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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도 가만히 있자
게시물ID : lovestory_921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43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7/31 17:06:35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윤동주, 간판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文字)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2.jpg

 

함성호, 상상의 몸




나는 산개해 있다

나는 무수한 길 위에서

있었고, 맥락 없이

존재했다 나는 이끌렸고

소금처럼 굳어버렸다

결정의 빛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3.jpg

 

임영조, 그대에게 가는 길




그대에게 가는 길을 묻지 않는다

지금 내 생각 내 몸을 끌고

홀로 걷는 이 길이 나의 길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 눈길 같은

그 깨끗한 여백 위에 시 쓰듯

밤낮 온몸으로 긴 자국

이 세상 모든 길은 자기가 낸 업보다

내가 언제 어느 길을 택하든

내 그림자가 한평생을 동행하리라

외롬나무 한 주가 내 따르고

내 발자국에 음각되는 불립문자가

구천까지 나를 밀고가리라

그대에게 언제쯤 당도할까

스스로도 묻지 않고 나선 길인데

어느덧 앞길이 뉘엿뉘엿 저문다

물위를 달리는 배도 정박하려면

진창에 닻을 박아야 한다, 허나

생의 닻은 때때로 제 발등도 찍는다

잠시 마음의 돛 내리고 방파제에 올라

저린 발 주무르며 쉬려니 멀리

줄포 앞바다가 허연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저 바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 과연

깊고 푸른 중심으로 드는 길이 보일까

해안선이 밀어낸 섬 그대는 멀고

어두운 개펄이 은근히 나를 잡아당긴다

해도, 나 함부로 따라가지 않는다

 

 

 

 

 

 

4.jpg

 

도종환, 병든 짐승




산짐승은 몸에 병이 들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다

숲이 내려보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고

제 혀로 상처를 핥으며

아픈 시간이 몸을 지나가길 기다린다

나도 가만히 있자

 

 

 

 

 

 

5.jpg

 

나희덕, 연두에 울다




떨리는 손으로 풀죽은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 눈에 밀어넣었다

연둣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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