웃기지 마세요. 북한 이용해 먹는 낡은 프레임 벗어던지기 전에는,
그보다 먼저 대구 사람한테만 잘보이려는 그런 지역구도로는 보수라고 하면 안됩니다.
제가 보기엔 그건 그저 똥고집일 뿐이죠. 
북한 종북 프레임 이제 다 압니다. 국민은 순순히 속지 않습니다.
또 김대중의 조력자였던 사람이 인생 말년에 상왕이 되고 싶어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그 사람.
우리에게는 라인하르트보다 더 강력한 탱커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시겠죠. 순해보이지만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우리의 무기입니다.
우리가 그의 방패 뒤에서 적폐세력을 이겨야 합니다.
 
이깁시다.
이번에 지면 정말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할 지 모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글을 쓰는 것 밖에는 없네요.
이것이 제가 말하는 대의입니다.
 
 
P.S
질문에 대한 답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습니다.
주제넘게 호소해서 죄송합니다.
틀린부분은 정정 부탁드리고요.
 
그리고 미안해 찰스야 넌 적폐도 아니고 그냥 깜이 안돼서 글에서 뺐다. 미안해.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