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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풍경이 나를 거닌다
게시물ID : lovestory_921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1
조회수 : 43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8/02 18:22:33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임영준, 귀 기울이자




언제

귀 기울인 적 있었던가

마음을 열었었나

가면을 쓰고

막춤만 추었지

허튼 넋두리라도

귀담아 두었더라면

흐름을 끊진 않았으리

아직도 늦지 않았어

귀 기울이자

 

 

 

 

 

 

2.jpg

 

김혜순, 풍경 중독자




풍경이 나를 거닌다

내가 밤의 풍경을 쓰다듬는다

이렇게 비 오는 밤, 풍경이 침대 위에서 돌아눕는다

풍경은 왜 거기 있지 않고 여기 있는가

소름이 돋아 우둘투둘한 풍경

두 팔로 껴안아도 여전히 온몸 떨리는 풍경

왜 풍경은 몸속으로 들어와 고통이 되고 싶은 걸까?

비 쏟아져 들어오는 지하도를 옆구리쯤에 품은 풍경

그 지하도 밖으로 나오자

녹슨 철골들이 산발한 채 상한 젖꼭지에서 붉은 물을 뚝뚝 흘리는

그 아래 입을 쓱 닦은 깨진 유리병이

피를 뚝뚝 흘리는 밤의 풍경

그곳, 우산도 없이 내가 서 있는 밤의 풍경

내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

멀리 보이지 않는 관악산이 비켜서고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풍경에게도 깊이가 있나봐요

나날이 풍경이 깊어져요 명치끝을 파고들어요

호흡이 바뀔 때마다 풍경은 바뀌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내 방이 녹아서 강물에 떠내려가요

왜 고통이 몸 밖으로 나가면

한낱 고물 집하장이 되어버리는 걸까?

안에서 밖으로 내뿜어지는 풍경 속

나는 어째서 녹물을 칙칙 뱉는 짓다 만 우정병원 콘크리트에

기대고 서 있는지 비는 철썩철썩 내 뺨을 갈기고 있는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바뀌어버리는 예민한 풍경의 살갗

그래, 이제 그만 풍경의 문을 닫아걸자

행복했어요 멀리서 바라보기엔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참혹했어요

비 오는 밤의 풍경이 내 두 팔 안에서

나 없이도 울고, 나 없이도 헐떡거린다

비 오는 밤, 풍경의 한복판

온몸의 피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그곳

귀머거리 여자처럼 큰 소리로 울며 내가 지나갔지요

먹구름이 몇 가닥 얼굴 위로 흘러내려요

언제나 한 장의 표면밖에 가진 것이 없는 풍경

그런데, 도대체 이 풍경의 출구는 어디에요?

 

 

 

 

 

 

3.jpg

 

길상호, 그늘에 묻다




달빛에 슬며시 깨어보니

귀뚜라미가 장판에 모로 누워 있다

저만치 따로 버려둔 뒷다리 하나

아기 고양이 산문이 운문이는

처음 저질러놓은 죽음에 코를 대고

킁킁킁 계절의 비린내를 맡는 중이다

그늘이 많은 집

울기 좋은 그늘을 찾아 들어선 곳에서

귀뚜라미는 먼지와 뒤엉켜

더듬이에 남은 후회를 마저 끝냈을까

낱개 현에 미처 꺼내지 못한 울음소리가

진물처럼 노랗게 배어나올 때

고양이들은 죽음이 그새 식상해졌는지

소리 없이 밥그릇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나는 식은 귀뚜라미를 주워

하현달 눈꺼풀 사이에 묻어주고는

그늘로 덧칠해놓은 창을 닫았다

성급히 들어오려다 창틀에 낀 바람은

다행히 부러질 관절이 없었다

 

 

 

 

 

 

4.jpg

 

이장욱, 구름의 소비자




어제의 소비자로서 오늘은 구름을 팔고

구름의 음악을 구입하기 위해 개처럼 일을 하고

내일은 구름의 금치산자로서 나날이

소모하는 구름이 줄어들었다

생활필수품답게 구름은 영원을 모른다

지구에 도달한 뒤 사라진 햇빛들의 수집가

구름을 훔치는 사람의 고독

구름의 무수한 작명가들

꿈에서 구름을 본 적이 없다

구름은 비가 내릴 때도

눈이 내릴 때도 필요하다

우산을 쓰고도 자꾸 무언가가 필요해져서 우리는

구름처럼 흘러다녔다

 

 

 

 

 

 

5.jpg

 

최정례, 껌벅이다가




느닷없이 너 마주친다 해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할 것 같다

물건을 고르고

지갑 열고 계산을 치르고

잊은 게 없나 주머니 뒤적이다가

그곳을 떠나듯


가끔

손댈 수 없이

욱신거리면 진통제를 먹고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잠들려고

잠들려고 그러다가


젖은 천장의 얼룩이 벽을 타고 번져와

무릎 삐걱거리고 기침 쿨럭이다가

왜 그럴까 왜 그럴까

도대체 왜 그래야 할까

헛손질만 하다가 말 듯이


대접만 한 모란이 소리 없이 피어나

순한 짐승의 눈처럼 꽃술 몇 번 껌벅이다가

떨어져 누운 날

언젠가도 꼭 이날 같았다는 생각

한다 해도

그게 언제인지 무엇인지 모르겠고


길모퉁이 무너지며 너

맞닥뜨린다 해도

쏟아뜨린 것 주워 담을 수 없어

도저히 돌이킬 수 없어

매일이 그렇듯이 그날도

껌벅이다가

주머니 뒤적거리다

그냥 자리를 떠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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