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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화물자동차
작은 등불을 달고 굴러가는 자동차의 작은 등불을 믿는
충실한 행복을 배우고 싶다
만약에 내가 길거리에 쓰러진 깨어진 자동차라면
나는 나의 노트에 장래라는 페이지를 벌써 지워버렸을 텐데
대체 자정이 넘었는데
이 미운 시를 쓰노라고 베개 가슴을 고인 동물은
하느님의 눈동자에 어떻게 가엾은 모양으로 비칠까
화물자동차보다 이쁘지 못한 사족수(四足獸)
차라리 화물 자동차라면
꿈들의 파편을 거둬 심고
저 먼 항구로 밤을 피하여 가기나 할 터인데
고정희, 서시
제 삶의 무게 지고 산을 오른다
더는 오를 수 없는 봉우리에 주저앉아
철철 샘솟는 땀을 씻으며, 거기
내 삶의 무게 받아
능선에 푸르게 걸어주네, 산
이승이 서러움 지고 산을 오르다
열두 봉이 솟아 있는 서러움에 기대어
제 키만한 서러움 벗으면, 거기
내 서러움 짐 받아
열두 계곡 맑은 물로 흩어주네, 산산
쓸쓸한 나날들 지고 산에 오르다
산꽃 들꽃 어지러운 능선과 마주쳐
네 생애만한 쓸쓸함 묻으면, 거기
내 쓸쓸한 짐 받아
부드럽고 융융한 품 만들어주네, 산산산
저 역사의 물레에 혁명의 길을 잣듯
사람은 손잡아 서로 사랑의 길을 잣는 것일까
다시 넘어가야 할 산길에 서서
뼈 속까지 사무치는 그대 생각에 울면, 거기
내 사랑의 눈물 받아
백무산, 숲
비 개인 숲이 옷을 벗는다
터진 구름 사이
바람 몇 점 푸르게 일더니
새들이 울기 시작한다
새들 소리에 후두둑 후둑 떨구더니
초록의 물결이
철철철 넘쳐난다
숲이 쏟아놓고 숲이 잠긴다
여기 와서 침묵하니
내 침묵에 내가 잠긴다
숲이 숲같지 않구나
내 몸 밖의 것 같지 않구나
터진 구름 사이 푸른 하늘도
내 마음 밖의 것 같지 않구나
고찬규, 섬
섬을 섬이게 하는 바다와
바다를 바다이게 하는 섬은
서로를 서로이게 하는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고
천 년을 천 년이라 생각지도 않고
권혁소, 어떤 패착
나이 먹으면 그만큼
시를 잘 쓰게 될 줄 알았다
그렇게 믿고 기다린 것
패착이었다
사랑에는 여유가 생기고
이별에는 무심할 줄 알았다
역시 패착이었다
옛 애인들의 이름도 까먹는
가능성을 소실하는 세월에 이르러
불멸의 사랑을 꿈꾸다니
시를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노동만이 눈부신 겨울이 지고
가소로운 망상 위에 눈이 덮인다
한 사나흘 죽었다 깨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