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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학살사건에 관련된 증언과 자료들
게시물ID : panic_921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6
조회수 : 185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1/14 20:04:20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한국 정부가 한 일이 바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었죠.


보도연맹은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이 가입한 조직이라고 했지만, 사실 가입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좌익은 아니고 각 지역마다 미리 할당된 수를 채우려 아무나 마구잡이로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시켰던 문제가 많은 조직이었죠.


게다가 한국 정부는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한테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코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라고 약속을 했다가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그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어기고는 군대와 경찰과 청년단체 등을 동원해서 마구잡이로 학살했죠.


이 끔찍한 학살 사건에 관한 증언과 자료들을 예전에 다른 사이트에 올린 적이 있어서, 한 번 이곳에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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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사변 당시 당지에서도 무고한 양민들이 54명이나 학살당한 사실이 새로이 드러났다. 지난 25일 그 당시의 생환자인 오모(당시 대한청년단 단장) 씨는 동 진상을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당시 읍내 남선(南鮮) 곡산회사에 주둔한 육군 부대(대장 김삼환 상사)에서는 보련(보도연맹: 주) 관계자 및 회색분자라 하면서 양민들을 대량 검거하여 동 회사의 창고와 전 상은(商銀) 창고에 가두었다가 이들을 매일 몇 사람씩 트럭에 싣고 김해군 생림면 나박고개에서 총살시켰다 하며, 당시 생환자 7명은 거의가 현재 불구의 몸이 되었다 한다.

- <국제신보> 1960년 5월 28일자 기사

 


 

부산 지검에서는 6.25 때 울산군에서 770명의 양민이 학살된 사건에 대하여 본격적인 수사를 전개했다. 이에 따라 27일 하오에는 그 당시 울산경찰서 운전수였던 김해진 씨와 이정희, 조광희 씨 등을 증인으로 환문하였다.


이들 증인과 3천 명에 달하는 유가족들에 의해 밝혀진 울산 양민학살사건은 다음과 같다. 6.25 때 서장이었던 조정호 씨, 사찰계장 조경래 씨, 형사반장 백인규 씨, 사찰형사 임병문 씨 등과 모 CIC 대원, 모 청년방위대원들은 83년(1950년) 7월 중순부터 9월 중순경까지 7, 8회에 걸쳐 청량면 율반, 정곡 및 온양면 대설리 산골짝, 웅촌면 대복리 산골짝 등에서 옥리 박성용 씨 외 869명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당시 시체운반자인 이정희, 김해진 양씨와 목격자인 심작지, 차천덕 양씨 그리고 학살자 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울주군 두동면 니전리 이청도 씨 등의 증언으로 사건 전모가 밝혀진 것이다.

- <부산일보> 1960년 9월 28일자 기사

 


 

양산군 동면, 원동면, 물금면, 웅상면, 북면, 양산면, 하북면 7개 면에도 83년(1950년) 8월 24일 주민 700여 명이 공비토벌을 하기 위하여 주둔했던 육군 제23연대와 김종원이 지휘하는 부대와 현지 경찰 등에 의하여 빨갱이로 몰려 총살되었음이 밝혀졌다.


학살된 주민들은 북면 사배고개 뒤와 양산면 도산 뒷산계곡에서 총살된 것인데, 피살자는 주로 20대 청년들과 50세 미만의 남녀가 많았다 한다. 유가족들은 아직 유골을 가려내지 못하고 두 곳에 집단으로 묻어 놓고 있는데, 그 당시 억울한 사정을 알고도 독재정권 하에서는 입도 벌리지 못해 왔다는 것이다.

- <부산일보> 1960년 5월 21일자 기사

 

 


27일 하오 2시부터 양산군청 회의실에서 관민합동 주최로 열릴 예정이던 6.25 때 학살된 700여 명의 양민유족회 공청회는 주최측의 주선이 없어 100여 명의 유가족만으로 모임을 가졌다.


이날 공청회는 ① 양민을 조작 빨갱이로 몬 책임자를 의법 처단할 것, ② 아직 생사를 모르고 있는 유족들에게 결과를 알려줄 것, ③ 총살했다면 일자와 죄목을 밝힐 것, ④ 유해를 유족에게 인도할 것, ⑤ 유가족에 대한 대책을 정부에서 세울 것 등 5개 항목의 결의사항을 채택하고, 하오 4시 질서정연하게 해산했다. 억울하게 학살된 사정을 합법적으로 호소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공청회는 유가족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열기로 결의되어 첫 번째로 열리게 된 것인데 경찰서장 군수 면의원(1명), 교육계(1명) 등 7개 기관 대표가 참석키로 되어 있었으나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벙어리 노릇을 해왔던 억울한 사정을 폭로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물금면 범어리를 비롯 원동면, 동면 석산리 부락 양산면 등지에서 약 100여 명의 각 부락 유가족 대표들이 군청회의실을 찾아왔다. 유가족들은 대부분이 부녀자들이었으며 아들을 잃었다는 물금면 유산리 거주 오윤술 씨는 10년 전의 공포를 깨끗이 잊고 분노에 찬 얼굴로 청사 내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개회시간이 지나도 열리지 않아 유가족들만으로써 원동면 하봉준 씨 사회로 진행되었는데 이날 유가족들에 의하면 양산군에서 학살된 700여 명은 1950년 7월 2일부터 2주일 간에 걸쳐 감행된 것이라 한다. 더욱 당시 사살현장에서는 울산 출신 형사들이 돌려보내준다고 속여 유가족들로부터 수백만 원을 편취해간 사실도 있다고 폭로했다.

