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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을 주었다.
남자는 또 다시 안전벨트를 재빠르게 풀었다. 옆 조수석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피로 얼룩진 얼굴. 그리고 작은 입에서 얕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황급히 아내의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있는 힘껏 열었다.
뜨겁게 토해내는 불길이 남자의 몸을 삽시간에 감쌌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 옆으로 돌아갔다. 자욱한 연기를 헤치고 창문 너머로 아내가 힘겹게 숨 쉬는 모습을 보면서 남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차 손잡이를 잡고 열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번에도 열리지 않았다.
"크흑. 제발!!!"
남자는 한 발 물러서서 한 쪽 다리로 창문을 힘차게 밀쳤다. 그러나 창문은 비아냥 거리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쓰러진 남자는 다시 일어나서 다시 창문에 발길질 했다. 역시나 미동도 없었다.
"안 돼! 제, 제발...!"
남자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며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계속 창문을 치고 차 손잡이를 달각 거리면서 열려고 힘썼다. 남자의 호흡이 가빠지는 만큼 아내의 숨소리도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알 수 없는 먹먹함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엇을 위해 나는 이러고 있는가. 결국에는 뻔한 결과가 다시 기다리고 있음을 앎에도 이토록 방관할 수 밖에 없단 말인가. 누구를 위한 기회란 얘기인가.
잠시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불길은 남자와 차를 에워쌌다. 그리고 엄청난 광음과 함께 폭발했다. 폭발음 속에 남자의 절규가 들렸던 건 아마도 나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다시... 다시 하겠어요..."
또 다시 내 앞에 나타난 남자는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말을 꺼냈다. 아까와 똑같은, 아니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같았던 대답이었다. 조용히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모습. 생기를 잃은 꽃 한 송이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어찌됐든 나는 남자의 대답을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차분히 마음을 다스리고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올렸다.
1분을 주었다.
*
"하하. 요즘 고생이 많구만."
역겨운 웃음과 함께 상사가 말을 걸었다. 앞에서 욕 한 바가지 쏟아붓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 할 일을 하는 것 뿐인데요, 뭐."
"쉬엄쉬엄 하라구. 그러다 병이라도 나면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겠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하긴, 이런 병신같은 일을 나 대신 나서서 할 사람은 분명 없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자네 덕분에 내가 기가 살아, 기가 살어. 계속해서 잘 좀 부탁하겠네."
말을 끝마친 상사는 또 다시 누런 이를 드러내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꾸만 아까의 남자가 떠올랐다.
그는 그렇게 수십번을 계속 더 반복하고는 이내 포기하고 지옥으로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에 그가 나를 쳐다보던 그 눈빛을 지울 수 없었다. 물과 기름처럼, 고마움과 배신감이 층층히 섞여 있었다. 그런 남자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업무로 돌아와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힘 없이 걸터앉았다. 책상 너머로 이번 달 매출그래프가 그려진 칠판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상한가를 찍고 있었다. 상사가 입이 찢어지도록 헤벌레 했던 이유가 있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는 고개를 젖혔다.
업무를 시작한지 이제 3개월정도 되었지만 이 불쾌한 마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스스로 나서서 자원할만큼 뜻 모를 기대감이 있었다. 억울하게 혹은 예기치 못하게 죽어간 이들을 조금이나마 구원해주지 않을까하는 작은 기대감. 하지만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선행을 베푸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한 퍼즐 속에서 나 홀로 다른 조각을 짜맞추려 했지만 결국에는 정해진 조각만이 정답이 될 뿐이었다.
나의 작은 기대감을 이뤄내기 위해 행했던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기업에 득이 되었다. 매출이 더 오르고 상사가 나를 칭찬해주었다.
알 수 없는 빗나감에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이 요즘 잘 나가신다며?"
같은 영업부 소속의 강 사원이 말을 걸었다. 악의가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뭐라 대꾸할 기분이 아니었다. 무시하고 지나가는 나를 뾰루퉁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자아자! 오늘도 열심히!
-아자아자!
가벼운 어지러움을 달래기위해 로비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함성이 들려왔다. 앳된 표정에 불안한 눈동자를 굴려가며 구호를 따라하는 신입사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회사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알고나 들어온걸까. 실소가 슬그머니 터져나왔지만 이내 헛기침을 하며 삼켰다.
나 또한 입사 당시, 회사에 헌신하겠다는 당찬 포부와 함께 들어왔다. 지옥에서의 지난 5년간, 가축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노예처럼 일했던 지난 날들이었다. 어쩌다 운 좋게 이 회사의 채용공고를 확인했고 어떻게든 노예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준비해서 입사할 수 있었다. 뭐 정확히는 죽기 전에 다녔던 회사에서의 영업 경력이 아무래도 그들의 눈에 들어왔나 싶다.
어쨌든 저 가엾은 신입사원들을 뒤로 하고 자판기의 커피를 꺼내 마셨다.
둔탁하고 검으스름한 빛깔. 철 맛이 느껴지는 찝찝한 뒷 맛. 오늘따라 더욱 살아 생전에 먹었던 커피가 그리워졌다.
"네, 네! 이쪽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먼 발치에서 발자국 소리들과 함께 부장님의 모습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에는 창백한 낯빛의 검은 그림자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저들이 바로 이 회사의 주 고객. 간단히 말해서 VIP 고객들이었다. 부장님은 얼굴도 형체도 없는 그들 앞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로비에서 기계처럼 구호를 외치던 신입사원들도 그 광경을 보았는지 얼어붙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생전 보지도 못했던 존재들을 마주하니 놀라만도 했다. 나 또한 그랬었으니.
부장님의 빠른 발걸음과 함께 검은 그림자들도 사라지자 조용했던 로비도 그제서야 웅성웅성대기 시작했다.
사실 저 존재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내가 아는 정보로는.
회사의 주 고객. 어떠한 연유로 우리와 거래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매출의 90%가 저 고객들에 의해 발생한다고 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비중을 차지하는지라 일각에서는 저들을 위한 서비스 회사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뭐 어찌됐든 저들 덕분에 회사 경영도 상당히 순조롭게 돌아가고 월급이며 복지며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받고 있으니 아무도 더 이상 깊게 알려고 하지 않았다.
회사 밖으로 나와 넓은 황야를 바라 보았다. 검붉은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워 있었고 대지 곳곳에서는 누군지도 모를 이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 그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 떨어져가는 옷가지를 겨우 걸친 채 얕은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거대한 채찍을 휘두르며 날카롭게 주시하는 악마들의 모습도 보였다. 내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 중 한 악마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싱긋-
뜨거운 콧김을 뿜으며 악마가 웃었다.
'저 새끼.'
회사에 입사하기 전 저 악마에게 지독히도 채찍질을 당하던 때가 떠올랐다. 일을 잘하든 못하든 중요하지 않았다. 저 악마는 그저 우리를 장난감 취급하며 갖고 놀았다. 자기 눈 앞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불쾌하다며 채찍질을 당하기도 했고, 일을 마치고 겨우 쉬려 자리에 앉으면 이유없이 다가와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침을 뱉으면 그저 맞아야 했고 불같은 채찍질에도 피하거나 그만하라고 외칠 수도 없었다.
