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윤동주, 간판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함성호, 상상의 몸
나는 산개해 있다
나는 무수한 길 위에서
있었고, 맥락 없이
존재했다 나는 이끌렸고
소금처럼 굳어버렸다
결정의 빛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임영조, 그대에게 가는 길
그대에게 가는 길을 묻지 않는다
지금 내 생각 내 몸을 끌고
홀로 걷는 이 길이 나의 길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 눈길 같은
그 깨끗한 여백 위에 시 쓰듯
밤낮 온몸으로 긴 자국
이 세상 모든 길은 자기가 낸 업보다
내가 언제 어느 길을 택하든
내 그림자가 한평생을 동행하리라
외롬나무 한 주가 내 따르고
내 발자국에 음각되는 불립문자가
구천까지 나를 밀고가리라
그대에게 언제쯤 당도할까
스스로도 묻지 않고 나선 길인데
어느덧 앞길이 뉘엿뉘엿 저문다
물위를 달리는 배도 정박하려면
진창에 닻을 박아야 한다, 허나
생의 닻은 때때로 제 발등도 찍는다
잠시 마음의 돛 내리고 방파제에 올라
저린 발 주무르며 쉬려니 멀리
줄포 앞바다가 허연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저 바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 과연
깊고 푸른 중심으로 드는 길이 보일까
해안선이 밀어낸 섬 그대는 멀고
어두운 개펄이 은근히 나를 잡아당긴다
해도, 나 함부로 따라가지 않는다
도종환, 병든 짐승
산짐승은 몸에 병이 들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다
숲이 내려보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고
제 혀로 상처를 핥으며
아픈 시간이 몸을 지나가길 기다린다
나도 가만히 있자
나희덕, 연두에 울다
떨리는 손으로 풀죽은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 눈에 밀어넣었다
연둣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