- <부산일보> 1960년 5월 28일자 기사

 


 

무고한 아버지를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살인범을 처단해달라고 15세 소년이 국회양민학살조사단과 본사에 호소했다.


양산군 동면 외송리에 사는 황원호 군과 우인조 양, 최명수 씨의 뼈저린 호소는 다음과 같다.


한 부락에 사는 의용경찰관 최봉석과 이도◯는 그들의 부친 최만성, 이수증이 평소에 시기해오던 황억조, 우상희, 배인규 씨를 빨갱이라고 투서하고 직접 자기들 손으로 묶어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지난 6월 2일 당시 양산경찰서 동면지서 차석으로 있었던 김의조 씨도 이 사실을 확인했다 한다.


황억조 및 배인규 씨 등 3씨가 부락에서 인심을 사고 있는 것을 시기한 그들은 아들 최봉석이 의용경찰관으로 있는 것을 기화로 투서하여 잡아갔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락민들은 최와 이의 집을 찾아가서 추궁했다.


그들은 당시 사건에 관계된 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학살사실을 인정하는 각서까지 썼는데, 그 가운데는 현재 도경찰국에 근무하는 이수증의 3남인 이원봉 씨도 관련자로 들어있었다.


이렇게 학살의 진상이 밝혀져 이원봉 씨에게 그 사실을 추궁하자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며 피해 달아났던 것을 희생자 황억조 씨의 딸 경희 씨가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이에 황씨가 그녀를 마구 구타하여 전치 2주일의 타박상을 입히고 달아났다고 그들은 호소했다.


한편 이원봉 씨는 학살사건이 있은 3년 뒤 양산경찰서에 근무하게 되자, 우와 황의 처 및 유가족들을 지서에 연행하여 두들겨 패고는 빨갱이를 죽인 것이 무슨 죄냐고 갖은 고문을 다했다고 진정서에서 주장했다.

- <국제신보> 1960년 6월 8일자 기사


 

 

이승만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학살사건이 전국 곳곳에서 폭로되면서 유가족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충무시와 진영읍 그리고 경북 월성군에서는 유가족들에 의해 학살자의 명단을 신고받고 있으며 동시에 위령제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이러한 학살 피해자 가운데는 그 대부분이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것과 한 집안 가운데 빨갱이 혐의자가 있었다 하여 그 가족 전부를 몰살시킨 만행이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공비토벌지구도 아닌 김해군 진영읍에서 양민 300여 명을 학살한 사실이 유족인 마산시 오동동 152 김영욱 씨에 의해 폭로되었다.


6.25 때 부산에서 불과 30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진영읍에서는 소위 유지 몇 사람과 경찰관계자들의 비위에 거슬리거나 세력확장에 지장이 되는 사람들은 반공이란 미명 아래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 죽인 것이다. 진영 양민학살은 지리산 주변에서 공비토벌 군인들의 무차별 학살과 달리 지방방위대와 경찰에 의해 학살된 것이 새로운 사실이다.


김씨는 각 지방의 양민학살 사실이 폭로되자 지난 18일 아버지 김정태 씨의 유골을 찾기 위해 진영에 온 것인데, 22일 유가족들을 대표해서 합동위령제준비위원회를 설치하고 희생자들의 자진신고를 접수하고 있다. 김씨는 사망자 수가 모두 밝혀지는 대로 진정서를 작성, 국회와 계엄사무소 등 관계요로에 제출하고 살인행위에 관계했던 자들을 상대로 법의 심판을 요구할 것이라 말했다.


유가족 김씨에 의해 폭로된 진영 양민학살사건은 83년(1950년) 7월 중순경 진영읍의 읍사무소 2층에 조직된 비상시국대책위원회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한다. 위원장이던 이석흠, 지서주임 김병희, 읍장 김윤섭, 부읍장 강백수, 방위대장 하계백, 강치순 등은 김해군 이북, 진례, 대산, 진영읍에서 남녀 약 500여 명을 읍내 김광진 씨의 창고에 수용했다. 이들 중에서 가산을 팔아서 뇌물을 바치는 사람은 석방하고 남은 사람 300여 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림면 양금리와 창원고개 등 수십 개소에 데리고 가서 총살시켜 버린 것이다.