그런 존재였다. 예전의 나는, 그리고 지금 보이는 저들은. 지옥의 노예란 이런 대접이다.
어쨌든 악마의 웃음에 나도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악마가 채찍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겉으로는 웃고있지만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난 상태임이 분명했다.
무거운 마음을 다시 그 곳에 놓아둔 채 뒤돌아서려는 찰나에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초점을 잃은 멍한 눈. 악마의 채찍질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내 고개를 돌리게 했던 그 눈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여느 노예들과 다를 바 없는 행색이었다. 불에 그을린 양복이 아니었으면 그 남자였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나왔다. 아내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도 되돌리고 되돌아가며 불길 속을 헤집던 남자였다. 거래의 조건이 터무니없음을 알면서도 일말의 주저도 없이 받아들였던 남자였다.
무거운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행여나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칠까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회사로 냅다 뛰었다
*
의자에 힘 없이 걸터앉았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계속해서 솟구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크게 숨을 내쉬고는 의자에 몸을 맡겼다.
-함부로 감정을 담아서 지켜보면 안 돼.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해. 원래 이런 업무인거야.
의사들도 봐. 처음에는 환자가 죽고나면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죽음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업무를 담당했던 주임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 때 당시 아무 것도 모르던 내게 상사로서 가벼운 조언을 내뱉은 것이겠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주임님 또한 업무 시절, 나처럼 그 의미없는 발버둥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죽은 사람들을 지켜봤을 것이다. 1분이라는 구원의 기회를 몇 번이고 주면서 주임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지금 다시 주임님을 만날 수 있다면 꼭 한 번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그래서... 주임님 때는 구원에 성공한 사람이 있었나요?
주임님 생각에 잠기고 나니 그가 남겨준 메모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몇 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주임님의 업무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메모지였다.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서인지 군데군데 헤지고 너덜너덜해졌다.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손에 쥐고 내용을 읊었다.
- 리스트의 정보를 꼼꼼히 읽을 것. 선하게 자라온 사람일수록 영업에 성공할 확률이 높음
- 쉽게 넘어오지 않으면 영상을 한 번 더 보여줄 것
- 1분을 계속 사용하도록 권유하고 용기를 북돋아줄 것
- 환한 미소. 밝은 목소리. 친절한 응대
읽으면 읽을수록 기가차고 어이가 없었다. 전형적인 영업직의 메모였지만 우리가 처한 업무는 그 방향성이 다르지 않은가. 그럼에도 내가 이 터무니없는 내용이 담긴 메모지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는 이유는 하나다. 나는 절대 이렇게 영업을 하지 않을거라고.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반드시 내밀겠다고. 읽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일그러지기에 더욱 더 내 신념을 확고하게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내가 다짐한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
어수선한 웅성거림이 밖에서 들려왔다. 궁금한 마음에 살짝 문을 열고 쳐다보았다. 검은 그림자들 앞에서 머리를 쪼아리고 있는 부장님의 모습이 보였다. 이야기가 잘 안되었는지 연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대고 있었다. 그런 모습과는 대조되게 검은 그림자들은 미동도 없이 부장님 앞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부장님의 손길에 따라 검은 그림자들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조심히 문을 닫고 다시 책상앞으로 온 나는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회사 시스템 내로 들어가 아까 보았던 검은 그림자들의 고객정보를 확인했다. 일개 사원으로써 해당 정보를 열람할 권한이 없지만 주임이 남겨주고 간 ID와 password 덕분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VIP 고객들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몇 가지 기본 정보 외에는 공개되있지 않았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의 직업이었다. 하나같이 고위급의 간부직을 달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자들이 어째서 우리 회사와 거래하고 있는지는 알 턱이 없지만 왠지 모를 구린 구석이 느껴졌다. 또 다른 정보가 없나 여기저기 기웃거려봤지만 별 다른 수확은 없었다.
컴퓨터를 끄고 시계를 쳐다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기분 나쁘도록 찝찝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
회사 내 다른 부서 사람들은 내 업무가 상당히 복잡할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사람의 목숨을 놓고 행하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프로세스는 단순하다.
출근을 하면 누군가가 내 책상위에 리스트가 담긴 서류를 올려놓았다. 리스트에는 내가 영업을 뛰어야 할 사람들이 기록되 있었다. 그들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나이, 가족관계, 직업, 성장배경, 기타 등등 마치 이력서를 보는 듯한 정보들이 적혀 있다.
나는 그저 이들 중에 몇몇만 리스트에 체크하고 책상에 놔두기만 하면 됐다. 그럼 오전중에 누군가가 서류를 가지고 간다.
이러한 절차가 끝나고나면 오후부터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된다. 본격적이라고 해도 이 또한 간단한 일이었다. 바로 1분을 주는 것.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면 주변 모두 암전이 되었다. 내 책상에만 조그마하게 새어나오는 전등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잠시동안의 시간이 지나고나면 영상 하나가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아버지의 모습, 비 오는 날 우산 밑에서 서로 손을 꼬옥 잡은 커플,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영상들은 저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 모두 오전에 리스트에 체크했던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곧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영상이 시작되면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쥐고 입술을 물어뜯는다.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사람들, 다른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영상의 끝은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 그리고 죽음. 매번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사무실 가득히 채운 영상에 눈 돌릴 틈도 없이, 빠방하고 리얼한 사운드와 함께 관람해야만 했다.
이윽고 영상이 끝나고나면 내 앞에 그 영상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관람하는 동안 잔뜩 움츠러둔 몸을 태연히 정리하고는 그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그들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 시켜 주어야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몇 번의 대화끝에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책상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또 다시 사무실 가득히 영상이 가득 펼쳐지고, 그 실감나는 영상을 보고나서야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했다. 절반 정도는 그 자리에서 그냥 미쳐버리고, 다른 이들은 흐느끼며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 때가 바로 내가 치고 들어가야할 타이밍이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도, 마음 따스한 위로도 필요 없다. 그냥 한 마디면 되었다.
"다시 살려드릴게요.“
*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밤 사이에 내린 눈이 곳곳에 겹겹히 쌓여있었지만 맑은 햇살을 머금고 천천히 녹아갔다. 광장은 제법 사람들이 오고가며 어수선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엄마~ 이쪽이야~"
앳된 표정의 아이가 손을 흔들었다. 자그마한 보폭으로 아장아장 걷는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너무 멀리 가면 안돼요!"
엄마가 아이의 옷들을 주섬주섬 챙기며 소리쳤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외침에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더욱 몸을 흔들며 뛰어갔다. 오랜만의 나들이라 그런지 신이 난 모양이었다. 엄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따라갔다.
"메에롱~"
따라오는 엄마를 지켜보던 아이는 가볍게 혀를 내밀고는 발걸음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어머! 위험해!"
아이가 광장을 지나치고 도로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엄마는 들고있던 옷들을 떨어뜨리고 아이를 향해 뛰어갔다. 엄마의 외침에 광장을 걷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하지만 아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더욱 더 엄마와 멀어져갔다.
