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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환, 후박잎에 비 쏟아질 때
후박잎에 후두둑
비 쏟아진다
나뭇잎 사이로 넓은 바람 온다
바람 사이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사람들
뒷모습만 보인다
풀꽃들 무거워 기울어지고
벌레들이 두텁게 울고 있다
먼 데 하늘이 저 혼자 흔들리고
젖은 숨소리들 삭아지는 소리
들린다
김병호, 세상 끝의 봄
수도원 뒤뜰에서
견습 수녀가 비질을 한다
목련나무 한 그루
툭, 툭, 시시한 농담을 던진다
꽃잎은 금세 멍이 들고
수녀는 떨어진 얼굴을 지운다
샛길 하나 없이
봄이 진다
이편에서 살아보기도 전에
늙어버린, 꽃이 다 그늘인 시절
밤새 혼자 싼 보따리처럼
깡마른 가지에 목련이 얹혀 있다
여직 기다리는 게 있냐고
물어보는 햇살
담장 밖의 희미한 기척들이
물큰물큰 돋는, 세상 끝의 오후
문정희, 돌아가는 길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이태수, 풍경(風磬)
바람은 풍경을 흔들어 댑니다
풍경 소리는 하늘 아래 퍼져 나갑니다
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나는
그 속마음의 그윽한 적막을 알 리 없습니다
바람은 끊임없이 나를 흔듭니다
흔들릴수록 자꾸만 어두워져 버립니다
어둡고 아플수록 풍경은
맑고 밝은 소리를 길어 나릅니다
비워도 비워 내도 채워지는 나는
아픔과 어둠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두워질수록 명징하게 울리는 풍경은
아마도 모든 걸 다 비워 내서 그런가 봅니다
신용목, 일어나지 않는 일 때문에 서해에 갔다
저녁이 하늘을 기울여, 거품 바다
그득 한 잔이다
속에서부터, 모든 말은 붉다. 불길 몸으로 휘는 파도의
혀
돌아와 한 주전자 수돗물을 받았다
이 위로, 몇 척의 배가
지나갔을까
불에 올렸다