12명이 손을 묶인 채 죽음의 창원고개로 끌려가다가 왼쪽 다리를 맞고 탈출하여 살아난 진영읍 진영리 김영봉 씨는 아직도 지팡이로 절뚝이고 있는데, 김씨에 의하면 그들은 단 한 마디의 이유도 없이 싣고 가서는 총살하여 묻어버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때 착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한얼중학교 교장 강성갑 씨와 진영리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최갑시 씨도 대산면 수산리에 끌고 가 총살하였으나, 강교장만 죽고 최씨는 총상을 입은 채 낙동강을 헤어나와 1951년 봄 양민학살에 앞장섰던 김병희 지서주임 외 5명을 고소하여 부산지법 군사재판에서 김주임만 사형 나머지 5명은 10년씩 형을 언도받았으나 한 달도 안 되어 석방되고 지금도 학살당한 유가족들의 틈 속에서 활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가족 대표인 김영욱 씨의 아버지 김정태 씨는 강백수가 제자의 강간사실 폭로가 두려워 죽인 것이라고 말했는데 김씨는 3.1 독립만세 때 독립운동 혐의로 3년 6개월간 부산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한 우국지사였다 한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아직도 또다시 독재정권이 반복되어 더 큰 보복행위가 두려워 신고조차 머뭇거리고 있다.

- <부산일보> 1960년 5월 23일자 기사

 


 

아름다운 여교사가 있었다. 그 이름은 김영명, 나이는 27세. 결혼한 지 여섯 달 남짓 된 신부. 누가 이 신부를 죽였나. 1950년 8월 13일 밤 이 사건은 진영 뒷산에서 일어났다. 김영명 씨는 당시 진영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미모라든지 인간됨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루는 지서에서 이 여인을 불렀다. 그때가 7월 말경, 지서주임 김병희 씨는 이 여인을 무려 15일간이나 불러들였다. 김씨의 오빠 김영봉 씨를 찾아내라고 했다. 영봉씨는 7월 21일 당시 진영에 주둔해있던 해군 g-2에 끌려갔다. 빨갱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차례에 걸친 고문을 자행했다. 


이 고문에서 반죽음을 당한 영봉 씨는 26일 밤 다시 찾아온 지서 순경한테 끌려갔다. 지서에 끌려간 영봉 씨는 다른 10여 명의 양민들 속에 섞여 트럭에 실렸다. 그들 학살의 폭군들은 진해에서 조사할 일이 있으니 가자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럭은 움직였다. 두 사람씩 한데 묶어 어느 참혹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들은 입도 떼지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끌려갔다.


덕산 고개에서 어떻게 된 셈인지 트럭이 멈추었다. 운전수는 고장으로 움직일 수 없다고 했는데 이때 대원들은 산에 올라가 쉬자고 묶인 양민들을 끌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묶인 양민들이 풀 위에 앉았다. 얼마 뒤 총탄이 날았다. 묶인 양민들은 기계처럼 쓰러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갈증 속에서 눈을 뜬 영봉 씨는 몸부림을 쳤다. 가슴과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채 산을 내려왔다. 병원으로 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영봉 씨가 살아나자 지서주임 김병희는 영봉 씨의 누이 영명 씨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서주임은 7,8회에 걸친 고문을 이 가냘픈 여인에게 퍼부었다. 팔이 부러졌다. 발가벗기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이 여인을 겁탈하려 했다가 실패에 그치자 김병희 주임은 영명 씨를 죽이도록 명령했다.


의용경찰 강치순과 김태선, 정창현 등이 철사줄로 이 여인을 묶어 진영 뒷산에 올라갔다. 땅을 파헤친 뒤에 일을 저질렀다. 영명 씨가 쓰러지자 강치순은 그의 발목까지 잘라 땅 속에 파묻었다. 누이 영명 씨의 죽음을 말하는 영봉 씨의 눈에 눈물이 괴어 있었다.

- <부산일보> 1960년 5월 25일자 기사

 


 

밀양에서도 200여 명에 달하는 양민을 학살했다고 밀양읍 삼문동 거주 강광목 씨가 1일 하오 본사를 찾아와 폭로했다. 강씨의 말에 의하면 10년 전 8월 13일 새벽 1시경 당시 밀양경찰서에 수감 중이던 184명의 양민을 당시 밀양주재 특무대원이 3대의 트럭에 분승시켜 청도읍 운문산 곰리재 삼밭골에서 학살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트럭에 실려 산으로 가던 도중에 탈주하여 겨우 살아났다는 밀양군 하남면 양동 김한곤 씨의 입을 통해 밝혀졌다. 이 학살은 1차의 것인데, 4차에 걸친 학살이 있었으며 피살자는 모두 6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단 한 사람의 생존자 김씨는 탈주하여 생명을 건진 이래 10여 년을 전전긍긍하다가 이번에 당시의 학살사실을 폭로한 것이라고 한다.

- <국제신보> 1960년 6월 2일자 기사

 


 

삼랑진에서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연이어 폭로되는 양민집단학살사건은 전국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여기 밀양군 삼랑진면 송지리에서도 6.25때 70여 명의 무고한 양민이 빨갱이로 몰려 집단총살 또는 고문치사 등의 무자비한 방법으로 죽어간 사실이 당지 유족들에 의해 폭로되었다.