거세게 지나치는 차들을 사이에 두고 엄마는 창백해진 얼굴로 아이를 부르며 도로를 건넜다. 아이는 어느새 중앙선까지 걸어들어와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행히도 차들은 도로 위의 작은 아이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속도를 늦추며 빗겨갔다. 엄마가 아이의 곁에 다다르자 아이가 가볍게 엄마의 품에 안겼다.
"히히히. 엄마다."
"아아... 왜 그랬어!!! 위험하잖아!!!"
갑작스런 엄마의 다그침에 아이는 금새 울상이 되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핏기 가신 얼굴로 아이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아이는 금새 콧물을 흘리며 닭똥같은 눈물을 떨어뜨렸지만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지 엄마는 말없이 아이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는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이를 들어올렸다.
하필이면 전 날 술을 마시는게 아니었다. 하물며 취기가 가시지 않은 채 화물트럭을 모는게 아니었다. 정신 없는 머리를 조아리며 트럭을 몰던 운전자는 그 도로를 지나쳐서는 안 되었다. 중앙선을 옆에 두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운전자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화물차는 옆으로 미끄러졌다. 갑작스러운 충격음에 도로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차들은 정체되었다.
그렇게 두 송이의 꽃이 졌다.
영상이 끝나고 화면이 다시 어두워졌다. 사무실에는 차분히 내쉬는 내 숨소리와 말 없이 흐느끼고 있는 여자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이제... 아시겠나요?"
"내... 내 아이는요... 내 아이는요!!!"
목을 타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여자가 나에게 소리쳤다. 여자의 광기어린 눈빛을 쳐다보자 온 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아이도 안타깝지만..."
"우리 애는 어디있냐고! 같이 죽은거면 내 옆에 있어야 될 거 아니야!!!"
여자가 일어서서 내게 얼굴을 들이댔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여자의 울음이 멎어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시 살려드릴게요."
여자는 우는 와중에도 내 말에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개소리하지마!!!"
"아니요. 정말이에요. 다시 살려드릴게요."
"지금... 지금 나랑 장난하는거지...?"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당신 대체..."
"정말입니다. 이 곳은 현실이 아니에요. 이미 죽은 사람들의 세상이에요. 인정하셔야 되요."
여자의 눈빛을 피하지않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자 여자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 앉았다.
"지금 제가 장난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정말로 다시 그 때로 살려드릴게요. 1분 밖에 되지 않지만..."
"내 아이 어딨어...어딨냐고!!!"
"그러니까 제가 다시 돌려드린다구요. 다시 저 때로 돌아가게 해줄게요."
여자는 갈 곳 잃은 눈빛을 돌리며 입술을 떨었다.
" 1분이고 뭐고... 다시 돌려줘요... 내 아이... 어디있어... 돌려줘요... 돌려줘..."
"딱 1분이에요. 돌려드릴 수 있는 시간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지금 대체가... 뭐든 좋으니까 내 아이 다시 돌려줘요.. 돌려주라고!!!"
더 이상 이성적인 대화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사실 생각해보면 저 엄마같은 부류는 제법 많았다. 같이 사고 영상을 지켜보면서, 특히 자식과 함께 죽음을 맞은 부모들을 보면서 가슴 찢어지도록 마음이 아려왔다. 그들을 조용히 다독여주고 감싸주고 위로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그렇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언젠가부터는 말 없이 손가락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해서 1분을 바로 되돌려주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식을 눈 앞에 다시 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식을 꼬옥 감싸 안았다. 소리없이 울먹이기도 했고, 꿈이었다며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끔찍한 결말이 삽시간에 찾아와서 다시 둘을 떨어뜨려 놓았다. 내 앞에 다시 나타난 사람들은 자식을 안고 있던 팔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다시 나를 재촉했다.
돌려달라고.
그 때 부터는 1분을 몇 번이고 돌리며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1분을 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마음속으로 그들의 모습을 응원하며 바라볼 뿐이었다. 구원에 성공하기를 절실히 바라고 또 바라지만, 뭔지 모를 안타까움을 가슴 한 구석에 삼켰다.
그렇게 구원받지 못한 1분을 계속해서 소비하며 결국에는 모두 지옥으로 사라졌다. 다른 이들에게는 1분의 거래 조건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을 겪고보니 이 사람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걸 깨달았다. 세상 어떤 부모도 자식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테니까. 그렇기에 내 오전 리스트에도 자식과 함께 죽음을 맞은 부모들은 필수로 체크하였다.
영업하기가 쉬운 고객이라는 간사한 마음이 아니었다. 그들이 아파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지 않을까. 행여나 구원에 성공하여 못다한 이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그런 생각.
하지만 자꾸만 엇나갔다. 몇 번이고 자식의 죽음을 반복하는 이들을 보면서 몸서리 칠만큼 후회가 몰려왔다. 구원에 성공하기를 바라면서도 구원에 실패할게 뻔하다는 측은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려는 모든 행동이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그렇게 몇 번이고 차도에서 차에 치이는 여자와 아이를 보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어느날 영업부의 강 사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죽은 사람들이 다 이 세상으로 오는건 아니더라?"
평소 이상한 말을 잘하기에 여느때와 같이 그의 말을 흘러넘기고 커피를 마셨다.
"아니, 아니.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강 사원이 더욱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이며 얼굴을 가까이댔다.
"아, 진짜~ 또 무슨 헛소리 할려고 그래."
"진짜 이거 소름이라니까. 일단 들어봐봐."
강 사원이 내 어깨를 감싸고 로비에 놓인 테이블 앞으로 끌고왔다.
'또 시작이네.'
왠지 무시하고 넘어가면 계속 괴롭힐 것 같았다. 그래서 마지못해 의자에 앉았다. 내가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고서는 강 사원도 의자에 앉았다.
"나도 이거 아까 몰래 들은건데."
"몰래 듣다니?"
내가 시큰둥하게 쳐다보자 강 사원은 몸을 낮추고 말을 이어갔다.
"그, 우리 VIP고객 있잖아. 그 얼굴 시커먼 것들. 아니 얼굴도 없지 걔넨."
"아무튼. 그래서?"
"그 내가 부장님이랑 걔네랑 얘기하는걸 진짜 우연찮게 들은건데."
"아까는 몰래 들은거라며."
"아 쫌! 들어라."
강 사원이 목 멘 소리를 하자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우리가 죽고나면 이 쪽 세상으로 오잖아. 나 같은 경우에는 눈을 떠보니 길바닥이었고. 너는..."
강 사원은 아차싶어 말을 끊었다. 그리고 커피를 허겁지겁 마시고는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죽으면 이 쪽으로 오는게 맞잖아. 근데!"
강 사원이 일어서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이 세상말고 다른 세상도 있다더라."
말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간 강 사원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에휴 말을 말자."
역시나 헛소리는 끝까지 듣는게 아니었다. 나는 빈 종이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서둘러 일어섰다.
"아니. 왜~ 진짜라니까!"
"네에~ 네에~ 알겠습니다. 저는 바빠서 먼저 좀 가볼게요?"
잔뜩 삐쳐서 째려보는 강 사원을 뒤로하고 로비를 나왔다.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말이란걸 잘 알기에 자리를 급히 떴다.
