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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림, 환상통
아픈 것도
아픈 곳 나름이지만
아픈 데가 없는데
아픈 것이
기막힌 아픔이라
우리는 늘
아픔을 재며 사는가
가시에 찔린 아픔은
무릎이 까진 아픔을 따르지 못해
어느 날
피댓줄에 감겨
쇠바퀴에 으스러진
뼈
끝내
팔을 잘라내고서야
목숨을 건진 사내가
느닷없이
손가락이 아프다고 보채는데
없는 것이
있는 것마냥 아픈 것이
더 기막힌 아픔이라
최동호, 녹차 한 잔의 미소
천천히 혼자 거닐 수 있는
서늘한 앞마당 어딘가에 있었으면
조용히 떫푸른 녹차 한 잔
잔잔한 미소 띄워 영원처럼 마시고
꼬리치는 삽살개 소리나 어쩌다
찰랑이는 바람결도 외로운 귓가에 들었으면
박라연, 다시 꿈꿀 수 있다면
다시 꿈꿀 수 있다면
개미 한 마리의 손톱으로 사천 오백 날쯤
살아 낸 백송, 뚫고 들어가 살아보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제 몸의 일부를 썩히는 일
제 혼의 일부를 베어내는 순간을 닮아보는 일
향기가 악취 되는 순간을 껴안는 일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제 것인 양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누군가의 슬픔을 소리 낼 줄 아는 새가 되는 일
새가 되어 살면서
미처 못 간 길, 허공에 길을 내어주는 일
그 길을 또 다시 잃어버리고도
개미 한 마리로 살아 내게 하는 일
나무속에 살면서 새가 되어 살면서
축복은 신이 내리고
불운은 인간이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박제천, 정암(靜菴)
벌레 울음소리가 드높은 밤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나이 들수록 배운 것을 조금씩 까먹기 마련인데
언제나 아는 대로 다 말하는 병만은 버리지 못한다
꽃이 지고 새가 우는 까닭조차 헤아린 수 없어
저자거리에 숨어 한잔 술에 몸을 맡기기도 한다
잘난 이름 석자를 내두르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돌아다님은 다만 뜻한 바를 펼쳐 보임이다
그때 그 구름 속에 뿌리를 내렸던 난초잎을 기리며
벌레 울음소리에 장단을 맞춰보는 밤이 늘었다
김수영, 오래된 여행가방
스무 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 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