삼랑진면 유족회 대표 성의술 씨 외 11명은 11일 관계요로에 탄원서를 내어 이 억울한 학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여 범법자를 엄단하고 유족들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유족들이 폭로한 이 끔찍한 학살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6.25 사변이 일어난 지 약 한 달 뒤인 7월 21일부터 당지 양민들은 해군헌병대 육군특무대 등에 끌려가기 시작했다.


7월 말경까지 잡혀간 양민의 수는 70여 명에 달했고, 이들은 일차로 동년 7월 31일경 삼랑진면 검세리 학원에서, 두 번째로는 8월 29일 경 동면 안태리 뒷산 및 미전리 뒷산에서 각각 총살된 것이라 한다.


이밖에도 모진 고문에 못이겨 죽은 자는 낙동강물에 던져서 고기밥이 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족들의 호소에 의하면, 유족들은 학살에 관여한 것으로 인정되는 범인들은 당시 삼랑진 주재 해군헌병대장 강대홍 소령, 해군특무대 1명, 첩보기관인 해양 공사 박용섭, 육군특무대 1명, 전투경찰관, 206대 대장 조경감, 대한청년단 삼랑진단 간부 김광덕 외 5명, 삼랑진 면장 이기호, 지방유지 박토준 외 2명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 <부산일보> 1960년 6월 11일자 기사

 

 


충무, 통영군 양민 남녀 800여 명의 학살은 6.25때 주둔한 헌병대 문관들이 부녀자 약탈의 은폐책으로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수장한 진상이 21일 충무시 항남동 선문당에 설치된 6.25 동란 양민희생자 유가족연락사무소를 찾은 유가족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유가족 탁복수, 조성수, 김주태, 김선이, 이성오 씨 등 8명이 폭로한 양민학살은 괴뢰군이 충무시에 침입한 1950년 8월 16일을 기해 감행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충무시까지 괴뢰군이 침투 공격해오자 계엄사령부 주둔부대, 진해헌병대 통영파견대, CIC, G-2, HID, 민간단체로서 해상방위대, 경찰전투대 등 8개 전투단체 및 수사기관이 주둔했다.


많은 주민들이 검거된 것은 그로부터이다. 앞잡이들에 의해 검거된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때려죽이고 한산도 앞바다 구이포에 싣고 가 머리에 돌을 달아 수장한 것이라 한다. 특히 지방민으로 된 헌병대 앞잡이 해상방위대, G-2 등 보조원들은 헌병보란 완장을 끼고 평소의 개인적 감정을 결부시켜 무수한 양민을 빨갱이로 잡아들였다 한다. 당시 학살관계자인 산양면 삼덕리 이양조, 김기향, 공학수배, 황덕윤, 구종근 씨 등은 유족들에 의하여 명단까지 공개되었다.


여자들은 머리에 멸치종이부대를 씌우고 등에는 이적자란 붉은 글을 써붙여 거리를 끌고 다니다가 이순신 장군의 영현을 모셔놓은 충렬사가 마주보이는 안산에 끌고 가서 죽인 것이다.


8월 14일에는 현 제네바 주재 대사로 있는 김용식 씨의 숙모도 총살당했다. 당시 헌병대 유치장으로 사용되었던 현 해무청 충무출장소 옆 해산회사창고에 끌려간 남녀는 옷을 벗기고 난타하여 매일 밤 20~30명씩 발동선으로 실어다 버렸다는 것이다. 그 위에 수장된 시체가 떠올라 항남동 동충 일대의 해변에는 수없이 떠밀려온 일도 있었다 한다. 양민을 학살하는 데 직접 역할을 한 앞잡이들은 당시 계엄주둔관 박태진 대위와 헌병 파견대장 오덕선 중위에 아첨하기 위하여 착실한 가정부인들을 빨갱이 운운으로 위협하여 강제로 몸을 바치게 했으며, 비상시국대책위원회 간부로 있었던 김모 씨는 억울하게 난행을 당한 부녀자들이 현재 충무시에 살고 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앞잡이들은 수사관에게 허위정보를 제공하는 끌어다가 잔인한 고문을 하고 얼굴이 예쁜 처녀나 여자들은 잘 봐준다고 능욕했다는 것이다. 또한 복천관이란 요정을 경영하던 배정희 씨는 박대위에게 미녀를 공납하고 뇌물을 바치고는 박대위를 손아귀에 넣고 잡혀간 사람들의 구명 브로커를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모형제가 헌병대에 붙들려 간 가족들은 배씨에게 매달려 수없는 돈을 바쳤다는 눈물겨운 사실도 말했다.

- <부산일보> 1960년 5월 24일자 기사

 


 

거제도의 학살사건은 정규 군인도 아닌 북한에서 남하한 일부의 청년으로 조직된 의용공비 토벌대 호림부대와 마산 16연대에서 파견된 부대가 저지른 사건이다.