회사 밖으로 나와 뜨거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자꾸만 여자와 아이의 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텁텁한 현기증이 찾아오고 다시금 마음 한 켠이 무거워졌다. 본능적으로 온 몸을 뒤지며 담배를 찾았지만 있을 리 없었다. 이 세상에는 담배란게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평소와 같이 황야를 거닐며 마음을 풀어볼까 싶었지만 혹시라도 그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될까 두려움이 살짝 적셔왔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한 번 더 크게 숨을 내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로 들어왔다. 책상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그대로 몸을 젖혔다.
'아, 하여간...'
좀 전에 강 사원이 내뱉은 말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강 사원의 말은 너무나 허황된, '알을 깠더니 사람이 나왔더라' 같은 이야기였다.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으로 넘어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였다. 저 세상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나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이 세상에 새롭게 잉태되었다. 메마른 황야 한 가운데에서든, 가파른 산맥에서든 죽은 사람들은 붉은 빛을 내며 꽃 한송이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새싹으로 자라나더니 이윽고 빨갛게 얼굴을 여밀며 꽃을 피운다. 검붉은 구름과 황갈색의 대지와 대조적인 모습에 아름답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자태를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지는 못했다. 이 곳의 뜨거운 공기를 꽃잎 끝부터 차례차례 적시고 나면 금새 시들어버렸다. 본연의 빛을 금새 잃고난 꽃은 땅을 바라보며 고개가 꺾인다. 그리고 점차 부스럭대며 메말라간다. 결국에는 건조한 바람과 함께 흙과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사람이 태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죽었을 당시 모습 그대로 새롭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다.
처음에는 나도 이런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마치 동화 속 이야기 같았다. 죽기 전 세상에서 상상했던 사후 세계와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죽고나면 어떻게 될 지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지만 대략적인 이야기는 있지 않은가. 천국과 지옥같은 얘기. 선한 사람은 천국을 가고 악한 사람은 지옥을 가는 권선징악과 종교적 성격의 이야기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뭐 반은 맞는 말이다. 천국은 없지만 이 지옥은 존재했으니까.
어째서 사후세계가 지옥밖에 없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죽은 사람들이 모두 이 지옥에서 꽃 한 송이로 태어났다는 역사학자들의 말을 빗대자면은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나 또한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사람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 때도 평소처럼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기위해 황야를 거닐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발견했다. 모난 자갈들과 검은 흙더미 속에서 빼꼼히 내민 조그마한 새싹을.
갓 태어난 아기마냥 푸르게 빛나고 있는 모습에 문득 호기심이 생겨 가까이 다가갔다. 새싹은 굉장히 빠른 시간에 서서히 성장해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꽃 한 송이로 피어났다. 그 경이로운 순간을 경험하게 되서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마치 메마른 이 대지에 숨을 불어 넣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금새 시들어버리고는 바람과 함께 으스러져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낯선 사람이 태어났다.
*
"야 스트레스를 이렇게 풀어야지. 그렇게 밖에 걸어다닌다고 해결이 되냐."
강 사원이 억지로 나를 이끌고 테이블에 앉혔다. 최근 들어 유난히도 사색에 잠긴 내 모습을 눈치챘는지 기분전환 해주겠다며 정장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어, 야 그거."
"아까 결재받으러 갔을 때 슬쩍했지~"
은색 빛의 손바닥만한 캔. 맥주였다.
"야 이거 걸리면 큰일나잖아!"
"뭐 어때. 그냥 몰래 마시는거지. 안 마실거야? 그럼 나 먼저 마신다?"
말을 마친 강 사원은 리드미컬한 움직임으로 캔을 들었다.
"키아~ 그래 이거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지으며 맥주캔을 쥔 강 사원의 모습을 보자니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회사 내에서 음주는 금기사항, 더욱이나 이 맥주는 부장님 사무실에 있는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 분명했다. 부장님은 점심식사 후에는 항상 후식으로 맥주를 마시고는 했다.
"으음..."
어쩔 줄 몰라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강 사원은 몸을 비비꼬며 유혹했다.
"역시 근무 중에 먹는 맥주가 최고라니까. 입술을 비벼대는 이 거품~ 목구멍을 놀래키는 이 톡 쏘는~ 아아~"
강 사원이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결국 나는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
.
.
"그러니까 왜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서..."
"낸들 이렇게 될줄 알았나."
어느새 맥주 캔을 비우고서 강 사원과 속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다? 난 내가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어. 근데 이 지랄맞은 업무는 대체가 엉망이라니까!"
"얌마. 그러라고 있는 영업부잖아."
"영업? 그래 말 잘했다. 이게 영업이야? 죽은 사람 가지고 죽었다 살렸다 장난치는게?"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다.
"구원해준다는 그 간사한 말로 죽이고 살리고 하는게 이 회사 일이야?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라고!
이전에 주임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1명도 구원해준 사람이 없었어. 이게 말이 돼? 이런 개같은 업무가 세상에 어디있냐고."
"이거 맥주 좀 먹었다고 벌써 취했네. 조심해. 누가 지나가다 보면 어쩔려고."
"어쩌긴 뭘 어째. 사무실에 박혀서 사람들 죽어가는거 볼 바에 그냥 회사 다 뒤집어버리고 나가버릴란다."
격양한 어조로 말을 마친 나는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강 사원도 급히 일어나 내 옆을 부축해주었다.
"야~ 나 안 취했어. 안 취했다고."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좀 해라. 일단 사무실에 가자. 내가 같이 가줄게."
"아니 안 취했다니까~"
강 사원은 내 팔을 잡고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혹여나 누가 이 거지꼴의 나를 볼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내 몸 겨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쌓이고 쌓인 감정이 격하게 터져나와 잠시 몸에 힘을 잃은 것 뿐이었다.
복도를 지나 사무실로 향하는 길로 몸을 틀다 마주오는 부장님과 부딪혔다.
"괘,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강 사원은 내 팔을 풀고서 고개를 꾸벅 조아렸다. 나도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몸을 숙였다. 부장님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떨어뜨린 서류들을 주었다. 강 사원과 나도 같이 바닥에 널부러진 서류들을 집어들었다.
"아, 아니 괜찮네. 자네들은 갈 길 가봐."
부장님이 말을 더듬으며 당황한 말투로 손사래를 쳤다. 강 사원과 나는 서로 마주 보고서는 일단 집어들었던 서류를 부장님에게 건내주었다.
'인구현황 보고서?'
부장님에게 서류를 건내며 무심코 본 제일 윗 장에는 '인구현황 보고서' 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부장님은 서둘러 나와 강 사원에게 서류를 받고서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뒤에는 검은 그림자들. VIP 고객들이 천천히 따라가고 있었다. 언제봐도 기분 나쁘도록 찝찝한 고객들이었다.
"야, 부장님 왜 저러신대?"
"글쎄다. 나도 모르겠는데."
강 사원은 입맛을 다시고서는 다시 나의 팔을 잡았다.
"아, 야~ 나 괜찮다니까."
"안돼. 너는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아. 너 이런 모습 누가 보면 어쩔려고 그래."
"아니 그러니까 나 이제 괜찮대도."
"잔소리말고 니 사무실이나 빨리 가자. 가서 좀 쉬어라."
한참을 티격태격하고는 결국 포기하고 강 사원의 팔에 내 몸을 맡긴 채 사무실로 들어갔다.
