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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풀밭에서
바람이 부는 벌판을 간다
흔들리는 내가 없으면
바람은 소리조차 지니지 않는다
머리칼과 옷고름을 날리며 바람이 웃는다
의심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이
나즉히 바람이 되어 흐르는 소리
어디를 가도 새로운 풀잎이 고개를 든다
땅을 밟지 않고는 나는 바람처럼 갈 수가 없다
조약돌 집어 바람 속에 던진다 이내 떨어진다
가고는 다시 오지 않는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기에 나는 영영 살아지지 않는다
차라리 풀밭에 쓰러진다
하늘에 오를 수 없는 조약돌처럼
사랑에는 뉘우침이 없다
내 지은 죄는 끝내 내가 지리라
아 그리움 하나만으로도 내 영혼이 바람속에 간다
홍윤숙, 빈 항아리
비어 있는 항아리를 보면
무엇이든 그 속에 담아두고 싶어진다
꽃이 아니라도 두루마리 종이든 막대기든
긴 항아리는 긴 모습의 둥근 항아리는
둥근 모습의 모 없이 부드럽고
향기로운 생각 하나씩을 담아두고 싶어진다
바람 불고 가랑잎 지는 가을이 오니
빈 항아리는 비어 있는 속이 더욱 출렁거려
담아둘 꽃 한 송이 그리다가
스스로 한 묶음의 꽃이 된다
누군가 저처럼 비어서 출렁거리는 이 세상
어둡고 깊은 가슴을 찾아
그 가슴의 심장이 되고 싶어진다
빈 항아리는 비어서 충만한 샘이 된다
박승민, 그루터기
벼를 메어낸 논바닥이 누군가의 말년 같다
어느 나라의 차상위계층 안방 속 같다
겨울 내내 그루터기 물고 있는 것은 살얼음 속의 푸르던 날
이 세상 가장 아픈 급소는
자식새끼가 제 약점을 고스란히 빼다 박을 때
그래서 봄이 오면 농부는 자기 생을 이식한 흉터를 무자비하게 갈아엎고
논바닥에 푸른색 도배를 하는 것이다
등목을 하려고 수건으로 탁, 탁 등을 치는 순간
감쪽같이 그의 등판에 업혀 있는 그루터기들
김종길, 악수(握手)
반쯤 눈을 뜨시고 쳐다보실 뿐
아무 말씀도 없다
그래도 내 손을 잡으시는 여위신 손길
철든 뒤론 처음으로 잡아 보는 아버지의 손길
오십여 년의 부자(父子) 사이가 영결하는 마당에
새삼 무슨 말씀이 필요하시겠는가
무슨 언어가, 이 순간
이 처음이요 마지막인 부자간(父子間)의 악수보다
더 애틋하고 간절한 사연을 전달할 수 있겠는가
신용목, 바람이 그 노래를 불렀다
오래된 숫자를 물린
동네 변두리 길가 번지에
네온도 없는 PVC상 간판이 걸려 있다
숨바꼭질하던 유년이 머물곤 하던 그 집
뒤뜰엔 멀리 갈 수압을 기다리는
파이프들 월 오만원이 싼 내 방
창문을 바라보며 크기에 맞춰
나란히 누워 있었다
소음을 피해 온 고양이들이
은밀하게 교미를 하던 그곳에
키 작은 설비공이 파이프를 내가고
다시 파이프를 쌓고 여름내 나의 창으로
가사 모를 휘파람을 날려 보냈다
비가 오면 깊은 창자를 열어
바람을 가두고 바람을 타고 온 나방
들이 성긴 그물을 짜기도 하며 낮잠 잦던
내 꿈 밖을 휘파람으로 채우던 여름
장마가 설잠처럼 물러난 아침
휘파람을 부는 대신 젊은 설비공은
파이프 옆에 가늘게 누워
작은 키를 맞추고 있었다 비가
오는 동안 멀리 갈 수압이 먼저
그의 몸을 통과했는지
매끄럽게 굳은 채 어디론가 실려 갔다
그가 부르던 휘파람의 알지 못할
가사처럼 알 수 없는 소문이
유년 대신 모여들어 숨바꼭질을 했다
새끼 밴 고양이가 어둡게 지나가는
파이프 더미의 견고함 위로
비가 내리고 비가
올 때마다 파이프들이 둥근 입을 열고
바람을 풀어 휘파람을 불었다
가는 음정이 내 방 창에 그물을 짤 때
나는 오만원을 생각하며 짐을 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