6.25 동란 전해 지리산 지구를 비롯해서 거제도의 깊은 산골짜기에 약간의 공비 출몰로 양 지구엔 치안이 흐려져 있었다. 당시 그곳 도민들의 말에 의하면 공비들은 극히 미미한 수에 불과하고 그들의 무력도 보잘 것 없는 원시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전기 양 부대의 전과라는 것은 수백 명의 공산 빨치산을 사살하였다고 국방부에 보고되었다고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실은 빨치산 사살의 수는 미미한 것이고 그들의 전과를 올리고 과장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죄없이 사살되었을 뿐이다. 당시 사찰간부도 호림부대라면 벌벌 떨었다는 이 무시무시한 살인부대의 행적은 십여 년이라는 세월 속에 매몰되어 왔다.

- <부산일보> 1960년 5월 29일자 기사


 

 

마산지구 양민학살 유족회에서는 지난 19일자로 전 마산경찰서장 조영운, 전 마산경찰서 사찰형사 구중억, 전 형사 이부종, 전 사찰계장 강상봉과 정도환과 노장현과 황임규, 전 특무계장 인진영, 전 특무대 상사 노양환 등 11명을 상대로 동 유족회를 대표하여 노현섭 씨는 마산지검에 고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기 4283년 5월부터 동년 9월까지에 이르러 무고한 양민을 보도연맹을 운운하고 경찰유치장과 마산형무소에다 수감한 뒤에 문서상으로는 석방한다고 가정하고 20~30명씩 집단으로 총살 또는 수장하였다. 이 천인공노할 사실을 당해 상부에는 공비를 사살한 것처럼 보고하고, 나머지는 모두 암매장해버렸다는 것이며, 동 유족회에서는 엄벌에 처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으로 당시 암매장한 수개 장소를 발견하여 합장과 아울러 위령제를 거행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족회에서는 경찰과 특무대원들의 학살 내용을 월별로 정리하여 발표했는데, 이전에는 수장만으로 이루어졌다고 판단했으나 집단총살한 것도 많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특무대의 범행: 4283년 7월 15일 당시 보도연맹원 360명을 마산형무소에서 수감한 후 특히 부녀자들에게 능욕을 자행하고, 같은 해 7월 24일부터 9월 초순경까지 이르러 주로 야음을 이용하여 트럭, 버스에 싣고 산골에서 총살한 후 암매장했는가 하면, 또한 선박을 이용하여 바다에서 살해 수장하였던 것이다.


경찰의 범행: 4283년 5월 초순부터 동년 9월 말까지 그 당시 사찰계장 정도환 및 사찰계 형사 노장현 동 형사 황임규 등과 공모 결탁하여 윤윤오 외 180명의 양민을 좌익사상 불순자라고 하여 마산경찰서 유치장에 불법감금하여 빨갱이로 조작할 목적으로 사실 없는 자백을 강요하면서 고문했는가 하면, 석방해준다는 구실로서 해당 가족에게 금품을 강요한 사실이 있었다.


당시에 30만 원을 받고 석방된 사람도 있었으며, 금년 7월 초순경부터 같은 해 9월 말까지 수회에 걸쳐 학살하게 되었는데 경찰서 유치인 명부에는 석방자가 하나도 없었다.


10월 8일 8명을 트럭에 싣고 창원군 진전명 봉곡리 안데미골에서 권총과 카빈총으로 학살한 후 암매장.

7월 중순경 30명을 마산시 봉곡리 수원지 입구 산골에서 총살 암매장.

8월 초순경 12명을 시내 월영동 뒤산 요색고개에서 총살 암매장.

9월 7일 윤윤오 외 4명을 창원면 남산에서 총살 암매장.

9월 중순경 30명을 창원고개에서 총살 암매장.

9월 하순경 30명을 창원군 산면 산골에서 총살 암매장.

- <마산매일신문> 1960년 10월 23일자 기사

 

 


부산제빙회사 앞 부둣가에 정박 중인 어선 선실 아래층에는 아비규환이자 생지옥의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언제 끌려왔는지 10여 명의 청장년들이 차마 보지 못할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휘두르는 몽둥이에 사람 살리라는 아우성소리와 개글거리는 비명소리가 귀청이 떨어질세라 울려왔다. 대검으로 귀를 잘린 청년, 팔이고 허벅지고 마구 칼에 찔리어 유혈이 낭자한 청년, 기진하여 까무러친 장년, 어떤 청년은 선실에 끌어내어 로프로 몸을 묶어 바다에 떠밀어놓고는 물고문을 시키는 것이다. 물위에 떠오르거나 헤엄을 치면 배 위에서 몽둥이로 패고 대나무로 물밑에 처넣고는 익사 직전에 끌어내는 등 전무후무한 고문을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몽둥이로 패고 칼로 찌르고 바다에 처넣고 이러한 고문의 반복으로 하루 밤 하루 낮을 선실 속에서 보내는 것이다. 밤낮으로 새로 붙들려오는 자는 인사불성의 참혹한 형체로 변하는 것이다. 지옥선인들 이렇게 처참할 수 있을 것이며 악랄할 수 있겠는가? 고문은 그 수단이 야만적이고 불법한 행위임은 두말할 나위 없겠으나, 그 목적은 고백을 얻자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백을 얻고 죄상을 밝히기 위한 고문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잡힌 자는 무조건 빨갱이요 반송장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무조건 빨갱이가 되라는 것이다. 이런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고는 거짓말이라도 안댈 사람은 인간이라면 없을 것이다.