*
악몽을 꾸었다. 티끌 하나 없이 눈부시게 맑은 하늘을 위에 둔 채 잔디밭에 누워 있었다. 밤새 비가 왔는지 촉촉히 젖은 풀잎들이 내 귀를 간지럽혔다. 잔디에 누워 있는 이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상쾌한 공기와 함께 푸근한 땅이 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마에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편안한 이 순간을 깨우는 불청객에 자그맣게 욕을 내뱉고 팔로 이마를 닦아냈다. 선홍빛의 액체가 팔에 가득히 묻어나왔다.
'이, 이게 뭐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가위에라도 눌린 것처럼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점차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하아...하아..."
가파르게 숨을 내쉬고 힘을 주어 고개를 돌렸다. 한 여자가 나처럼 잔디밭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여자가 입고 있던 새하얀 원피스에는 진흙과 풀잎들이 범벅였고 얼굴에는 새빨간 핏물이 또옥 하고 떨어지고 있었다.
"지, 지은아!!!"
나는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오래된 그리움이 묻어나왔다. 나는 여자에게 가까이 가기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기껏해야 팔과 고개만 바둥 거릴뿐 움직일 수 없었다. 다시 안간힘을 쓰면서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지은아!!!"
내 외침이 들렸는지 여자는 부르르 떨며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입에서 얕은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괘, 괜찮은거야?"
물어보면서도 자꾸만 눈이 감겨갔다. 얼굴을 찡그려가며 더욱 눈에 힘을 주고 여자에게 같은 물음을 전했지만 어떤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초점 없는 여자의 눈이 계속해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더욱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연신 여자의 이름을 불러댔다.
어떤 상황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여자를 살려야한다는 정체 모를 소리가 자꾸만 가슴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왠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직감과 함께 살려야 한다는 무거운 강박감이 계속해서 나를 덮쳐왔다.
"제, 제발...! 지은아!!!"
끼익-
머리 너머로 귀를 찢는 듯한 소리를 내며 차가 언덕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 여자도 나도 저 차에 휩쓸려 갈 것만 같았다. 다급해진 마음에 다시 한 번 몸에 힘을 주어 움직이려고 애썼다.
"제발.. 제발!!!"
돌이라도 된 듯 내 몸은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어느새 차가 근처까지 다가왔는지 저 괴이한 소리가 귓 속을 가득 메웠다. 한참을 움직이고 더 이상의 발버둥은 의미없음을 깨닫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대로 끝인가 싶었다. 뭘 어떻게 해도 죽음이란 존재가 내 앞에 다가와 손을 잡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으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개를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야 그렇다쳐도 저 여자는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차 바퀴에 튀어오른 진흙들이 성이라도 난 듯 나의 얼굴을 때려댔다. 갈 곳 잃은 풀잎들이 내 볼을 스쳐 지나갔다. 커져가는 괴음과 함께 누워있던 나의 머리를 급하게 잡아당기는 바퀴의 움직임이 느껴지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옆에서 조그맣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됐어... 그만해.“
*
최근 들어 계속되는 악몽에 잠을 설쳤다. 연신 계속되는 업무 스트레스 탓에 몸이 허해진 것 같았다.
기분전환할겸 회사 밖으로 나왔다. 끝 없는, 아니 아무 것도 없는 황야를 거닐면서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바라는 결과를 얻지도 못하는 공허한 이 일을 계속해서 해야만 하는걸까.
시원치 못한 잡념에 빠지자 가슴 한 구석이 답답했다. 누군가와 툭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붐벼대며 움직이는 노예들과 그 사이에서 감시를 하고 있는 악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빠르게 눈을 돌리며 사람을 찾고 있었다. 우연찮게 악마 하나가 내 쪽을 바라보며 여전히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사람을 찾아 빨리 이 갈증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먼지로 뿌얘진 안경을 얼굴에 걸친 채 걸어가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나는 황급히 언덕에서 내려와 그를 향해 다가갔다.
"주, 주임님!"
"아니 이게 누구야?"
남자가 놀라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자네가 여기까지 어쩐 일로..."
주임님은 반가운 얼굴을 황급히 감추었다. 아마도 거지같은 몰골의 모습을 보이는게 창피했을 것이다. 불과 몇 개월 전만해도 내 업무의 상급자였으니까.
"그냥 요즘 좀 답답해서 대화 좀 할까하고 왔습니다."
"허허. 이런 누추한 나에게 무슨 대화거리가 있다고."
털털한 웃음소리는 여전했다. 나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근처에 있는 악마에게 다가갔다.
"저쪽에 계신 분과 잠시 얘기할게 있으니 잠시만 시간 좀 내주십시오."
악마는 내 얼굴과 주임님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반년만이지요?"
"벌써 그렇게도 되었나."
"그렇죠. 살았을 적 세상이나 이 세상이나 시간 빠른건 똑같더군요."
"허허- 재미없는 농담은 여전하구만."
주임님이 인자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노예생활 속에서도 그 눈빛만은 잊지 않으신 것 같았다.
"사실...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업무... 때문에 그런가?"
주임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무심하게 말을 걸었다.
"네... 맞습니다."
"그 왜 있지 않은가. 내가 남겨준 메모. 그냥 그대로만 하면 돼."
"그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친절? 밝은미소? 주임님도 업무하시면서..."
"됐네. 그냥 그대로만 하게."
주임님이 나의 말을 잘랐다.
"주임님. 들어보십시오. 주임님은 안 그러셨습니까? 매 번 죽어가는, 아니 죽음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아무 생각도 안드셨나요?"
"그게 업무야."
"아니요.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업무요? 영업이요? 그냥 그렇게 살지도 못할 죽음을 계속 당하게 하는게 업무라구요?"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내가 말해주지 않았나. 쓸데없는 감정을 가지고 보지 말라고."
"그게 말이 됩니까?"
말소리가 높아지자 악마가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주임님. 주임님도 같은 일을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볼 때 마다 아무 생각도 안 하셨나요?"
"그만하게."
"아뇨.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주임님 때는 구원에 성공한 사람이 1명이라도 있었나요?"
"......"
주임님이 고개를 돌렸다.
"없으셨죠?"
"난 이미 회사를 나온 몸이야. 더 이상 업무 얘기는 하지말게."
"주임님은 단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으셨습니까? 살려주겠다고 1분을 주면서 성공한 사람이 있었냔 말입니다.
모두 지옥의 노예로 살아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회사의 업무고 영업부가 할 일인거야."
"업무요? 그리고 영업이요? 그냥 놔뒀으면 조용히 지옥 어딘가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노예로 데려오게 하는게요?"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참 대단한 일입니다? 차라리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지옥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지 않았겠습니까! 살려주려고 몇 번이고 죽음을 반복한 그들은 대체 뭐가 됩니까. 노예로 살게 만드는게 이 영업부가 하는 일이냔 말입니다!"
"무슨 말 하려는건지는 알겠네."
"그들과 같이 죽은 사람들은 지옥 어딘가에서 애타게 그들을 찾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기나 하셨습니까?"
"어차피 그들은 지옥에 없네."
주임님의 말에 말문이 멈췄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만 얘기하세."
주임님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명해 주십시오. 방금 그 말 무슨 말입니까?"
"악마가 나를 째려보는게 느껴지는구만. 어서 일하러 가야겠네."
"대답해주십시오! 이 곳에 없다니요?"
"내가 전해준 메모지 대로 그냥 열심히 업무나 하게. 나처럼 노예가 되기 싫으면."
주임님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하고는 뒤돌아섰다. 나는 곧바로 뒤따라가서 주임님의 어깨를 잡았다.
"말씀해주시란 말입니다! 뭔가 알고 계신거죠? 그렇죠?"
주임님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걸음을 뗐다.
"회사에서 그만뒀다는 그런 시시한 이유로 다시 노예가 되신게 아니죠? 뭔가 있으신 거죠?"
"가보겠네."
점점 멀어지는 주임님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순간 강 사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말.
뭔지 모를 분노가 가슴 속에 차올랐다. 그리고 주임님을 향해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이대로 회사에 가서 다 파헤치겠습니다!"
나의 외침에 주임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렸다.
"그, 그만하게!"
"지금 당장 이 거지같은 회사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는건지 다 찾아볼겁니다."
"그냥 그대로 조용히 업무나 하게! 나처럼 노예가 되고 싶은건가?"
주임님의 말을 등 뒤로 흘린 채 나는 회사를 향해 뛰어갔다. 등 너머로 주임님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채찍소리만이 황야에서 메아리쳤다.
*
서둘러 회사로 들어와 강 사원을 찾아갔다.
"깜짝아. 네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강 사원의 팔을 다짜고짜 부여잡았다. 그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로비 테이블에 강 사원을 앉히고서는 나도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말을 꺼냈다.
"저번에 한 얘기 다시 얘기해봐."
"무슨 얘기?"
"다른 세상도 존재한다는 얘기."
"아아. 너 근데 그때..."
"됐으니까 다시 얘기해보라고!"
평소와 다른 모습에 강 사원이 놀란 듯 했다.
"음. 그럼 나 커피나 하나 좀 사주라."
.
.
.
.
"하아. 언제 마셔도 찜찜한 맛이야."
강 사원이 능청스레 말했다.
"자, 빨리 말해봐."
"갑자기 왜 그거에 대해 궁금해 한대. 저번에는 그냥 가버리더니."
"확인할게 있어. 저번 일은 미안하니까 좀 얘기해줘."
강 사원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내가 그 때 부장님이랑 그 검은 그림자들이랑 얘기하는걸 들었거든. 대화하는 중간에 몰래 엿들은거라 앞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부장님이 말했거든. 요즘 우리 회사 매출이 좋다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고. 그니까 검은 그림자중 하나가 말했어. 아, 근데 걔네는 다 입이 없으니까 정확히 누가 말한건지는 모르겠는..."
"그런 얘기는 좀 빼고 말해봐."
"아무튼 말을 했어. 자기네 세상에는 더 이상 흥미가 없다고. 이 쪽 세상에 오는게 재미있다고."
"자기네 세상?"
"어. 그리고는 이 세상이랑 자기네 세상이랑 인구가 얼마나 되고 분위기는 어떻고 뭐 그런 이야기 한 거 같았어."
강 사원의 말이 끝나자 나는 조용히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자기네 세상' 이라고 했다.
"근데 확인해 볼 것이란게 뭐야."
강 사원의 물음에 천천히 그를 쳐다보았다.
"너... 너 죽기 전에 만났던 사람들. 지옥에 와서 만나본 적 있어?"
"죽기 전에 사람들? 뭐 가족들이나 친구들?"
"응."
"야. 이 넓은 데에서 어떻게 다 만나냐. 뭐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
"언제는 나보고 이상한 소리 그만하라더니만. 너 나 몰래 또 맥주 마셨냐?"
강 사원이 꼬투리를 잡은 아줌마 마냥 내게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야."
"왜에? 또 숨겨놓은 맥주라도 있어?"
"잠깐 나 좀 도와주라."
"무슨 일인데?"
나는 대답 대신 강 사원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아, 무슨 일인데!"
"부장님 방으로 가자."
"부장님 방? 갑자기 왜?"
"나 잠깐 확인해볼게 있어."
강 사원이 가던 길을 멈췄다.
"야 너 설마 몰래 들어가려는거야?"
"응. 잠깐 망 좀 봐주라."
"미쳤어? 그러다가 부장님 만나면 어쩔려고."
"진짜 잠깐이면 돼. 잠깐만."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금방 뭐 좀 확인하고 나올게."
계속해서 병아리처럼 조잘대는 강 사원을 억지로 끌었다. 마침내 부장님 사무실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강 사원의 팔을 놓아주었다.
"하, 진짜. 설명도 안해주고."
"미안하다. 금방 얘기해줄게. 나도 뭔가 석연치 않아서 그래."
"부장님은?"
나는 사무실 문에 대고 가볍게 노크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기까지 20분 정도 남아있었다.
"나 안으로 들어간다? 잠깐만 밖에 좀 봐줘."
"야야 잠깐만!"
강 사원이 손을 뻗었지만 무시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허례허식으로 가득찬 조형물들 사이사이로 주인을 잘못 만난 난초들이 비좁게 서 있었다. 왼쪽으로는 각종 체육대회 수상 트로피가 진열대에 놓여 있었고 오른쪽 편에는 서류들이 꽂힌 책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그마한 냉장고가 놓여 있었다. 저 안에는 아마도 맥주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서둘러 부장님 책상 앞으로 갔다. 그리고 컴퓨터를 확인했다.
-하늘이 감동할 정도로 노력하라.
재수없는 글귀가 모니터 화면에 띄워 있었다. 작게 욕설을 내뱉고 마우스를 잡고 움직였다. 화면보호기가 꺼지고 윈도우 화면이 나타났다. 부장님이 제발 로그아웃 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회사 시스템을 실행했다.
'다행이다!'
실행과 동시에 ID와 PASSWORD가 입력된 창이 뜨더니 수 초 후에 자동으로 로그인 되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덧 5분이 지났다. 서둘러 고객관리 메뉴를 클릭했다. 그리고 VIP고객을 클릭하고 스크롤을 내리면서 천천히 훑었다. 그러다 검은그림자들 정보에서 스크롤을 멈춰세우고 그들의 정보를 열람했다.
"세상에..."
일반적인 고객정보에는 출신지를 비롯해 나이, 직업 등이 기록 되어 있다. 태어난 나라 혹은 지역이 곧 출신지이며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기록 되는 것이 나이이고, 현재 다니고 있는 일이 직업이며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살아 생전 다녔던 회사의 고객정보와 전혀 다를게 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조금 차이점이 있다면 출신지는 당연히 이 세상인 지옥이고, 나이는 지옥에서 꽃을 피우고 시들고 난 후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잡는다. 그 외에는 동등하다. 때문에 출신지 항목은 보통 생략을 하거나 지옥으로 자동으로 입력하게 되어있다.
'왜...?'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의 고객정보에서는 '지옥' 이라는 단어 대신에 '천국' 이라고 적혀 있었다.
*
사무실을 나오자 강 사원이 말을 걸었다.
"아 쫌 빨리 나오지."