무거운 신음소리만이 선실에 자욱한데, 이윽고 젊은 여자의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옆방 기관실에서 들려왔다. 고문당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는 조용해졌다. 간간이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아침 부대원은 킬킬거리며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저희들끼리 웃어댔다. 여자를 고문 끝에 갖은 난행을 한 것이다. 여자는 이튿날도 배에 붙들려 있었고, 사흘 만에 배가 거제도로 떠나는 갑판 위에서 말할 수 없는 곤욕을 당하고 있었다.


밤바다를 달리는 배가 거제도 장승포에 닿은 것은 그날 밤 자정이 가까워서였다. 어두운 선창가에 끌려나온 일행은 다시 포승줄에 묶이고 트럭에 올랐다. 이때, 트럭 옆에서 어떤 군복이 내뱉는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새끼들 배 안에서 적당히 처치할 것이지 뭐 때문에 여기까지 끌고 와. 가다가 산골짜기에서 쏴 죽여 버려!” 차는 부대 본부로 쓰이고 있는 객주집에서 멈추었다. 수십 명의 군복이 몰려나와 트럭에서 내리는 피의자들을 끌고 부대마당에 세우고 마구 몽둥이로 수없이 패고서는 감방에 몰아넣는 것이다. 감방이라고는 하지만 묵은 골방과 마굿간을 변조한 것으로 두루 아홉 자 정도의 방이었다. 


여기에 무서운 고문으로 반죽음이 된 자들만 60여 명씩 두 감방에 수용되었으니 모두가 팔 하나 꼼짝할 수 없게 서서 밤을 새워야 할 판이니 이 숨막히는 고통이란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것이었다. 그대로 시간은 흘러 아침은 왔다. 아침 점호가 있고 난 후, 부대간부가 감방 문을 열었다. 


이때 어떤 젊은이가 “수용자 중에서 생명이 위독한 자가 있으니 이 사람은 달리 편안한 곳에 수용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말이 떨어지자 “넓은 방이 그립거든 이리 나와라. 그리고 위독한 놈도.” 이날 이 두 사람은 아침도 못 먹고 총살되었다.

- <부산일보> 1960년 6월 3일자 기사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민주당의 박찬현 의원은 “6.25 당시 부산이 임시수도로 되었을 때 특무대가 동광동 일대의 집을 검거하곤 1만여 명에 달하는 시민을 공산당 혐의로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고 폭로하고 이 부산의 대학살사건을 거창조사와 함께 조사해주기 바란다”고 의장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곽상훈 의장은 이번 양민학살사건의 조사는 피해지구의 전반에 걸친 것이므로 부산지구의 학살도 마땅히 그 조사대상에 포함될 것이라고 명백히 선언하여 6.25 당시 부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살사건이 제4대 국회 해산을 앞두고 국회조사단에 의하여 천하에 밝혀질 것이다.


박찬현 의원은 이날 부산 대학살사건의 진상조사를 요청하면서 ‘부산 사건이야말로 양민학살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적인 사건이었다’고 밝히고 적어도 만명 이상이 철사에 손이 묶여 트럭에 실려가 학살 수장당하였다고 주장하고, 이로 말미암아 당시의 부산시민들은 벌벌 떨고 있었으며 그 희생자의 유가족이 수만 명에 달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6.25 부산임시수도 당시의 대학살사건은 경찰에 의하여 조작된 언론계 출신의 정치문화공작대 날조사건을 비롯해서 각 기업체의 종업원 또는 일반 시민이 무고한 희생을 당한 예가 허다하며, 날조사건의 각본을 써서 무고한 양민의 생명을 앗은 악질 경찰관 중에는 현직 간부로 승진된 자가 많다고 한다.


또한 이 특무대의 앞잡이로 양민학살의 선봉을 선 자가 부산시내에 아직도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 1960년 5월 27일 <부산일보> 기사

 


 

하루는 젊은 여인이 붙들려왔다. 남편의 도주로 대신 그의 아내가 붙들린 것이다. 남편을 찾아내라는 추상 같은 고문, 나중에는 여인을 완전히 나체로 하여 양 다리를 각각으로 묶어 부대 마당가에 있는 감나무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입에 담지 못할 행패를 하다가 마지막엔 반듯이 뉘여놓고 물을 쏟아 흐르는 물이 배를 타고 여자의 하복부를 흘러내리면 그들은 만족해하는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소위 산부인과 고문이라 한다. 부대간부나 일부 대원들은 부산이나 마산출장이 잦았다. 얼핏 생각하면 빨갱이 검거를 위해 도는 정보활동이라고 볼 것이지만, 일부 대원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이 아니고 뇌물에서 얻은 자금으로 흠뻑 놓고 오는 위로작전이라는 것이다.