강 사원이 보채면서 말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니터에서 본 단어가 자꾸만 머리 속에 아른거렸다.
"대답도 안 하네 이제? 누가 올까봐 겁나 긴장타면서 있었구만."
나는 말 없이 강 사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돌아섰다. 강 사원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복도를 따라왔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건내고 혼자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다. 사후세계가 이 곳 하나 뿐이라는게 명백한 사실이었는데 어째서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살아 생전에나 사후세계를 알 길 없으니 천국과 지옥이라는 추상적 개념만이 지배적이었다. 허나 방금 모니터에서 본 것은 명확히도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죽어서 지옥에 태어나는게 당연한 일인데 다른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은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걸까.
뒷통수를 강하게 맞은 것 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순간 몇 일 전 여자가 소리치던 말이 생각났다.
- 우리 애는 어디있냐고! 같이 죽은거면 내 옆에 있어야 될 거 아니야!!!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
오늘도 변함없이 악몽을 꾸었다. 이슬 머금은 잔디밭에 여자와 누워 있었고, 언덕 위에서 매몰차게 내려오는 차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에는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감았고 차에 휩쓸려 나가는 찰나의 순간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됐어... 그만해."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밤새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베개 밑이 축축했다. 매 번 반복되는 악몽에 지긋지긋해졌다. 최근들어 악몽의 빈도가 더 잦아졌다. 이제는 잊어야할 사람이 자꾸만 꿈 속에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악몽이 끝나고 나면 서서히 내 어깨에 죄책감이라는 응어리가 올라왔다. 그리고 나를 있는 힘껏 옥죄었다. 씻을 수 없는 상처였음을 더욱 잘 알기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러한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하는 조그마한 기대감은 덧 없을 뿐이었다.
뜨거운 물에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회사로 나섰다. 아직 해야할 일이 남아 있었다.
*
"그러니까 내일 그 VIP 고객들이 온다는게 확실하지?"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나. 내가 마케팅팀 애한테 물어봤어."
강 사원에게 검은그림자들이 언제 또 방문하는지 물었었다. 외골수 성격의 나와는 달리 사교성이 좋은 그는 다른 부서 사람들과 두루두루 알고 지냈다. 덕분에 내일 검은그림자들이 회사에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근데 너 요즘 이상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저번에 부장님 사무실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미안하다. 아직은 말하기가 좀 그래."
"아니 뭐 도움이 필요하면 말이라도 하든가. 그래야 내가 도와주든 말든 할거 아니야."
"정말 미안하다. 나중에 다 얘기해줄게."
강 사원이 머뭇거리는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그 VIP 고객들이랑 뭔가 관련된거야? 그 시커먼 것들?"
"뭐, 그렇기는 한데..."
강 사원이 급히 주변을 두리번 거리더니 몸을 낮추었다.
"야. 너 몸조심해라. 뭔가 이상한 일을 꾸미나 본데 진짜 큰일난다."
"야, 아니야. 그냥 뭐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해서 그런거니까."
"너. 예전에 주임님 왜 짤렸는지 모르지?"
주임님이라는 말이 강 사원의 입 밖에서 나오자 고개를 화들짝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몰랐나보네. 하긴. 자기 부사수한테 그런 이야기하기는 그렇겠지. 아는 사람도 몇 없을테고."
"자세히 좀 얘기해 봐."
"진짜 모르는구나?"
"그냥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나가신거 아니였어?"
"야! 생각을 해봐라. 너 같으면 이 회사 다니면서 편하게 지내겠냐. 아니면 저 노예들처럼 평생 고생하면서 살겠냐."
나 역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찜찜했다. 특히 저번에 주임님을 만난 이후로도 계속 마음이 석연찮았다.
"말해줘?"
"짤린게 맞는거야?"
"당연하지. 그렇게 회사에 헌신하면서 다녔던 분이신데. 제 발로 나갈 리가 있겠어?"
강 사원은 말을 꺼내면서도 곁눈질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주의했다.
"사실 주임님도 너처럼 VIP고객들 캐내고 다녔다더라."
"주임님이??"
뜻 밖의 얘기에 더욱 몸을 강 사원에게 가까이 댔다.
"응. 나도 이거 저번에 인사과장한테 들은건데. 아는 사람 별로 없다니까 너도 조용히 하고."
강 사원이 손가락을 입에 댄 채 쉿- 하고 작게 소리내었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짤린 거라고?"
"그래 임마! 걔네들이 뭐하는 애들인지는 몰라도 회사 직원 하나 그냥 아작내는 사람들인거라고. 그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말고 조용히 회사나 다녀. "
"주임님이..."
어째서 주임님이 내게 건내준 메모지대로 조용히 업무나 하라고 일렀는지 알 것 같았다. 주임님 또한 나처럼 그들을 캐내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어떠한 정보를 얻었고 어떤 목적으로 그리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마음에 짚이는게 있기는 했다. 이런 지랄맞은 업무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어째서 그 아무도 구원에 성공하지 못하는걸까. 어째서 그들은 지옥의 노예로 사라지는 걸까. 대체 그 누가 이들에게 1분이라는 시간을, 신이라도 감히 허락치 못할 전지전능한 기회를 부여해주는 걸까.
다시금 주임님과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본 그대로 주임님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검은그림자들 고객정보에 선명하게 적힌 '천국' 이라는 글자를 주임님 또한 알고 계셨냐고.
서둘러 일어나는 나를 강 사원이 붙잡았다.
"이거 봐라. 또 말도 없이 어디로 사라질려고 그러네."
"정말, 진짜 미안하다. 내가 꼭 다 얘기해 줄테니까 좀만 기다려봐."
"너 진짜 조심히 다녀라. 그 시커먼 것들은 나도 맘에 안 들지만..."
강 사원의 말에 오랜만에 싱긋 웃어보였다. 갑작스러운 웃음에 강 사원은 토하는 시늉을 했다.
"아무튼 이래저래 알려줘서 고맙다."
강 사원의 손인사를 뒤로 하고 나는 황급히 회사 밖으로 나왔다.
*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주임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노예들의 신음소리와 악마들의 채찍소리가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지만 당최 주임님은 보이지 않았다. 언덕에서 노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결국에는 내려와서 그 무리로 들어갔다.
뜨거운 공기와 쉰 땀내음을 헤치고 돌아다녀봐도 주임님을 찾을 수 없었다. 인근에 저번에 말을 걸었었던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죄송하지만 몇 일 전에 저랑 얘기 나누었던 노예, 아니 그 분이 어디 계신지 좀 알 수 있을까요?"
나의 물음에 악마는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 굉장한 콧김을 뿜어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왠지 모르게 약이 올라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저번에 저랑 있었던 안경 쓰신 분 어디 계시냐구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나."
퉁명스럽게 대답한 악마는 내게 고개를 돌려 노예들을 쳐다보았다.
칙-
우리들 앞을 지나가던 노예에게 힘껏 채찍을 휘두른 악마는 다시 내게 웃음을 보였다. 역겨움이 몰려왔다. 더 이상 알아낼게 없다는 생각에 그 자리를 뜨고 다시 언덕으로 올라왔다. 다시 천천히 길을 걸으며 노예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지만 결국 주임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같은 시간, 자욱한 안개처럼 검은 형체의 무리가 둘러 앉아 있었다.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모를 공허한 목소리가 그들 중 하나에게서 뻗어나왔다.
"재밌군요."
"그렇죠?"
무리 중 다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검디 검은 몸체를 울렁거리며 소리를 내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내뱉을 것 같았다. 서로가 겹겹히 붙어있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구름을 보는 것만 같았다.
2마디의 짧은 대화가 끝나고서는 더 이상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모두 앞에 놓인 영상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검은 존재들 중 하나는 영상을 보며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지르기도 했고, 어떤 이는 수증기가 일으듯이 몸을 비비꼬는 행세가 경련을 일으키는 듯 했다. 그렇게 저마다의 반응을 보이며 앞에 놓인 유희에 시간을 보냈다.
영상에는 아이를 꼭 껴앉고 있는 여자가 도로 한가운데서 화물차에 치이는 끔찍한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
한가로이 로비에 앉아 쓰디 쓴 커피를 들이켰다. 초조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조그마한 각성제라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바삐 오가는 회사 사람들을 주시하다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오후에는 늘 그렇 듯 영업을 위해 사무실에 들어가야만 했지만 오늘은 계획을 틀어야 했다. 검은 그림자들. VIP 고객이 곧 방문할 예정이었다.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을거야?"
마침 지나가던 강 사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얼굴을 보니 내 걱정을 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응. 일단은."
"하... 걔네들 오면 뭐 어떻게 할려고 그러는거야?"
"나도 잘은 모르겠어."
사실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아니, 계획할 껀덕지가 없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막상 그들을 만난다고 해서 그들에게 직접 추궁할 수는 없었다. 출신지가 '지옥' 이 아닌 '천국' 이라는 사실을 내 입으로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그런 정보 하나만을 가지고 구원에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의구심을 어떻게 풀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맞지 않는 퍼즐조각이라도 들고서 짜맞추기 위해 무언가 행동해야 했다.
영업을 하면서 느꼈던 그 불합리하고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순간들에 대한 답안이 내게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 알았다."
강 사원이 말을 끝내고서는 복도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천천히 지켜보고 나니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그들의 방문일정에 맞춰 기다리고 있자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걸까.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
.
.
"네네. 이쪽으로 오시죠."
부장님의 말소리가 또렷하게 로비 한 쪽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황급히 테이블 뒤로 숨어 소리가 나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부장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검은 그림자들이 부장님의 손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부장님과 검은 그림자들이 로비 한쪽으로 사라지자, 서둘러 테이블에서 나와 그들을 쫓았다. 행여나 들킬세라 발걸음을 조심히 옮겼다. 형체도 얼굴도 없는 그들을 따라가자니 왠지 모를 두려움이 살짝 적셔왔다. 앞을 보고 걸으면서도 뒤통수에 숨겨 놓은 눈이 뒤따라오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이 소회의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벽 모서리에서 나와 소회의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에 얼굴을 대고 귀를 기울였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허허. 아닙니다. 얼른 시작하시죠.
-오늘도 바쁘겠어요.
소회의실 내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복도에서 누가 걸어오고 있지 않을까 고개를 돌려 양옆을 확인하면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번 달 매출이 꽤 좋네요. 계속 상승세인 점이 마음에 들어요.
-아, 예. 감사합니다. 회사 전직원 모두 열심히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힘써주시니 저희도 저쪽 세상보다는 이쪽에 더 신경쓸게 많아요.
-과찬이십니다.
또 다시 '저쪽 세상' 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일단 인구현황좀 볼까요.
-네. 그럼 이쪽을.
이후로 부장님이 소회의실 안 쪽 단상으로 가셨는지 말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조급해진 마음을 차분히 누르면서 더욱 더 귀에 집중했다.
-흥미롭군요. 그렇죠?
-마음에 듭니다. 이 정도 추세라면 걱정 없어도 되겠어요.
-악마분들이 좋아하시겠어요. 호호.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성장세를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실 악마분들이 인력이 없다고 하도 난리를 치니.
-뭐 저희 입장에서도 좋은 거래긴 하죠. 잉여인력을 가지고 있어봤자 득이 되는 건 없으니.
-생각한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부장님의 이야기가 끝난 것 같았다.
-그나저나 또 보고싶은데...
-그렇죠? 저도 막 갈증이 날 참이었어요.
-부장님. 이번에도 준비 좀 부탁드릴게요.
-준비라면... 어떤...?
-요번에 있었던 일이었죠?
-아, 맞아요. 그럴거에요. 8일 전이에요.
-8일전이라면... 어떤 분들...?
-그, 여자와 어린 아이였었는데...
검은그림자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조용히 그들의 대화가 다시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부장님의 말 소리가 들렸다.
-아, 예. 찾았습니다. 교통사고. 맞습니까?
-예, 예. 맞아요! 그거에요.
-빨리 준비해 주시겠어요?
-네,네. 알겠습니다.
-주스 있어요? 이왕이면 오렌지 주스가 좋겠는데.
-저는 시원한 물로 좀 부탁드릴게요.
한동안 어수선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 조용해졌다. 나는 천천히 문에서 몸을 뗐다. 이대로 업무 이야기는 끝난 것 같았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오고갈 줄 알았지만 얻은 게 없었다. 그나마 '저쪽 세상' 이라는 말을 비추어볼 때 분명 '지옥' 이 아닌 '천국' 이라는 세상이 존재함은 분명했다.
왠지 모를 아쉬움이 살짝 묻어나왔다. 호기심을 채워줄만한 무언가를 얻어내지 못함에서 온 비참함이었다. 아무 계획 없이 이 곳에 온 내가 너무도 생각이 짧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서히 소회의실에서 몸을 돌려 가려는 찰나에 안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그래요. 이거라니까.
-정말 언제봐도 대단한 영상이에요.
검은그림자들의 웅성거림에 나는 다시 몸을 기울였다. 큰 폭발음과 함께 귀를 찢을 정도의 괴음이 계속해서 새어나왔다. 그리고 어떤 여자의 신음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나왔다.
낯익은 신음소리였다. 기억 너머 어딘가에 들어봤던 목소리였다. 묘한 기분이 들자 두근거림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다시 돌려주시겠어요?
-네,네.
잠시간의 정적이 지나고 차가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큰 폭발음과 함께 여자의 신음소리가 문 너머로 흘러나왔다.
-정말, 정말. 못 참겠어요!
-하하하.
신음소리와 웃음소리가 오묘하게 섞여 내 귀를 괴롭혔다. 왠지 모를 분노심이 솟구쳤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숨소리도 차차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얼얼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여자의 신음소리가 ,몇 일 전 구원의 기회를 위해 아이를 안고 화물차에 몇 번이고 치였던 여자임을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분노 섞인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쾅!!!
일제히 모두가 내게 몸을 돌렸다.
출처 | 못 맺은 예전 글. 이리저리 바빠서 제대로 글을 못 올렸는데 이제 좀 안정되서 새로운 마음으로 예전 오유 탈퇴하고 새 계정으로 글을 쓰려고합니다. 이 글 잘 마치고 꾸준히 글 올릴게요. 예전에 미완의 글을 읽어 주신 분들 죄송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