부대권의 식사는 언제나 소, 돼지 불고기가 놓이고 풍성했다. 그것도 면 또는 부락단위로 공출하게 되어 있었다는데 오늘은 이 부락에서 쌀을 제공하면 다른 부락에서는 소나 돼지를, 그리고 다른 부락에서는 부식물과 양념을 제공하고, 이것이 늦다거나 한때라도 찬이 소홀하다면 날벼락이 떨어지고 그 동네 구장을 잡아다가 경을 치는 것이다.


이 가난한 섬 주민들은 배를 졸라매고 아끼던 쌀을 내놓아야만 했고 농사밑천인 소나 돼지를 몰아내야만 했고 사랑과 삶의 대들보인 남편을 그들의 총구 앞에 내세워야만 했던 것이다.


유치인 수십 명은 이날 모조리 총살되었다. 다만 부산에서 끌려온 언론인 두 사람만이 살아 철수부대의 마지막 쓰리쿼터에 올랐다.

- <부산일보> 1960년 6월 5일자 기사

 


 

40명 중에서 거의 반수를 골라내어 호 앞에 세웠다. 줄지어 선 사형인에게 마지막 할 말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어부나 농민차림의 청년들은 우리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냐고 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한 늙은이는 “영명하신 성주님 살려달라”고 소리쳐 울었다.


그러나 도시(부산)에서 끌려온 젊은이들은 “뭣 때문에 죽는지”그 이유를 모르고 죽는다고 했고, 이왕 죽는 몸이니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죽겠다고 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총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마구 쏘는 총성 속에 거꾸러지며 발악하는 아우성소리, 대한민국 만세 고리가 처절히 들려왔다.


붉은 피를 쏟는 시체는 아직도 꿈틀거린 채 호 속에 던져져가고 그 위에 흙이 덮어져갔다. 그러나 호 속에서 아우성소리가 들렸다. “나는 총을 안 맞았으니 총을 쏘아달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이때 총은 다시 호를 향해 쏘아댔다.


이날 총살자 20명은 거의 심한 고문으로 기동을 제대로 못하는 자나 몽둥이를 맞아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 그냥 두어도 살 것 같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대검으로 귀를 몽땅 잘린 사람과 칼에 수없이 찔려 그대로 두기는 이미 곤란한 자가 거의 반이었고, 평소에 인상이 밉게 보인 자가 오늘 총살에 끼인 것이다.


총살은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고 새로 끌려온 자는 닥치는 대로 두들기고 두들기다 죽으면 동네사람을 불러내어 이를 처리하고, 그들이 의무라는 것은 사람을 끌어다가 마구 패고 머리나 가슴에 총질만 하면 그만인 것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지에서도 뇌물의 위력은 대단했다. 소를 팔고 세간을 팔아 바치면 한 사람의 목숨은 건지는 것이다. 수삼 인이 뇌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산이나 마산 등지에서 끌려온 자는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 <부산일보> 1960년 5월 30일자 기사

 

 


“내가 형무소에 잡혀 들어간 날은 한국 각지에서 군인 경찰들이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도 없이 무차별 총살한다고 미군 당국에서 한국에 강력하게 항의한 다음날이었지. 내가 숨어있는 동안에 형무소에 끌려들어간 사람은 죄다 죽었고, 내가 들어갈 때도 사람들이 수없이 잡혀 들어왔어. 그때부터는 형식적으로 군법회의란 것을 형무소 안에 설치하더군. 그 안에서의 생활이란 것은 말로 다 못해. 대소변도 허용을 안 해 줬으니 모두 앉은 자리에서 퍼질러 일을 볼 수밖에 없고.


그때 나는 조좌호(훗날 성균관대 총장) 씨와 노병용(보도연맹 경남 간사장인 노백용, 이하 노백용으로 통일.) 씨랑 같이 지내고 있었는데, 한 번은 김창룡 특무대장이 순시를 나와 불편한 사항이 없느냐고 물어. 그래서 용기를 내어 ‘우리도 사람인데 하루에 두 번씩만이라도 소변을 보게 해주시오.’라고 건의했어. 그랬더니 그만 군홧발로 정강이를 걷어 차버리는 거야. 그때는 너무나도 무지한 놈들이 인간을 다루었거든.


한 번은 형무소 안에 설치된 군법회의에서 수감자들을 상대로 형식적인 조서를 만드는 거야. 내 앞사람 차례가 되어 최조관이 이름을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을 하더구만. 이름 중 돌석(石)이 들어가는 말이 있었는데, 그 취조관은 그냥 그 자리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어. 앞사람이 ‘그 자가 아니고 돌석입니다.’고 말하니까, 취조군인이 일어나서 그 사람을 끌고 가 죽도록 패는 기라. 그런 놈들이 사람을 다루었으니 어땠겠어. 아무튼 말이 군법회의였지 혐의를 가려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어. 형식적인 조사만 끝내고 그냥 전원을 학살시켰거든.


어느 날 내 차례가 되어 명령대로 형무소 마당에 늘어섰지. 앞사람들이 트럭에 실려 가는데 내 차례가 되자 갑자기 누가 옆구리를 쿡 쑤시는 거야. 돌아보니 군인 하나가 날 보고 ‘아니! 김 선생님 아니십니까?’하고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더군. 가만히 보니 일제 때 내가 이북에서 선생으로 있으면서 가르쳤던 제자인 거야. 서북청년단으로 내려와 학살에 가담하고 있던 제자였어. 그가 날 옆으로 비켜 세우는 거야. 노백용 씨도 그때 너무 연세가 많아 비틀거릴 정도이니까 학살 행렬에서 옆으로 제외시키더구만. 우리가 빠지니까 끌려가는 행렬들은 우는 낯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당신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 세상에 이 원통함을 알리고 원수를 갚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떠났어.


그날 나와 노백용 씨 말고는 전부 죽었지. 나는 그 뒤 무혐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노백용 씨는 계속 감옥에 갇혀 있다가 그 안에서 회갑까지 맞았어. 내가 나중에 부산형무소 상황을 묘사해서 <옥중회갑>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노백용 씨를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이었어.


당시 특무대와 경찰에서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없애버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 일단 붙들어다놓고는 ‘문화공작대’니 ‘과학동맹’이니 하는 있지도 않은 죄목을 뒤집어씌웠어. 내가 풀려난 뒤 몇 개월 잠잠하더니 또 군법회의에서 날 불러들였어. 나는 그때 감시를 철저히 받고 있었으므로 도망갈 엄두도 못 내고 사형당하는 날만 기다리며 살았었지.


형무소에 갇혀 있는데, 하루는 군법무관이 간수를 내보낸 뒤, 나에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어. 뜯어보니까 서류는 없고 시루떡이 담겨있는 거야. 내가 그 당시 운이 계속 좋았던 건데, 실은 그 군법무관도 나한테 배운 제자였던 거야. 박태지라는 사람이었는데, 나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며 ‘선생님, 너무 자주 가둬서 죄송합니다.’라고 그래. 


나는 체념상태에서 ‘이 사람아, 떡이 목에 넘어가겠나. 곧 죽을 사람이 혼자 이걸 먹어 뭐 하겠나.’고 대답하고는 당시 다른 방에 붙들려있던 김종겸 변호사와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김모, 정모 교수 등을 거명하며 이 기회에 그 친구들이나 마지막으로 보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지. 


그랬더니 그 제자가 하는 말이 ‘선생님은 왜 자꾸 그런 놈들하고 친합니까. 그러니까 자꾸 의심을 받는 것 아닙니까’하면서 짜증을 부리잖아. 나는 ‘이 사람아, 그분들은 절대 불순한 사람들 아니다. 너희가 그렇게 만들어 죽이려고 하니까 그렇지’라면서 다시 통사정을 했더니, 김종겸 변호사만 데려오더군. 그때 그분에게 떡을 권하고는 며칠 후 나만 석방되어 나왔어.”

- 정희상: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 돌배개 82~85페이지.

 

 


지리산 골짝골짝의 수많은 양민학살사건은 대부분 그 베일이 벗겨졌지만 아직도 그 골짝 주민들에게조차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들이 꽤 많다. 지리산 동남쪽에 도사리고 앉은 하동군 옥종면 일대의 학살도 그렇다. 제 2공화국의 햇빛은 골고루 비치고 있지만, 이곳 주민들은 아직도 어떤 보복행위를 두려워하고 좀체 말문을 열려 하지 않는다.


(단기) 4283년 6월부터 4284년 7월 사이에 산발적인 양민학살이 이곳 옥종면 13개 리의 산골짝에서 자행되었다 한다. 이 무렵 면민들은 전율할 불안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운이 나쁘면 끌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갔다. 면의 유지들은 시국대책위원회라는 걸 조직하고 마을사람들의 목숨을 건져내기에 분망했다.


그들은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200여 명의 향토방위대, 의용경찰대, 육군 제 3연대의 총부리를 막아내기에 애태웠다. 당시 3연대 정보관 김대위는 ‘염라대왕’으로 알려졌다. 4283년 10월경 청수 청룡 양구 등 부락민 200여 명이 그곳에서 40리나 떨어진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기거하던 염라대왕 앞에 대령했다. 이에 당황한 시국대책위원회에서는 마을마다 쫓아다니며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염라대왕께 뇌물을 먹이기 위해서다. 피땀 묻은 돈을 거두고 소와 돼지를 잡아 그에게 바쳤다. 잔뜩 뇌물을 먹은 김대왕은 마음이 후련해졌던 모양이다. 150여 명은 돌려보내고 40여 명은 그대로 처단되었다 한다.


같은 때쯤 이곳 마을사람들 50여 명이 빨갱이 탈을 뒤집어쓰고 전라도로 끌려가 학살된 일이 있다 한다. 이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난 한 사람이 권구환 씨는 고향을 떠나 함안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 1960년 6월 21일 <국제신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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